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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선조들은 삼복더위를 지나는 날 중, 음력 유월 보름을 물의 날로 삼아 유두절(流頭節)의 풍속을 즐겼다. 유둣날이 되면 물맞이하러 가자!며 시원한 물줄기로 더위를 식히고 물로 액운을 씻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유두는 머리를 감거나 빗는다는 소두(梳頭), 폭포에서 물을 머리에 맞는 의미인 타두(打頭), 물머리 수두(水頭), 머리의 옛말인 마리를 물과 합하여 물마리, 물맞이라고도 불렀다. 유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 감고 목욕을 한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유래하여 청(靑)을 상징하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인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최고의 유두수로 쳤지만, 지역마다 색다른 유둣날 물맞이 장소가 있었다. 유두는 신라의 이두(吏讀)식 표기라는 말이 전해지며 천 오백여 년을 이어온 우리 고유 명절로 알려져 있다. 음력 유월 보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고, 계음(?飮, 목욕재계하고 삿된 기운을 씻으며 즐기는 잔치)하는 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는 내용이 고려 문인 김극기의 문집인 『김거사집』에 남아있으며, 유두날 술을 마시는 유두음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 등 고려와 조선 시대의 다양한 문헌과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 중,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음력 6월령에는 삼복은 속절(俗節)이요 유두는 가일(佳日, 좋은 날)이라 /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 사당에 올린 다음 모두 모여 즐겨 보세라는 대목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육자 한자 들고 보니 / 유월이라 유둣날 탁주 놀이가 좋을씨고라는 각설이 타령의 한 구절에도 유둣날의 풍습이 묻어난다. 유둣날에는 여름철 과일과 유두음식을 사당에 올리며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두제사를 지내고 물가를 찾아 더위를 식히며 하루를 즐겼다. 『동국세시기』에 밀가루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유두면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대표적인 유두음식인 유두면과 국물에 경단을 넣어서 만든 수단(水團)을 먹으면 액운을 막아주고 유둣날 국수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장수한다고 믿었다. 또한, 농사를 중시 한 선조들은 유둣날에 논과 밭에서 농신제를 지냈다. 삼복더위를 거칠 때마다 벼가 빨리 자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장마가 지나고 더워지면서 여름 햇볕 아래에 각종 작물이 잘 자란다. 이때는 보리나 밀 그리고 참외를 비롯한 밭작물을 수확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수확을 하고 마지막 모내기와 김매기도 하며 농작물 관리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음력 유월 보름 즈음은 농부들이 바쁜 농번기이다. 게다가, 병과 해충이 생기고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새나 짐승들이 꼬이기 쉬우니 병충해 관리를 잘하고 밭의 농작물에 짐승들의 피해를 잘 막아야 한다. 또한, 논에 물을 잘 대어 논물관리에 힘을 써야 할 때다. 하여, 병충해가 없고 논물이 마르지 않으며 논둑이 터지지 않고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논고사, 논고시, 밭꼬시, 논꼬, 논멕이기, 유두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농신제를 지낸 것이다. 유둣날 논과 밭에서 부침개를 부쳐 냄새를 풍기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은 벼와 밭의 농작물이 병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에 따라 유두음식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고사의 재물로는 팥시루떡을 찌고 간혹 팥죽을 쑤기도 했다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찰떡이나 밀떡과 송편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감자를 쪄 으깨어 떡 모양으로 만들어 논 물꼬와 논둑 밑에 놓았으며 떡을 꼬챙이에 꽂은 논꼬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 유두제사와 농신제를 지낸 뒤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산이나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가에서 물맞이하며 유두놀이를 즐겼다. 또한, 선비들은 아예 탁족(濯足)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심신을 정화하며 풍류를 즐겼다 하니 피서의 원조가 유두인 셈이다. 지역마다 물맞이 명소가 있었는데 부안의 직소폭포와 완주의 위봉폭포 아래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물을 맞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더위가 가신다. 또한, 유둣날 이름난 약수를 찾아가서 머리를 감고 여의치 않을 시 그 물이라도 적시면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고 했는데, 순창에는 물맞이 명소로 약수가 나는 샘물이 있다. 지금도 맑은 물을 내어주고 있는 구림면의 물통골 약수와 샘의 물이 구불구불 용의 모양으로 흘러가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은 인계면의 두룡정(頭龍井)이 유명했다. 두룡정은 단오 때부터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으로 약수가 효험이 크다고 소문난 유둣날 물맞이 명소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 아쉽기만 하다. 유둣날 목욕재계하고 제를 지내던 것은 지금까지도 몸가짐을 바로 잡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남아있지만, 유두절이라 불렸던 오늘날 유두는 명절의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작년 장마로 힘든 시절을 지내고 무더운 여름을 지내다 보니, 물맞이하던 선조들의 풍속도 논꼬시를 몰래 빼먹던 개구쟁이들의 모습도, 어머니를 따라 샘가에서 머리에 물을 축이던 어린 시절의 오랜 기억들도 아련하다. 더위와 오랜 유행병에 지치다 보니 옛 풍속에 남겨진 의미와 흔적들이 더욱 소중하다. 돌아오는 유둣날에는 집에서 유두국수를 해 먹고 흔히 말하는 랜선여행으로 물맞이 명소를 다니며 그 시원함에 마음을 싣고 모두의 안녕을 기원해야겠다.
7.7cm 높이의 작은 <유리제 사리병>. 긴 목에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이 흐르는 몸체의 녹색 유리가 뿜어내는 빛이 영롱하다. <유리제 사리병>에는 여덟 잎의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제 마개가 꽂혀 있고 <유리제 사리병>이 안전하게 놓이도록 네모난 받침을 붙여 놓은 <금제사리병받침>은 연꽃이 피어난 모양의 <금제연화대좌>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기품있고 조화롭다. 천상(天上)의 아름다움이라 칭해지는 녹색 <유리제 사리병>은 백제 무왕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유리제 사리병>은 찬연한 금빛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제사리함>에 모셔져 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가장 성스러운 대상으로 숭상되는 사리를 유리병에 직접 담은 이유로는 당시 유리가 금보다 더 귀했기 때문이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기들은 당대 최고급의 재료와 최고의 기법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불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용기, 공물, 부장품과 함께 귀중한 사리를 담아 보관하고 장엄(莊嚴)하던 사리장치를 사리장엄구로 칭한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1965년 왕궁리유적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듬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 자료를 통해 오래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도 석탑 기단부가 토단에 매몰된 상태로 기울어진 모습이 마치 피사의 사탑 같은 느낌이다. 조속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일어 1965년 10월부터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석탑의 해체 작업 중 1층 옥개석 상면과 기단부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가 확인되었다. 옥개석 상면 동쪽 사리공에는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한 <금제사리내함>이 < 금동사리외함> 내에 있었고, 서쪽 사리공에는 금강경판이 봉안된 <금동경판내함>이 자리했다. 그리고 사리공 바닥에는 실로 꿴 오색영롱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기단 내부의 심초석에는 品자 형의 방형 사리공 3개가 확인되었는데, 동편의 사리공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과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는 <청동요령>이 발견되었고, 북편의 사리공에는 향류로 보이는 흑색 유편과 철편이 수습되었으나 서편의 사리공은 비어 있어 아쉽게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는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그리고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가 전해진다. 577년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왕흥사지 사리병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 민무늬이다. 반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639년에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백제 왕후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봉영기와 함께 나온 금제사리병은 뚜껑부터 몸체 전체에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제작 시기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금제사리내함> 표면은 미륵사지 금제사리병과 비슷한 연꽃무늬 등이 같은 백제 장인의 솜씨로 착각할 정도로 흡사하다. 특히, 불경을 새긴 <금강경판>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로, 금강경의 내용을 19판에 새겨 한 첩으로 만들었다. 각각의 판에는 17행 17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경체의 문자로 금강경을 눌러 찍은 것이 뚜렷하며, 은판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경판의 글씨체를 분석한 결과 백제 무왕대로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왕궁리 오층 석탑이 자리한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일대로 예로부터 왕검이, 왕금성, 왕궁평이라 불렸다. 왕궁의 흔적과 관련된 지명이 연상되지만, 여러 문헌에서 이미 폐사된 터에 탑만 남아있는 왕궁리사지로 기록이 되어 있고 고지도에서도 석탑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왕궁리유적이 궁성으로 사용되다가 사찰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 시기의 궁성 유구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유구로 구분이 되고 있다. 궁성 내부에는 건물지 등과 정원유적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서북편에서는 대규모의 공방 시설과 함께 화장실 유구가 확인되었다. 공방 시설은 왕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으로, 공방지에서는 금, 유리, 동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련과 용해 작업을 하면서 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소토와 노지, 폐기장과 석벽시설과 관련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름다운 공예품을 비롯한 <유리제 사리병>도 백제인의 뛰어난 솜씨로 직접 제작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품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를 일컬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는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들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제계하고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 이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솜씨를 극찬한 것이다. 석탑에 갇혀있다 나타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타임캡슐처럼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며 우리를 백제의 시간으로 안내해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했던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2020년 국립익산박물관이 생기면서 55년 만에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방이 궁금한 <유리제 사리병>에 담겨 있던 16립의 사리는 보수를 마친 1966년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되었고 그 중 5립은 부석사 삼층석탑에 분안(分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땅히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금강경의 구절이 울림을 전해온다. 천년이 넘는 시간이 잠겨있는 왕궁리유적에서는 켜켜이 쌓인 백제의 흔적을 오롯이 찾아내는 연구와 발굴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고로운 모든 손길에 감사를 보내며 국립익산박물관을 찾아 백제인들의 세련된 취향과 솜씨를 만나러 가야겠다.
