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동상면에는 밤샘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 주변에, 또 동네에 있을 것만 같은 정겨운 이름이지만 이곳은 호남평야의 젖줄 만경강의 발원지로 불리는 생명의 샘이다. 만경강 본류에 고산천, 소양천, 익산천, 전주천, 삼천 등의 지천을 더한 이 만경강 유역은, 기름진 평야와 구릉을 이루는 우리나라 대표적 곡창지대로서 그 자리를 꿋꿋이 지켜왔다.
문득 만경강에 대한 상념에 잠기었을 때, 한두 방울의 물이 모여 작은 샘을 이루고, 냇물이 되어 강을 이루고 또 강이 흘러 바다에 이른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크고 작은 지류들이 모여 망망대해로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모두의 삶과 함께해온 우리네 강을 떠올리게 된다. 어릴 적 고향의 냇가에서 멱을 감고 물장구치며 고기를 잡고 둑길을 내달리며 뛰어놀던 추억, 그리고 강줄기를 따라 자전거를 탔던 일이나 강가 반대편 먼발치의 풍경을 바라봤던 일 모두 이 지역 강과 함께 공유해온 우리 삶의 모습이다.
만경강은 오랜 역사가 어느 곳보다 짙게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크고 작은 하천 가운데, 밤샘으로부터 흘러온 만경강 역사에는 유독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잘 드러나 있다. 본래 ‘사수강(泗水江)’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던 만경강은 일제강점기에 강제로 이름이 바뀌게 되어, 나라를 빼앗긴 설움에 더해 지역의 정체성마저 내주어야 했던 슬픔이 있다. 게다가 이름은 물론 자연의 모습마저 잃어버렸다. 만경강이 평야 지대를 지나며 이곳을 적셔준 덕분에 이 지역은 늘 우리나라 벼농사의 중심지였는데, 거꾸로 이곳에서 나오는 양곡들로 인해 만경강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경강 또한 양곡을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어 유려하게 굽이치던 수로가 오로지 빠른 이동을 위한 직강화 길이 되었다.
만경강 옛 물길의 흔적은사수강으로 표기된 고지도에서 엿볼 수 있지만, 아직도 만경강 변에 물기를 머금고 습지가 되어 적산가옥과 더불어 우리 곁에 남아있다.
이처럼 추억과 아픔이 뒤엉켜 우리 역사와 삶의 한쪽에 자리한 만경강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 이 지역 출신으로서는 크나큰 소명이나 다름없었다.
만경강 하천환경정비사업을 통해 생태와 역사문화가 깃든 이야기를 엮어내 그 의미가 살아있는 만경8경을 함께 선정하고, 생태를 복원하고 지역주민을 위한 쉼터조성과 강변 정취를 느끼며 달릴 수 있는 자전거 길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였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이고 역사이며, 문화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되었다. 만경강을 떠올리는 일은 언제나 삶의 훌륭한 지침이 되고, 교훈을 준다. 조그만 샘으로부터 출발한 물길이 땅을 적시는 생명의 강길이 되어 쉼 없이 흘러가듯, 우리의 삶 또한 이 땅의 거름이 되어 계속 흘러가리라 믿는다. 예나 지금이나 풍요로운 이 땅을 두고,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중앙관리에게 보낸 편지에 “만일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고 썼다.
결국,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자 했던 것이, 이 지역에 남겨진 우리의 유산으로도 이어지고 있음을 명심하고 그 마음을 자랑스럽게 이어가야 할 것이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