10년 전, 동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무장(옛 무장현)기포일을 기념일로 정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에 상정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강력 반발한 뒤 1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기념일 제정이 막혔다. 그 결과 참여자 유족들의 마음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피로도 역시 극에 달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사적인 동학농민혁명의 역사가 옳바로 쓰여야 하고, 그에따라 학생들의 교과서도 올바로 기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국가유공자 서훈 기준은 1895년 을미년으로부터 기점을 잡고 있어 그 전해인 1894년에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동학농민군들은 그 어떤 이름도 남김없이 묻혀버린 것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서 기념사업들이 순조롭게 진행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10년 전 상태에서 머물러 있다.
지금 일부에서는 전주화약일에 대하여 역사성과 절차상의 하자를 들어 부정하면서 33개 문항에 걸쳐 공개 질문서를 전국적으로 배포했다. 기념재단 이사장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양 몰아가고 있는데, 물론 역사성과 절차상에 미흡한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10년 전 무장기포일로 기념일이 결정 되었을 때에는 무엇이 문제였단 말인가?.
동학을 전공한 전문 학자들이 3회에 걸쳐 학술발표회를 가졌으며, 직접 참여하지 못한 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보냈다. 그런 점에서 역사성이나 절차상의 문제 등 하등의 문제가 없었음에도 무장기포일에 대하여 부정하고 폄하했다.
그러면서 정읍의 황토현 승전일, 아니면 고부봉기일로 해야 한다고 우기지 않았는가. 또 이전의 1기 기념재단에서 진행한 회의에서도 무장기포일로 다수가 기울어지자 회의장에 수십명이 난입하여 회의를 강제로 무산시킨 일 등은 차마 거론하기조차 민망한 일이 아니었던가.
무장에서의 그 유명한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봉준을 도솔대장으로 한 손화중포 농민군이 고부성을 점령하여 고부군민들의 원한을 풀어준 일 등은 동학농민혁명사에 있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날이다. 그러나 지금 유족의 고통과 기념사업의 장래, 그리고 순절한 분들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서, 솔로몬왕의 재판에서처럼 눈물을 머금고 아이의 한쪽 팔을 놓아준 것이다.
기념일이 지역 기념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중요성이 어디 가겠는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빠른 시일 내에 결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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