펴지고 겹쳐지는 것은 대쪽 때문인데 / 맑은 바람이 솔솔 이는구나 / 유월 손에 들고 부치면 / 무더위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 그러니 여러 사람과 마땅히 나눠야 하네 / 청량한 맛을 어찌 차마 혼자만 차지할꼬 관청에서 보낸 부채를 받은 심정을 담은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시구이다. 여름 생색에는 부채, 겨울에는 책력이라는 속담과 옛 시구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부채는 여름을 준비하며 주고받는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선조들이 여름을 맞으며 부채를 선물한 데에는 무더위를 잘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나쁜 기운까지도 날려 버리라는 바람도 담겨 있다. 그 귀한 의미가 담긴 여름맞이 풍속은, 생활방식이 변하면서 선풍기와 에어컨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손 선풍기의 등장에 희미해졌다. 부채는 오랜 세월 더위를 쫓는 등 생활에서 사용하며 의례와 주술 용도로 큰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 등을 이용하다 점차 바람을 일으키기 편리하게 만들고 종이가 발명되면서 발전했다. 부채란 명칭도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인 부치는 채의 줄임말이다. 부채의 한자어 선(扇)은 새의 깃털인 우(羽)와 드나드는 문인 호(戶)가 합하여 새의 날개처럼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며, 그 명칭은 모양과 재료 쓰임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부채는 풍속화와 부채에 그림이나 글을 새긴 서화선(書畵扇)과 다양한 문헌의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으로는 기원전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다호리 유적의 부채 자루와 북한의 국보 제28호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에 그려진 깃털 부채를 든 인물의 모습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견훤(867~936)이 고려 태조 왕건의 즉위 소식을 듣고 공작선(孔雀扇)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접는 부채 등 다양한 부채를 사용한 고려 시대에는 비단으로 만든 부채의 매매를 금지하며 백성들의 사치를 경계한 법령이 『고려사』에 전해진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부채는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선비들은 올곧음을 상징하는 대나무와 기품 있는 한지로 조화롭게 만들어진 부채를 극찬했다. 특히, 대의 껍질을 얇게 깎아 맞붙여 부챗살을 만드는 합죽선을 선호했으며, 부채를 멋과 풍류를 즐기는 삶의 도구로 팔덕선(八德扇)이라 칭했다. 부채가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쫓고, 방석으로 쓰이며, 밥상으로도 쓰고, 머리에 이고 물건도 나르며, 햇볕을 가리고, 비를 막으며, 파리나 모기를 쫓고, 얼굴을 가리는 쓰임으로 인해 여덟 가지 덕을 지녔다 한 것이다. 매년 단옷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통제영이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는 일이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나무를 조달하기 쉬운 전라도와 경상도의 주요 산지에는 종이를 뜨고 관리하는 지소(紙所)가 있어 부채를 만드는 환경이 좋았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대나무의 주산지인 담양, 구례, 장성, 나주 등과 최상품 한지를 생산하는 전주(당시 완산)가 부채의 생산지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은 각 지역에서 제작된 부채를 모아 임금에게 진상했다. 전라도 관할기관인 전라감영 내에 부채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선자청(扇子廳)과 지소를 두었는데, 『완산부지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에 잘 묘사되어 있다. 현재 완산경찰서 민원실 뒤편으로 위치가 추정되는 큰 규모의 선자청을 보면 전주가 부채의 주요 생산지임이 확인된다. 전주의 선자청이 활성화되자 타지방의 부채 장인들이 전라감영 근처로 모여들어 공방을 형성했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 폐쇄되기 전까지 선자청은 부채를 제작했다. 선자청이 없어진 이후에도 전주 부채는 일본인이 자본을 대고 부채 장인들이 부채를 제작하여 전국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전주 부채의 명성은 풍류와 향기를 실은 이 여름의 부채라는 신문의 기사 제목에 조선의 부채라고 하면 전주를 생각한다는 것과 전주의 합죽선을 제일로 친다는 기사로 엿 볼 수 있다. 해방 후 부채 장인들은 부채골로 불리는 인후동의 가자미 마을과 아중리의 석소마을 그리고 새터, 성황당, 안골 등에 집단 거주하며 부채를 제작했지만, 선풍기의 보급에 따라 부채의 수요가 줄어들자 영세함을 면치 못했다. 대다수의 부채 장인들이 부채 제작을 그만두었지만, 부채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장인을 칭하는 선자장의 명맥은 김동식(1943년생) 선자장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김동식 선자장은 가자미 마을 출신으로 14세가 되던 1956년 아버지의 권유로 외가에 들어가 부채 제작 기술을 배웠다. 나주와 장성을 거쳐 석소마을에 정착한 그의 외가는 합죽선으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오롯이 옛 기술을 그대로 전승받은 김동식 선자장이 제작하는 부채는 기품이 있고 부챗살이 탄력이 있으면서 바람이 잘 일어난다. 2007년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2015년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아들인 김대성(1976년생)이 합죽선의 가치를 5대째 이어가고 있으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선자장들이 전통 부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하지를 지나 점점 더워지니 옛 선조들의 취향을 더한 부채가 그리운데, 이규보의 이로부터 해는 더디기도 하여 / 사람은 붉은 불이 되는구나 / 언제나 하늘까지 뻗친 부채를 얻어 / 키질하듯 온 천하를 부채질하리란 시구가 눈에 들어온다. 비록, 천하를 키질하듯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킬 부채까지는 아닐지라도, 부채의 고장 전주를 찾아 얼굴에 송송 맺히는 땀방울을 다스리며 마음 한 가닥 청아한 바람을 일으키는 멋과 여유를 느끼면 좋겠다.
야단법석이란 말이 있다. 보통은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말하나, 원래는 야외에 세운 단에서 불법을 펴는 경건한 의식의 자리인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불교 용어에서 유래했다. 야단법석이 행해질 때는 멀리서도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걸개그림인 괘불을 걸기도 하는데, 진안 금당사에는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이 모셔져 있다. 금당사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에 자리한 사찰로 금산사의 말사이다. 금당사는 통일신라 시기 중국 승려 혜감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지만,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스님의 제자 중 한 명인 무상(無上)스님이 백제 말 제자인 금취스님과 더불어 금동사(金洞寺)를 창건했다는 백제사찰의 창건설이 천 사백년을 이어온다. 금당사는 자연 동굴을 법당으로 시작하여 혈암사라 불렸으며 고려말 나옹선사의 수도처인 나옹암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의 금당사 자리에서 나옹암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옛 금동사 터로 추측되는 자리를 고금당(古金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현재의 자리에 금당사가 건립된 것은 1675년이다. 이후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요사채를 비롯한 전각들이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고 새로 지어지며 영산으로 알려진 마이산에서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금당사의 한자 이름이 고지도와 여러 문헌에 金塘寺, 金堂寺로 혼동되어 쓰였지만, 1692년 제작된 <금당사 괘불>의 화기(畵記)에 강희 31년 임신 6월 모일 용출산 금당사(金堂寺)에 불탱(佛幀)을 걸다라는 구절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마이산은 시대별로 계절별로 불리는 이름이 다양한데 용출산은 고려 시기 불리던 이름이다. 괘불이 언제부터 그려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각에 모셔진 불화를 야외로 옮겨 사용하다가 대형 불화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7세기경의 괘불이 많이 그려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기 정유재란과 임진왜란을 겪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고 위안을 받기 위해서 활성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괘불 중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당사 괘불>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으로부터 1997년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었다. 폭이 대략 36cm인 삼베 13매를 세로로 이어 붙여 전체 높이 829cm 폭 455cm인 대형 불화로, 4명의 화원 스님인 명원, 처헌, 위청, 치헌이 그렸다. 그려진 괘불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양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치켜 올라간 눈매가 당당하고 수려한 코에 굳게 다문 작은 입술이 위엄있고 조화로운 모습을 지녔다. 머리에는 분홍색 연꽃이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7면의 얼굴을 2단으로 묘사하였고 봉황으로 좌우를 장식했다. 왼손은 연꽃 가지를 받치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세 송이의 연꽃 가지를 잡고 있는데, 붉은 연꽃은 피어 있고 분홍색과 노란색의 연꽃은 피지 않은 꽃봉오리로 표현했다. 광배는 머리 광배와 몸 광배를 갖추고 있는데, 원형의 머리 광배는 가장자리에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의 테두리를 두르고 초록색으로 채색을 했다. 몸 광배 가장자리부터 빛이 밖을 향해 뻗어가듯이 표현되었으며 불꽃 문양 안에 들어있는 불상인 화불을 양쪽에 10구씩 두었고, 광배는 화염문이 그려진 붉은 테두리 안에 연주문을 두르고 연주문 안쪽 연밥 부분에 범(梵)자를 쓴 연꽃을 배치하여 17세기 다른 괘불에서는 볼 수 없는 범자문을 그려 넣은 것이 특별하다. <금당사 괘불>의 주존에 대해서는 석가모니불이 꽃을 들어 진리를 나타냈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을 근거로 석가모니 부처로 알려져 왔으며 기타 불화 조성 시기가 재란을 겪으며 어려운 시기니 중생을 구제할 미륵불을 그렸다는 등 여러 의견이 있으나 화기의 명문에는 괘불탱으로만 되어있어 그 존명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단의 화기에는 탱화를 그린 화가와 탱화를 그릴 때 쓰인 재료, 불사에 재물을 바친 시주한 사람, 법회를 주재하는 법사와 신도는 물론이고 1951년 화면 손상 부분 등에 보수가 있었던 것을 제2회 보결불사록으로 하여 탱화를 수리한 불사에 관한 기록을 세세히 남겨 놓았다. <금당사 괘불>은 특히 기우제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비를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단비를 내려준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멀리에서도 보며 위안을 받도록 큰 괘불을 걸고 야단법석을 행하는 불교 의식이 웅숭깊다. 하지만 이제는 보존을 위하여 보물 괘불을 법당 앞 야외에서 장엄하게 펴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이제는 보물 <금당사 괘불>을 대신하여 불자들과 방문객들이 그 영험한 모습을 접할 수 있도록 반으로 축소한 괘불을 극락전에 모셔두어 희망과 위안을 건네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우리나라 대표 불교 행사인 연등회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가 있었다. 석가탄신일을 축하하고 진리의 빛으로 세상을 비춰 차별 없고 풍요로운 세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연등회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코로나 19 여파로 등재의 기쁨을 온전히 나눌 수 없어 아쉬웠지만,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는 시기 자랑이 된 연등회의 저력이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밝히는 힘이 되어 주기를 기원해 본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월이다. 이해인 수녀는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색 서정시를 쓰는 달을 오월이라 했다. 이 초록이 한창인 늦은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흰 눈이 나무에 쌓인 듯이 꽃피는 나무가 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그 모습에 잘 어울리는 하얀 눈꽃이라는 의미도 품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라는 학명의 이팝나무이다. 이팝나무의 꽃은 좁쌀에서 이름이 유래된 조팝나무의 흰 꽃송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팝나무는 조밥을 붙인 것처럼 꽃이 피는 장미과의 나무이고, 이팝나무는 바람개비처럼 네 갈래로 갈라진 꽃잎의 물푸레나무과 나무로 크기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팝나무는 언뜻 꽃송이가 팝콘이 펑펑 튀겨진 모습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사발에 흰 쌀밥이 소복하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여 쌀밥나무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이팝나무는 풍년을 점치는 나무였다. 문화재청에서 1967년 천연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받은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도 흰 꽃이 풍성하게 많이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믿게 하는 나무이다.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는 특히 수형이 아름다워 만개한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나무로 유명하다. 꽃이 피는 이즈음이 되면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려는 사람들이 이 나무의 꽃이 피어난 모습을 보러 온다. 더욱이 이곳의 이팝나무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내려달라 정성을 들이면 비를 내려주는 신목(神木)으로도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300여 년의 오랜 세월 마을 어귀에서 풍년을 비는 간절한 바람과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한 마을 사람들의 풍상을 오롯이 품고 있는 나무이다. 오래전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린 이팝나무를 선조들은 여섯 가지의 도를 깨우친 나무라 하여 육도목(六道木)으로 혹은 유소수(流蘇樹)라고도 불렀는데, 유소는 깃발이나 장신구 등에 매듭짓고 꼬아서 다는 매듭 장식 술로 이팝나무의 흰 꽃잎이 모여 길게 늘어진 것이 하얀 실로 만든 술이 늘어진 것처럼 보여 불린 이름이다. 또한, 이팝나무는 식용으로 나물로 무쳐 먹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잎을 차(茶)로 사용해 다엽수라고도 하고 한방에서는 탄율수라 하여 꽃과 열매를 중풍과 기억력 감퇴 그리고 토담증 등 다양한 약재로 쓴다. 지금의 이팝나무로 이름 붙여진 것에는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에 피는 꽃이라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렸는데 입하가 연음이 되어 이파라 불리다 이팝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李)씨 왕조 조선 시대에서는 벼슬을 해야 임금이 내리는 이씨의 밥인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쌀밥을 이밥이라 하여 이밥나무가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진안에서는 이팝나무를 이암나무 혹은 뻣나무로도 부르는데, 쌀밥나무와 관련하여 아기사리 이팝나무라 불리는 나무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시체를 묻은 일명 애기무덤을 아기사리라 하는데 마이산을 지척에 둔 진안 마령초등학교에 자리한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군락에 담긴 슬픈 이름이다. 흉년이 들어 어른도 굶어 죽는 시기에,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 어미의 빈 젖을 물고 죽은 갓난아이와 먹을 게 없어 배고파 죽거나 병들어 죽은 어린아이를 묻어 준 부모는 아이의 넋을 위로하면서 무덤 곁에 아가...죽어서라도 실컷 쌀밥을 배불리 먹거라...하며 쌀밥을 닮은 꽃이 피는 이팝나무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흉년과 전염병이 들면 하나둘 늘어나는 어린아이의 무덤과 함께 부모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이팝나무가 점차 군락을 이루게 되어 흰 꽃송이가 수북한 밥꽃으로 눈이 시리게 피어난 것이다. 그곳은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보호를 받다가 1922년 지금의 마령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학교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 아기사리의 슬픔을 딛고 아이들이 못다 이룬 꿈들을 꽃 피우듯이 교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리하여 아이들을 묵묵하게 지켜주고 있다.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1968년 천연기념물 제214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군락이다. 당시 약 280살 정도 추정된 나무를 포함하여 수나무 3주 암나무 10주 총 13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973년부터 나무가 고사하기 시작하여 1996년 7주만 남았다가 2017년 4주에서 2018년 3주, 지금은 2주만 꽃을 피워내고 1주는 안타깝게도 고사가 진행 중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끝을 다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오래전 축대 작업 시 점질토인 논흙이 복토로 사용되면서 이팝나무의 수세가 쇠약해져 이후 생육환경을 개선하는 등 문화재 돌봄 사업의 노력을 지속하며 남은 나무들을 돌보고 있지만, 아이들의 무덤을 오랫동안 지켰던 나무 역시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 가지 못하니 안타깝다. 작년 2020년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마령초등학교 총동창회가 기증한 후계목으로 인정되는 두 그루의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와 함께 군락을 이루며 그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또한, 전북 산림환경연구소에서는 진안과 고창 두 곳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의 후계목을 완주 대아수목원에 육성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는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후계목 그리고 해 맑은 모습으로 학교 안의 아가사리 이팝나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킴이를 자청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가정의 달인 오월 초록색 서정시를 쓰며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라는 이해인 수녀의 오월의 시가 눈꽃처럼 피어난 이팝나무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다.
조선의 반 고흐 최북,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애꾸눈이 된 기인 화가라 전해지니 한쪽 귀를 자른 반 고흐에 빗대어진 별칭이다. 반 고흐보다 100여 년 먼저 화가로 활동한 최북은 시(詩)와 서(書)에 능했던 조선 후기 대가로 그를 기리는 최북미술관이 무주에 있다. 최북(崔北, 1712-1786년경)은 본인을 못난이라 부르며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두 글자로 나누어 칠칠(七七)이라 했고, 붓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주로 사용했다. 그 외 세 가지 재주가 있다는 삼기재, 기암, 성기 등의 이름이 있으며 특히 산수화의 대가라 최산수(山水)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어릴 적 본명은 식(植)으로 최상여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려한 그림과 글 그리고 독특한 기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만, 그의 자세한 생애는 불분명하다. 다만 중인 신분의 가난한 전업 화가이었지만 그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여 교류한 화가와 문인들의 기록 그리고 그의 괴팍한 기행이 남긴 일화들이 150여 점의 작품과 함께 남아 있다. 최북의 모습은 본인의 그림 속에서 그를 추측할 수 있는 형상과 조선의 최고 화가들인 표암 강세황, 김홍도, 심사정과의 모임을 그린 그림 <균와아집도>에서 최북을 엿볼 수 있는데 머리에는 치건을 쓰고 바둑을 두고 있다. <균와아집도>는 당대 최고 화가들의 합작으로 김홍도가 인물을 그리고, 심사정이 소나무와 돌을 그렸으며, 강세황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최북은 색을 입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둑 두기를 좋아하며 『수호전』을 즐겨 읽은 것으로 알려진 최북은 애주가로 유명하다. 매일 5~6되씩 술을 마셨다 하는데 호방한 성격과 더불어 술에 취해 기이한 행동을 한 일화가 전해진다. 금강산을 유람하던 중에는 구룡연의 풍경과 술에 만취하여 천하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겠다며 물에 뛰어들어 동행한 사람들이 놀라 끌어내었다고 한다. 최북은 취벽에 유별난 성품 그리고 작달막한 체구에 애꾸눈이란 외모에 관한 평이 남아 있는데, 최북이 자신의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을 멀게 한 것은 고흐의 광기와 달리 권력에 저항했던 결과였다. 한 벼슬아치가 그림을 그려 달라 요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오만하다며 자신의 지위로 협박을 하자 세상 사람이 나를 저버리게 하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게 하겠다하고는 필함에 있는 송곳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을 잃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늘 한쪽 눈에 말발굽으로 만든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최북은 비록 그림을 팔아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림을 그려주기 싫은 자에게는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고 그림값을 너무 과하게 쳐주면 그림값도 모른다며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와서 조선 밖에까지 화가로 명성을 떨친 것으로 알려졌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최북이 일본으로 갈 때 게으른 나는 평생 장관을 못 보았건만, 그대는 바다 건너 하늘 밖을 보게 되었구료. 해 뜨는 동쪽에는 진짜 해가 있을지니 그것을 그려서 내게 보여주게나라는 송별의 시구를 전해 주었다. 붉은 해와 함께 일렁이는 파도와 어우러지는 그의 작품 <일출>은 이익의 청에 화답하는 것 같다. 비록 중인 신분이지만, 지식인 화가로 그림과 시에 능했던 최북은 이익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문인과 교류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훗날 영의정까지 오른 남공철(1760-1840)은 『금릉집』에 최북의 일화와 그와 술을 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한 내용을 담아 <최칠칠전>을 남겼다. 그 외에 조희룡, 정약용, 신광하 등이 문헌에 최북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다. 취벽과 괴팍하다 알려진 일화와 달리 최북의 그림은 온화하고 대담하며 조화롭다. 대표작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에는 평온한 그림 위에 빈산에 아무도 없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는 소동파의 시구가 의미 깊다. 또한, <계류도>에는 흐르는 물을 시켜 속세의 시끄러움을 막는다라는 최치원의 시구를 남겨 놓았는데 서체와 그림이 더없이 조화롭다. 겨울밤 귀가하는 사람을 그린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에는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이라는 시구가 담겨있다. 거친 눈보라가 느껴지는 그림에 담긴 시에서는 술에 취해 동사한 것으로 알려진 최북인지라 돌아갈 집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담겨와 애달프다. 기행 탓에 그의 본질이 가려졌고 칠칠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낮추었지만, 칠칠은 꽃피는 계절이 아니라도 꽃을 피워내는 능력을 지닌 당나라 신선 은천상의 호이다. 날마다 술에 취해 가을에도 진달래꽃을 피워낸 신선을 닮고 싶었던 최북은 칠칠이로 자신을 칭하며 신분의 경계를 허물며 마음에 꽃을 피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계절 그가 신선이 되어 술을 빚고 꽃을 피우며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무주의 산빛 속으로 마음을 보낸다.
예나 지금이나 선운사는 봄 풍경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봄날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라고 묻는 노랫말을 따라 흐드러진 꽃과 눈물처럼 지는 춘백을 보고만 와도 좋다. 이즈음의 선운사는 뒤꼍에 있는 춘백의 붉은 꽃에 더해 오래된 배나무의 꽃도 화사하다. 봄빛이 가득한 배꽃과 어우러진 지장보궁에는 특별한 사연을 간직한 불상이 모셔져 있다.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으로, 선운사 도솔암에 봉안된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과 같은 형태의 불상이다. 지장(地藏)보살은 하늘과 인간 세상 그리고 지옥세계에 있는 중생까지도 남김없이 구제해 주는 자비의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정토(淨土) 신앙이 유행했던 고려 시대 후기 널리 신봉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장보살은 악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지옥의 고통을 받는 모든 중생까지도 구원하여 모든 악업에서 해탈하게 하는 보살로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보살로 받들어진다. 지장보살은 다른 보살과 달리 머리에 보관을 쓰지 않고 삭발한 민머리의 모습으로 대부분 표현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두건을 쓴 모습이 유행하였다. 선운사의 두 지장보살도 두건을 쓴 모습으로 그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운사가 모두 불에 탄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화를 면한 불상이다. 보물 제279호인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청동 표면에 금칠하여 금동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두건과 유사한 보관을 머리에 쓴 모습으로 이마에 두른 두건에서 띠가 내려와 귀를 덮고 가슴까지 흘러 내려있다. 온화하게 내려 보는 눈과 수려한 코와 작은 입술 그리고 굵게 주름진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에 후덕한 얼굴이다. 목걸이를 한 건장한 몸은 장식이 더해진 주름진 두꺼운 옷에 가려져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고 당당한 풍채로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어깨높이 정도 들어서 엄지와 넷째 손가락을 맞댈 듯 굽혔고, 왼손은 아랫배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약간 구부린 수인으로 손금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장보살 중 가장 아름다운 지상보살로 손꼽히는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에는 기적 같은 사연이 전해진다. 1936년 일제강점기 일본인 2명과 도굴꾼에 도난당해 거금에 팔려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였다. 하지만 이를 소유했던 일본인이 자수하듯 연락을 해와 선운사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처음 소장한 일본인의 꿈에 지장보살이 수시로 나타나 나는 본래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꿈을 꾼 이후로 병이 들고 점차 가세가 기울게 되자 두려운 마음에 금동지장보살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해 버렸다. 다음에 소장하게 된 이에게도 어김없이 꿈속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돌려보내 달라고 했으나 이를 무시하자,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어 그 역시 두려움에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 후에도 소유자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소장한 사람들마다 기이한 꿈을 꾸고 수난이 계속된 일들이 알려졌고, 결국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일본인이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본디 제자리인 선운사로 모셔갈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에 선운사로 돌아왔다. 반환을 위해 일본 히로시마에 갔던 일행이 찍은 기념사진에는 함께 간 선운사 이우운 주지 스님의 이름과 함께 간략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선운사로 돌아온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모실 곳이 마땅치 않아 관음전과 성보박물관에 모셨다가 2019년 지장보궁을 건립 봉안하여 81년 만에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선운사는 일본에서도 조선 땅의 모든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러 돌아오고자 했던 지장보살의 사연을 비롯하여 구원과 나눔에 관한 전설이 많이 깃든 사찰이다. 선운사에서 멀지 않은 해안가의 검단리는 선운사 창건 설화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선운사는 신라왕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577년 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 중, 용이 살던 못을 메우고 구름 위에 누워서 참선한다는 뜻으로 선운사(禪雲寺)를 창건했다 알려진 검단선사의 이야기는 현신한 지장보살과 다르지 않다. 그는 빈한했던 지역 사람들을 안타까이 여겨 소금을 굽고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봄과 가을이면 소금을 바치며 은혜를 갚는 소금으로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도 검단리로 했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중생을 보살피고 지옥에 들어가서라도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과 검단선사의 설화가 웅숭깊다. 예전과 다른 일상으로 온전한 봄날을 즐길 수 없지만,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본다. 바람 불어 설운 날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가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도 살펴보고 자비와 구원의 손길이 깃든 선운사의 가치를 온전히 마음에 담아 올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어화 우리 벗님네야 화전놀이 가자스라 봄날, 꽃놀이를 청하는 정겨운 문장이다. 소설가 최명희(1947-1998)는 《혼불》에 <어느 봄날의 꽃놀이, 화전가>라는 부제를 달아 삼월 삼짇날의 풍습을 자세히 묘사했다. 비단같은 골짜기에 우리들도 꽃이 되어 별유천지 하루놀음, 화전말고 무었있소. 화전놀이 하러가세 겨우내 웅크리다 봄을 맞아 기쁜 마음으로 들뜬 여인들이 꽃놀이하는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자 뱀도 동면에서 깨어나 나오기 시작한다는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삼일이 삼짇으로 변형되어 불린 삼짇날은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날이다. 삼짇날 봄을 즐기는 꽃놀이를 화전놀이라 하는데 야외에 나가 꽃을 보며 거닐다 화전(花煎, 꽃지짐)을 만들어서 먹으며 즐긴 세시풍속을 말한다. 《혼불》에서도 화전놀이가 오랜 전통인지라 조선사람들이 떼로 모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일본 경찰들도 어쩌지 못했다고 소개했다. 우리 선조들은 계절에 따라 노는 시기를 두어 즐겼는데, 유교적 가부장제하에서 조선 시대 여성들은 여럿이 모여 놀이를 즐기기는커녕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궁중이나 양반가도, 일반 백성 층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 년에 단 하루 진달래꽃이 화사하게 핀 삼짇날의 화전놀이는 야외로 나가 즐길 수 있는 여성들의 놀이였다. 화전놀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신라 시대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은 경주의 화절현(花折峴)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김유신 딸인 재매부인이 묻혀 재매곡이라 불린 계곡에 매년 봄꽃이 필 때 여인들이 그 골짜기의 물가에서 잔치를 가진 『삼국유사』 기록을 꽃놀이의 유래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음력 3월 3일 즈음 들녘에 나가 봄날을 즐긴 답청(踏靑)의 풍속과 봄날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3월 3일 즐기는 것이 어찌 사치함이겠는가라는 것과,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태평 시대의 즐거운 일이라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궁에서는 화사하게 진달래가 피면 곱게 차려입은 왕비가 궁녀들과 함께 진달래꽃을 따다가 화전놀이를 즐겼으며, 세도가의 부인들도 이를 따라 장막을 크게 드리우고는 며느리들도 다 모아 정성 들여 준비하고는 호세와 사치를 다투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삼짇날 화전놀이가 여성들에겐 유일한 단체 놀이이자 집단 나들이였지만, 선비들은 여성과 달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는 매화음(梅花飮)을 주로 즐겼으며 풍류의 일환으로 일상에서 화류(花流)를 즐겼다. 그 중, 조선의 문인 임제(1549-1587)는 작은 개울가에 돌을 고여 솥뚜껑 걸고 / 기름 두르고 쌀가루 얹어 참꽃을 지졌네 / 젓가락 집어 맛을 보니 향기가 입에 가득 / 한 해 봄빛이 배속에 전해지네.라는 맛깔나는 시로 남성들도 봄철 음식인 화전을 별미로 즐겼음을 남겨놓았다. 진달래는 화전으로 부치고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하고 술을 빚었는데 진달래 꽃잎은 먹을 수 있어 참꽃, 꽃잎에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는 철쭉은 개꽃이라고 한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난 뒤에 잎이 나오고 철쭉은 잎이 나오고 꽃이 피며 솜털이 난 잎에 반점이 있다. 또한, 진달래를 두견화라고도 하는데, 나라를 빼앗긴 중국 촉나라의 망제(望帝) 두우의 넋이 두견새가 되어 피눈물을 흘리면서 날아다녀 그 흘린 눈물로 산에 붉은 꽃이 피어 두견화라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름 따라 진달래술을 두견주라 하고 봄날 화전을 안주 삼아 두견주를 마시는 것을 선비들은 호사라 여겼다 한다. 두견주는 가람 이병기(1891-1968)의 가문에서 즐긴 계절주로도 유명한데, 전수자인 이연호(1946년) 명인에 따르면 두견주는 집안의 진달래가 활짝 핀 것을 이용해 꽃술을 따 깨끗이 다듬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담고 있다고 하며 가을 국화주와 대표적인 계절주라 했다. 삼짇날을 즈음하여 즐긴 시절 음식으로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에서는 화전과 붉은색 물을 들여 꿀물에 띄운 수면(水麵)을 소개했으며 각종 문헌 속의 시문이나 조리법에 삼짇날 즐긴 음식이 등장한다. 화전을 부쳐 먹으며 즐긴 놀이로는 꽃쌈(花戰) 놀이가 있다. 꽃쌈은 여러 가지 꽃을 꺾어서 꽃의 수가 많고 적음을 겨루기도 하고 꽃이나 꽃술을 맞걸고 당겨 끊어지는 쪽이 지는 내기 놀이이다. 또한, 화전놀이를 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담은 화전가(花煎歌)를 지어 발표하며 문장을 뽐내기도 했다. 혼불에서 등장하는 <화전가>를 살펴보면, 너의 꽃은 무엇인가...홀로피는 국화꽃은 절개있다 대실댁 우리종부 꽃이로다 며 집안 여인들의 특징을 꽃에 빗대고는, 남편의 이야기에서는 우리 낭군은 유식하지만 가난하고 돈 없으니 허사라고 한탄하는 깊은 속내를 말하고, 널뛰기 그네뛰기 다리밟기 화장하는 즐거움은 남모를 여자의 기쁨이라 표현했다. 단 하루, 해방의 날이었지만, 풀어내고는 다시 일 년을 견뎌낸 그녀들의 동력이 화전놀이에 담겨있다. 봄날 꽃놀이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 늙어지면 못 노나니 /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라는 노래는 그야말로 떼창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던 화전가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그 차차차!가 건네는 맛을 알 리가 없고, 꽃놀이로 당시 시간을 즐길 줄 알았던 선조들이야말로 진정한 흥과 멋을 알던 멋쟁이였던 것 같다. 봄은 마음에 먼저 든다했다. 봄꽃이 화사한데도 코로나19로 만끽하지 못하는 우리의 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옷을 잘 입으면 누구나 돋보인다는 의미로 쓰인다. 왕자와 거지에서도 왕자의 옷으로 바꿔 입으면 거지도 왕자의 신분이 된다지만, 반면 직위를 내려놓을 때에는 옷을 벗는다라고 표현을 한다. 그렇다 보니 생활의 필수품에서부터 관습을 대표하는 것으로 옷을 들 수 있는데, 우리에게는 고유한 우리 옷, 한복이 있다. 한복에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와 얼이 깃들어 있다. 선조들이 한반도에 자리한 때부터 추위를 막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지어 입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했다.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골침은 옷을 엮고 꿰매는 도구로 고조선 시대부터 초의생활(草衣生活)에서 벗어나 나무의 껍질이나 마로 옷감을 짠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우리 옷은 수렵 활동에 적합한 북방 특성인 스키타이계 복식으로 점차 농경 생활에 편리하게 변화했으며, 삼국 시대에 들어서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제도적인 정비와 함께 복식 제도가 만들어졌다. 삼국 시대부터 한복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가 상의와 하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이 시기는 신분에 따라 복식이 구분되었는데 지배계층의 복식은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그러자 834년 신라 42대 흥덕왕은 사치를 금지하는 법령을 만들어 백성들의 의생활을 규제하였다. 이 법령으로 신분에 따라 복식의 종류와 재질을 제한했으며 화려한 복식이 허용되지 않은 평민들은 우리 고유의 옷을 주로 입었다. 삼국의 기본 복식은 모양과 색만 다양해졌을 뿐 기본 구성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모습은 신라 백제의 기록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고유의 기본 양식과 중국에서 들여온 외래 양식으로 구성된 복식이 공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통일 후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복식이 많아지면서 지배계층은 옷은 화려해졌고, 고려 시기, 특히 고려 후기 원나라 몽골족의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몽고풍이 유행했다. 반대로 원나라에서는 고려풍습이 유행하면서 서로 복식 문화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조선 시대는 건국 초기까지 고려의 복식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점차 특유한 형태로 변화해 차츰 독자적인 복식 제도와 체계를 갖추었으며 궁중과 양반들의 예복이 발달했다. 예를 표현하고 지키기 위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등에는 신분의 복식에 대해 자세하게 규정하여 왕과 관료, 일반 백성의 신분에 따라 소재, 색, 문양, 장신구 등에 차등을 둔 복식 제도를 만들었다. 독자적인 복식 제도가 있었지만, 지배층은 상황에 따라서 중국의 복식과 우리 고유의 복식을 모두 입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은 시대에 따른 변화 속에서도 우리 고유의 한복을 그대로 입었다. 성리학이 발달한 시기 바깥일 위주로 생활하는 남성은 겉옷인 포(袍)가 다양하게 발달했고, 가정 위주로 생활을 하는 여성의 경우 저고리가 발달하였다. 옷 위에 입는 포에 비하여 짧은 상의를 지칭하는 여성의 저고리는 세종 시기 한자어 적고리(赤古里)로 등장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치마가 한글 쳐마로 기록되어있다. 조선 초 허리선까지 내려오던 저고리가 중‧후기에는 가슴선까지 올라가기도 했지만, 저고리는 당시 상황과 유행에 따라 짧았다 길어지기를 반복했다. 한복은 입체적인 체형에 맞게 만드는 옷이 아니라 평면적인 형태로 짓는 옷이지만, 한복을 입으면 입체적이고 풍성해 보인다. 이는 받침옷인 속옷부터 겉옷까지 겹겹이 여러 옷을 겹쳐 입는 특유의 입는 법을 가지고 있어서, 속으로부터 차올라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자연스레 체형을 보완하고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선으로 아름답게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보통의 날, 보통의 장소에서 한복 입은 모습을 보기 쉽지 않지만, 왕의 복식을 입은 어진이 모셔진 전주의 경기전 일대 한옥마을에서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고운 모습이 한복문화 지역거점도시로 지정된 전주를 꽃처럼 수 놓고 있다. 최근, 한복문화 지역거점도시로 한복 전시를 열며 활발한 행보를 보이는 남원에서는 보통의 남원사람을 기록하면서 한복 찾기에 나섰는데, 옷장 속에 간직한 김금선(1941년 생)의 기억이 담긴 한복이 수집되었다. 이 두루마기는 시어머니가 지으신 거라 80년 된 거로 시아버지의 깨끗한 성품이 그대로 보여. 매일 같이 풀 메기고 다듬던 게 여적 있었네. 우덜은 예전에 시집갈 때 평생 입을 옷을 지어갔어라며 옷을 매만지는 손길에서 그녀의 인생이 엿보인다. 이렇듯 한복은 우리 삶의 흔적이자 문화이다. 가끔 중국에서 한복에 오지랖을 더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지만, 사실 오지랖의 유래는 가슴을 감싸는 웃옷의 부분을 칭하는 말이다. 오지랖이 넓으면 가슴을 넓게 감싸 좋다는 것인데, 오히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람을 오지랖이 넓다는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북한은 한복을 민족 옷 또는 조선 옷이라고 칭하며 한복 문화인 조선옷 차림 풍습을 2016년 국가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는 한복과 관련된 무형문화재가 기능부분인 침선장, 자수장 등으로 지정된 상태로, 한복 입는 문화는 무형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 고장의 전주와 남원은 한복 입는 문화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켜 한복문화를 무형문화재로 등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충분한 지역이다. 봄날, 우리의 옷 한복이 남북 한복 문화를 오지랖 넓게 아우르며 세계에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더욱 상승시켜 그 화사한 날개를 활짝 펼치기를 소망해 본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다. 똑같은 고물을 가져다줘도 때마다 받는 엿의 양을 늘리고 줄여 값을 쳐주듯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엿장수를 빗대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엿장수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비대면 시대이다 보니 엿장수는 커녕 가까운 일가친척도 만날 수 없다. 세상일이란 진짜 엿장수 마음처럼 가늠하기 쉽지 않다. 엿을 파는 오랜 풍속은 김홍도의 <씨름>과 김준근의 <엿 파는 아이>에 등장하는 앳된 엿장수의 그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엿장수는 엿 가락이 담긴 목판 양쪽을 천으로 묶어 목에 둘러 감고는 쩔그렁 쩔그렁 가위질을 하며 엿이야 엿이야 / 어~엿 장수가 왔어요 / 울릉도 호박엿 강원도는 옥수수엿 / 경기도 찹쌀엿 전라도는 쌀엿 / 판다 판다 엿을 판다... 라 구성지게 소리치며 장터와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엿장수가 엿을 팔며 부르는 소리는 손님을 불러 모으는 호객의 노동요이다. 각설이 타령과도 같은 타령조의 엿타령으로 엿장수 맘대로 개사하여 익살스럽게 부른 것을 재미삼아 따라 부르곤 했었다. 오래전부터 맛있는 간식거리였던 엿인지라 달달한 유혹의 소리가 들려오면 엿을 바꾸어 먹을만한 물건을 들고 가 엿장수가 쳐주는 엿값에 따라 환호를 지르거나 속상해하기도 했다. 엿을 바꾸어 먹으며 하는 놀이로 엿치기 놀이가 있었는데, 엿가락을 부러뜨린 뒤 속에 난 구멍의 크기를 재거나 뚫린 구멍의 숫자를 재어서 겨루는 놀이이다. 엿 가락의 어느 부분을 부러뜨리냐에 따라서 엿값을 내야 했기 때문인지라 꽤나 신중하게 내기 모임을 했다. 그 구멍은 엿 안에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드는 독특한 과정 때문에 생기는데 그 구멍이 성패를 가르게 하였다. 엿은 잡아당기면 끊어지지 않고 늘어나 계속 이어진다는 뜻의 이어지다, 잇다에서 유래한 우리말이라 전해진다. 엿은 오래전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이전 삼국 시기에도 곡물의 당화(糖化) 과정으로 즐긴 음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최초의 기록으로는 고려 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한식날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으니 행당맥락(杏?麥酪)이 모두가 나에게는 해당이 없구나란 구절에 등장하는데 행당과 맥락을 엿으로 본다. 행당은 은행을 갈아 쑨 죽에 엿을 넣어 먹는 중국풍습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이 되며, 맥락은 감주나 식혜와도 같은 것이니 고려 시기 이미 선조들이 엿의 단맛을 즐긴 것을 고증해 준 셈이다. 한자어로 되직한 엿을 당(?) 묽은 엿을 이(飴)이라 하는데, 식혜가 졸여져 굳기 전의 상태를 물엿, 조금 더 졸인 것을 조청이라고 하며, 굳힌 것을 갱엿이라고 한다. 그 갱엿을 먹기 좋게 늘어뜨려 공기를 넣어 뽑아 만든 것이 흔히 먹는 엿이다. 엿은 약으로도 쓰여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처방법으로 약효를 가진 식물을 우려내어 그 물로 다리는 엿을 고(膏), 고제(膏劑)라고 하며 약엿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기에는 엿 제조법이 『규합총서』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관련 기록이 많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궁 진상 품목으로 엿에 관한 기록들이 있는데, 특이한 기록으로는 영조시기 엿장수와 떡장수, 술장수들이 과거시험장에서까지 팔아대서 시험장이 소란스러워지고 있다고 질타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약용의 『흠흠신서』에는 엿장수가 엿값 시비 끝에 살인을 한 죄를 벌한 기록도 남아 있다. 당시 엿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엿 맛이 좋은 고을로 조선의 미식가 허균은 개성에서 나는 엿이 상품이고 전주지방에서 나는 엿이 그다음으로 좋다고 했으며, 조선 문인 이하곤도 전주에 들러 시장을 보고는 전주 사람들이 엿을 잘 만든다는 기록을 남겼다. 근래에 들어 임실 삼계의 박사마을 엿이 유명하다. 삼계는 유서 깊은 선비고을인데, 1600여 명의 인구에 200여 명의 박사를 낸 곳으로 전국에서 인구 대비 가장 많은 박사를 배출해 박사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져 입에 달라붙지 않고 맛도 좋지만, 시험을 치를 때 합격 엿을 먹는 풍습이 있어서인지 삼계에서 나는 박사마을 쌀 엿은 명물이 되었다. 엿이 산골 마을의 자산이 된 연유로는 원이숙(1949년생,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80호) 명인의 꿈이 한몫했다. 고향 순창에서 어린 시절부터 솜씨 좋은 할머니와 친정어머니가 해주신 엿 맛과 집안의 풍습을 보며 자랐어요. 이맘때면 엿 고는 냄새로 집안에 단내가 났어요. 설날 세배 오는 손님들 상에 엿을 올리려 엿을 고았거든요. 달달한 집안 내음과 단지 안에 맛있던 엿이 추억이자 힘이었어요 이후 명인은 임실 삼계 출신 남편과 결혼해 10년을 전주에서 살다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를 하면서 솜씨 좋은 시어머니의 엿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부녀회장을 맡아 집집마다 전해져 오는 엿 제조 방식을 배우고 나눠 엿 만드는 일을 마을의 부업으로 자리하게하고는 사업체를 만들었다. 어렵게 살던 마을 사람들은 엿을 팔아 돈을 벌자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녀를 명인으로 만들어준 엿은 어린 시절 추억이자 선물이 되었다고 한다. 설 대목을 앞둔 박사마을에는 엿을 고는 달달한 내음이 동네를 휘감는다. 하지만, 지난 추석에 이어 다가오는 구정 설날에도 엿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는 우리의 풍습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마음대로 만날 수 없어 아쉽고 서글프지만, 따뜻한 안부를 선물처럼 건네며 나아질 일상을 달콤하게 꿈꾸어 본다.
완주가 법정 문화도시가 되었다. 그 소식에 코로나로 힘들고 매서운 날씨 속에서도 완주 군민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희망찬 새해를 맞았다. 문화도시는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자원을 활용해 문화생태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5년간 100억의 예산을 지원해 주는 사업이다. 인구 9만의 작은 도시가 기적을 이루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전국 지자체 가운데 군 단위로는 처음이자 호남에서 유일하게 완주가 선정된 데에는 나름의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단시간에 이루어진 쾌거라기보다는 그동안 공동체 문화의 비전을 바탕으로 주민들과 자치단체가 힘을 모아 기반을 다지고 노력해온 결과였다. 문화의 색을 확연하게 드러낸 지역이 아니지만, 완주는 이미 로컬푸드로 전국적인 명성이 자자했으며 문화로 도시재생을 한 선진지로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 중심에는 수탈의 아픔을 지닌 장소를 문화가 깃든 장소로 승화시킨 일제 강점기 양곡창고, 삼례문화예술촌이 있다. 일제 강점기 삼례에 큰 규모의 양곡창고가 있던 것에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다. 만경강을 끼고 있는 삼례는 김제 익산과 더불어 만경평야를 품고 있는 곳이자 과거 삼남대로와 통영대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1892년에 동학교도들이 삼례집회를 열어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지피고, 1894년 제2차 동학농민혁명의 봉기를 일으킨 주 무대로 농민들의 뜨거운 힘이 서린 곳이다. 반면,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일제 강점기 수탈 물자 수송의 중심지가 되기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개항되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수탈을 감행했다. 1920년에는 산미증식계획을 밀어붙여 호남지방의 질 좋은 양곡을 군산과 목포의 항구를 통해 수탈해 갔다. 삼례역에서 출발하는 화물열차와 서해만조 때 만경강까지 올라오던 배로도 지역에서 나오는 쌀 대부분을 걷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했다. 한편, 삼례에 양곡을 보관할 대형 창고가 필요해지자 일본인 농장주들이 만든 농업회사인 이엽사(二葉社)가 그 일을 맡아 진행했다. 1926년 일본인 대지주 시라세이(白勢春三)의 이엽사 농장 창고가 현재 삼례문화예술촌이 있는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완주지방 대지주 농장이었던 조선농장, 전북농장, 공축농원과 더불어 양곡 수탈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삼례는 농업을 주산업으로 삼아 성장했고 물산과 사람들이 몰려드는 전성기를 보냈다. 점차 경제환경이 바뀌고 주변 지역의 개발 사업으로 삼례의 중심지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인근 전주로 인구가 유출되었고, 삼례역 역시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옮겨가면서 과거 양곡창고였던 공간들도 그 기능을 점차 잃었다. 창고는 해방 후 적산(敵産, 적의 재산) 건축물로 분류되어 국가에 귀속된 후, 농협으로 넘어가 2010년까지 양곡창고의 기능을 유지했다. 완주군은 농협의 소유였던 창고를 매입한 후 이 공간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함과 동시에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새로운 숨결을 불어 넣었다. 2013년 양곡창고와 관사였던 공간은 삼례문화예술촌(삼삼예예미미)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만1825㎡ 부지에 1920년대에 지어진 창고 5개 동과 1970~80년대에 건축한 창고건물 등 모두 7개 동이 책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보듬어졌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역사의 맥락을 잇고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삼례문화예술촌의 창고건물은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등록문화재 제580호로 지정되었다. 시간을 이어 역사를 기억하는 현장이자 모두가 향유 하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제, 삼례문화예술촌은 문화의 보물창고로 변신에 성공하여 완주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필수 관광지가 되었다. 문화를 기반으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이끌며 주민들 스스로 예술과 문화를 생산해 나갈 수 있는 장을 만든 것이다. 주민들이 합심하여 완주를 로컬푸드의 중심지로 만든 것처럼, 완주는 완주만의 문화생태계를 형성하여 특별한 문화도시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힘이 3.1운동에 영향을 주고 그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지듯이, 역사의 흔적과 주민들의 삶이 깃든 삼례의 양곡창고가 문화 발전의 디딤돌이 되어 완주의 곳곳이 행복한 문화공동체 도시로 꽃피워가길 기대한다.
눈이 내렸다. 나뭇가지에 눈꽃이 피어난 것을 보니, 상고대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으로 마음이 달려간다. 이즈음 보이는 상고대는 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해 준다. 상고대는 겨울철 안개가 짙게 낀 산이나 물가에 주로 발생하는데 안개(霧)가 얼음(氷)이 되었다고 해서 무빙(霧氷)이라 하고, 나무(樹)에 생긴 서리(霜)라 하여 수상(樹霜)이라고도 불리는 나무서리이자 서리꽃이다. 활짝 핀 서리꽃은 새벽의 여명 속에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고 햇볕을 쬐면 스르르 사라진다. 하지만, 옥정호의 물안개와 더불어 피어나는 환상적인 모습과 지리산 바래봉에서 피어난 서리꽃을 보면 그 신비한 모습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다. 이제는 그 찰나의 시간에 맞추어 가서 마주하며 그 아름다운 서리꽃의 향연을 맘껏 즐길 여력이 없어졌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고 오랫동안 풍습으로 즐겼던 모든 정겨움들이 코로나19 로 아득해졌다. 2020년 벽두부터 들이닥친 전염병이 우리에게서 찬란한 봄을 앗아가더니 지루했던 장마로 기억되는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이전에 당연하게 누렸던 것과 그동안 일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누리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고 일상일 수 없게 되었다. 온종일 코로나19 관련 뉴스에 마음을 졸이는데 변종까지 등장하여 더 큰 두려움을 몰고 온 전염병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지금의 우리가 겪는 이 시간은 훗날 어떻게 기록이 될까. 우리에게 전염병의 기록은 백제 온조왕 때 역병이 유행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시작으로 고려 때 역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를 격리하고 의서를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기의 여러 문헌에도 당시 전염병이 들끓었던 상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벽온(壁溫)이라 불린 예방법과 치료 흔적들이 남아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복기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상황과 대처 방법이 비슷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 사람에 있어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1393년 태조가 창건한 회암사에 전염병이 있었다는 기록과 도성을 쌓기 위해 소집한 인부들 사이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것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염병에 관한 기록이 많다. 전염병이 돌은 팔도의 구체적인 상황과 죽은 사람의 숫자 등이 자세히 나와 있으며 그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 더하다고 표현하는 등 전쟁보다 전염병이 무섭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나라에서는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하여 음식과 약을 보내고 의관들을 파견했으며, 하늘의 노여움을 피하려고 여제를 지내고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만들었다. 방역에 취약한 감옥의 상황을 염려하여 문을 열어 환기와 청소를 하고, 밀폐되고 협소한 감옥에서의 확산을 막기 위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했다. 구제와 치료를 담당하는 관청에서는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모아놓은 의서인 『간이벽온방』 등을 발간하여 지침서를 만들었고 민간의 치료에 헌신해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조선 시대 최고 명의로 알려진 허준(1539-1615년)도 두창(천연두)이 유행할 때, 수많은 백성과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을 두창으로부터 완치시키고 조선 시대 최고의 명의로 유명해졌다. 선조는 왕자의 병을 고쳐준 허준에게 서얼 출신이라고 벼슬 내리는 것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에게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라는 품계를 내렸고, 훗날 그는 종1품 숭록대부의 벼슬에 올랐다. 또한, 왕명으로 천연두 예방과 치료에 관한 의학서인 『언해두창집요』를 집필하게 했으며, 허준은 잘 알려진 『동의보감』 외에 한글 번역이 덧붙여진 민간 응급용 책자인 『언해구급방』과 1613년 성홍열 등의 전염병이 유행하자 『번역신방』과 『신찬벽온방』 등 많은 의학서를 저술했다. 허준은 임진왜란 등 외부로부터 침략을 겪을 때마다 조선에 흘러들어온 전염병에 관심을 두고 연구했으며, 입과 코를 통하여 몸 안으로 전염병이 침입한다고 여겼다. 조선 최고의 예방 지침이 담긴 의서인 허준의 『신찬벽온방』에는 의원이 환자를 상대할 때 반드시 뒤로 등지도록 하여 직접적인 전염을 막는 방법과 치료법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온역을 막는 붉은 약인 벽온단을 사용했는데, 사기를 제거하는 용도로 설날 새벽에 복용하거나 태워서 사용했다. 불에 태웠던 이유는 사악한 전염병의 기운이 코를 통해 전염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벽온단의 기원은 고려 문인 이규보(1168-1241년)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벽온단으로 온역 피함도 헛말이지만 / 술 마시기 위해 짐짓 사양하지 않았노라 / 닭도 울기 전에 이불 쓰고 앉아서 / 신단을 먹기 위해 술을 마시네라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시대 궁의 세시풍속에도 임금이 새해 첫날 국가의 평안과 백성의 건강을 기원하며 벽온단을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다. 코로나19로 달라진 2020년은 참으로 고단한 한해였다. 이 시간 가장 마음 깊이 감사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의료인들과 관련 종사자들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과 소명으로 환자들 곁을 지키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헌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2021년 새해에도 스스로를 지키고 서로를 지켜주며 인내하고는 서리꽃이 사그라진 자리에 푸르게 돋아나는 봄의 향연을 온전하게 맞아야 할 것이다.
춥다. 그렇다 보니 따뜻한 장소를 찾게 된다. 이런 날 선조들은 아마도 온기 있는 아랫목이나 화롯가에서 몸을 녹였을 것이다. 그 중, 색다른 화롯가의 풍경으로 난로회(煖爐會)라는 모임이 있었다. 음력 10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겨울철 추위를 쫓기 위해 양반사대부들이 모여 소고기를 구워 먹는 풍속이었다. 당시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소는 농사에 필요한 귀한 존재인데, 소를 구워 먹는 모임이 있었으니 만경들판에서 소를 의지하며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기막힐 노릇이었겠다. 그 난로회의 모습은 그림으로 생생하게 엿 볼 수 있는데, 술상을 옆에 두고 털방석에 자리한 기녀와 방한용 의복을 잔뜩 차려입은 양반들이 호기로운 표정으로 소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이 담겨있다. 난로회는 17세기 후반 즈음 중국에서 들여와 한양 양반사대부 사이에 퍼져나갔다가 18세기에 팔도로 퍼져 유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난로회의 모임은 그림뿐 아니라 여러 문헌에서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데, 『동국세시기』에는 한양에서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소고기를 기름, 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한 소를 구워 먹는 것이 조선 시기 겨울철 풍속이었다니 새삼스럽다.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와 관련된 오래된 흔적으로 상고시대 부여는 가축을 귀하게 여겨 이를 상징하는 마가, 우가, 구가, 저가로 관직명을 지었다. 부여의 제사인 영고에서는 소나 사냥에서 잡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 음식으로 먹었는데, 이는 신과 인간이 함께 먹고 공유하는 신성한 문화를 형성했다. 삼국시대 고구려는 벽화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농경을 주관하는 신의 모습으로 소를 그렸으며, 제를 지낸 후 먹는 고구려의 대표 음식인 맥적(貊炙, 양념을 한 고기구이)은 신과 공유하는 음식이었다가 왕이나 귀족들이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연회에서 먹게 되면서 잔치 음식이 되었다. 신라는 국가에서 기관을 설치하여 가축을 관리하고 포나 젓갈 등의 육류 가공 기술이 발달했다. 백제의 왕들은 특히 사슴을 신성시하여 제사를 지낼 때 사냥으로 잡은 사슴을 제물로 사용하였다. 그래서인지 부안의 조선 시기 특산품으로 알려진 희귀한 사슴 꼬리인 녹미 등 사슴고기의 명성은 오래전 역사 속에서 나온 것일 수 있겠다. 고려는 불교와 농사를 중시하여 육식이 절제되는 시기였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 견문록인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는 살생을 꺼리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고기는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으며 보양식이나 최고위층에게 바치는 고귀한 선물로 사용했으며, 우유는 왕이나 귀족들이 약용으로 즐겼다. 조선은 농사를 중요시해 노동력에 필요한 소를 관리했다. 1398년(태조 7)에 소 도살을 금하는 우금령(牛禁令)을 내린 이후 처벌 규정을 마련하면서 지속적으로 우금령을 반포하였다. 처벌 내용을 보면 자기의 소를 도살한 자, 남의 소를 사서 도살한 자 순으로 형량이 무거웠다. 가장 큰 죄로 남의 소를 훔쳐 도살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기도 했지만, 소 도살은 널리 자행되었다. 더러는 생전에 소고기를 먹고 싶어 하던 부모를 대접하지 못한 죄책감과 농사일을 돕던 소를 잡아먹는 것은 어질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겼지만, 고려와 달리 불교의 영향이 적은 조선은 우금령을 어긴 자들이 많았고 특히, 양반들 사이에 소고기 선호가 높았다. 그들은 소고기를 가장 귀한 별미이자 보양식 재료로 여기며 소고기를 선물하거나 대접받는 것을 중히 여겼다. 따라서 제수용, 연회용, 접대용, 보양식으로 사용하였고, 임금의 신하에게 하사용으로 소고기를 내리고, 궁에서도 난로회를 연 기록도 남아 있으며, 장수를 한 영조의 식습관은 특이하게 사슴 꼬리와 우유로 만든 찬 타락죽을 겨울철에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특히 소 염통구이인 우심적(牛心炙)을 즐겼다. 우심은 소의 심장으로 마음을 담아 대접하는 것을 상징했다. 우심적은 진나라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의가 왕희지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소의 염통을 구워 대접한 음식인지라 선비들의 지적 동경 대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기록과 선비들이 남긴 시문에서 우심적을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순창을 배경으로 한 『설공찬전』을 지은 채수는 부친상 중에도 우심적을 먹은 자라는 특이한 기록이 있으며, 정약용은 유배지인 강진까지 먼 길을 찾아온 친구 신종수에게 마음을 담은 우심적을 대접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는 소염통을 구워먹는게 부추밭을 가꾸는 것보다 낫다는 구절을 남겼다. 이제 소하면, 농사일하는 소를 보기 어렵고 우심적으로 마음을 전하며 즐기지 못하지만, 명품 한우나 유명 식당의 맛있는 소고기가 생각난다. 하지만, 연말을 앞둔 우리는 조선 양반들의 겨울철 모임 같은 난로회는 커녕 애경사도 함께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 각자의 집 인터넷 공간에서 모여 음식을 먹는 랜선 모임이 유행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건 이 상황을 잘 지내려면 면역력에 좋은 음식을 먹고 건강해야 한다. 또한, 코로나와 맞서 지치지 않는 마음의 근육도 키우며 어려운 이웃에게 힘을 건네고 온정을 나눠야 할 것이다.
명무(名舞)는 춤에 기예가 뛰어난 유명한 사람을 말한다. 명무라 불리는 전설의 춤꾼으로는 조선말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까지 하사받은 곡성 출신 이장선(1866-1939)이 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제자로 춤은 조갑녀라 극찬을 받은 남원 출신 조갑녀(1923~2015)가 있다. 조갑녀는 1923년 1월 남원에서 조기환의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기환은 일제식 명칭으로 남원권번이라 칭했던 남원국악원의 악기선생이고, 고모 조기화는 이름난 남원권번 춤선생으로 자연스레 가풍의 영향을 받은 조갑녀는 7살에 남원권번에 입적하였다. 조기환은 어려서부터 춤에 남다른 딸의 재능을 귀하게 여기며 유능한 선생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당시 격조 있는 궁중의 춤 선생으로 이름난 이장선을 남원으로 청해 동기들과 함께 춤을 배우게 하였는데, 이장선은 이 아이 몸에 춤이 들어있다고 하며 별도로 조갑녀에게 춤을 사사하였다. 조갑녀는 9살의 나이에 1회 춘향제에 참석했고 2회부터는 선배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후 4회부터 한동안 춘향제는 조갑녀의 승무로 막을 열었다. 13세에는 승사교 준공행사에서 승무를 추며 맨 처음 다리를 밟고는 다리 가운데에서 북을 치며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결혼 전까지 영숙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또한, 1938년 남원의 국악 발전에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남원권번 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장학생을 선발했는데, 조갑녀는 첫해인 16세부터 19세까지 3년 내내 장학생으로 뽑히고 재능을 인정받으며 춤, 하면 역시 조갑녀!란 극찬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으로 화려한 활동을 한 그녀였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예기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19세에 호남의 큰 부자이자 남원권번 주식회사의 주주였던 한성물산 사장 정종식과 혼인하면서 모든 활동을 접고 열두 명의 자식을 둔 평범한 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결혼 후에는 어려서부터 춤추었던 부분이 가족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조용히 지내다, 광한루원 내 완월정이 완공된 1971년 춘향제 때 지인과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축하공연 무대에서 승무를 추었고, 1976년 춘향제 때는 살풀이춤을 추었다. 이후 그녀의 춤은 전설의 춤으로만 화자되었는데, 광한루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는 주변의 염려와 권유로 춤추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기고 86세인 2007년에 살풀이춤을 추며 재기하여 2010년과 2011년 춘향제에 살풀이춤으로 감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무대에 서 있기만 해도 그 자체가 춤이라는 조갑녀의 살풀이춤은 수건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인 까닭에 민살풀이춤이라고 불린다. 원래 살풀이춤은 예기들이 추던 춤으로 맨손으로 추었다가 이후 천을 들면서 오히려 천을 들지 않는 살풀이춤을 보기 힘들어서인지 그리 이름이 붙었다. 그녀가 천을 들고 추지 않는 이유는 거추장스러워서라 한다. 그저 춤은 마음이고 몸으로 마음이 표현되는 것이니 군더더기처럼 느껴지고 성가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의 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그대로 실어 즉흥적으로 추는 춤이다. 무대에 가만 올라 악사를 응시하고는 울리는 음악을 지그시 누른다. 그리고는 치맛자락 번갈아 다스리고 한 손으로 휘어잡고 버선발을 살짝 보이고 천천히 손을 올리며 무겁게 움직인다. 모든 몸짓을 설레며 기다리게 한 오 분 정도의 춤사위는 시간을 누르고 다스리며 깊은 여운을 이어간다. 그녀의 삶이 모두 담긴 듯한 춤은 아슴하고 먹먹하고 웅숭깊다. 날아갈 듯 가벼이 움직이는 여흥의 춤이 아닌 법도 있는 무거운 춤이다. 조갑녀 명무가 마지막으로 춤을 춘 무대는 소리꾼 장사익의 공연이었다. 장사익은 말수 적은 선생님은 큰 산 같고 바위 같은 분이라 말하고 무거운 그 산과 바위에 꽃이 피어나고 지듯이 그렇게 담담하고 황홀하고 놀라운 감동을 건네는 큰 어른으로 자신은 말 같은 노래로 선생은 몸짓 같은 춤으로 예술적 교감을 나누었다고 했다. 무겁게 춘 조갑녀의 춤은 화려한 기교나 큰 움직임이 없이도 속이 꽉찬 춤으로 전설이 되었다. 평상시의 생활에서도 공연에서도 그녀는 흰색의 한복을 평생 입었다. 단아하고 깨끗함을 사랑한 그녀가 입은 한복에서도 삶의 태도가 가늠된다. 춤은 곧 마음으로 그 속에 희로애락이 있는 것이여. 그러니 춤은 무거워야 깊은 맛이 나고 가치가 있는 게지라며 조갑녀는 춤은 참 맹랑한 것이라 했다. 맹랑하단 것은 함부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춤은 내 몸으로 추는 것이지만, 절대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여 딸이자 제자인 정명희에게는 자신을 믿고 죽기 살기로 연습하고 인역춤(본인춤)으로 만들려면 뼛속까지 박히게 춰라. 마음으로 춰라. 내 춤은 곧 내 마음이다. 늘 마음을 크게 먹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춤이 좋다고 당부했다 한다. 가락을 절제하고 응집된 에너지로 힘 있게 보여준 춤은 그대로 많은 이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2015년 4월 1일 세상을 떠난 명무 조갑녀의 위패는 남원국악의 성지에 모셔졌으며, 생전 머물렀던 한옥인 금남관은 조갑녀살풀이명무관으로 이름붙여진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명무의 흔적을 새겨 놓았다. 조갑녀살풀이명무관 마당을 들어서면 어머니의 마음을 품은 장독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예술인들과 베풀어야 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던 그 마음이 깃든 곳은 너무 애쓰지 마라며 다독이듯이 찾는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특히나 어려운 시절은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명무의 살풀이를 청하며 질기고 힘든 맥을 풀어내기를 기원한다.
바다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 있다 / 돛 달아라 돛 달아라 / 아득히 넓고 맑은 파도에 실컷 즐겨나 보자 /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 인간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구나.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중 가을 편의 구절이다. 늦가을 살이 오른 물고기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는 선조들의 정취를 떠올리니 코로나로 인해 지역의 명소에서 즐기지 못했던 제철 음식들이 아쉽기만 하다. 가을철 음식으로는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가 유명하다. 그 고소한 맛에 가을 전어는 깨가 서 말이라 하지만, 흔히 왕새우라 불리는 대하(大蝦) 역시 가을철 전어 못지않게 사랑을 받는 수산물이다. 예로부터 귀한 음식으로 취급한 대하를 중국에서는 긴 수염에 등이 굽은 모습이 노인을 닮았다 하여 바다의 노인 해로(海老)라 불렀지만, 중국의 고전 의학서인 『본초강목』에서는 양기를 왕성하게 하는 식품으로 소개했다. 별칭인 바다의 노인과 달리 새우는 십 만개 이상의 알을 낳는 왕성한 번식력을 갖고 있어 기력에 좋은 음식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일까 총각은 새우를 먹지도 말고 홀로 여행할 때 여행지에서 새우를 먹지 말라고도 했지만, 새우는 많은 이들이 즐긴 음식이다. 조선의 미식가 허균(1569-1618)은 부안에서 나는 대하를 특별히 좋아했다. 그가 유배지에서 투덜거리며 쓴 편지에 새우도 부안만 못하고, 게도 벽제 것만 못합니다. 먹는 것만 탐하는 사람으로서는 굶어서 죽겠네요라고 했을 정도였다. 스스로가 먹는 것만 탐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그는 지금의 익산 함열에 귀양 와서는 이전에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대하의 알로 젓갈을 담으면 매우 맛이 좋다며 별미 리스트를 남길 정도였다. 대하 알젓은 지금도 구하기 힘든데, 당시에는 허균이 입맛을 다시며 썼던 책에서나 접하고 맛보기 어려운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또한,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1758-1816)도 유배지 흑산도에서 수산생물을 관찰하고 수산학 총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는데, 대하 맛이 매우 달콤하다고 극찬했다. 길이는 한 자 남짓 되고 빛깔은 희고 붉다. 등은 구부러지고 몸에는 껍질이 있다. 꼬리는 넓고 머리는 돌게를 닮았고 눈은 튀어나와 있으며 두 개의 붉은 수염이 있다. 수염의 길이는 그 몸의 세 배나 된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유중림(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에서 대하를 쪄 볕에 말려 겨울에 두고 먹는다고 했으며, 조선 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대하를 조기, 오징어, 청어, 게, 굴 등과 더불어 전라도 부안현의 특산품으로 소개했다.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에 우리나라 동해에는 새우가 없다. 대하는 회로 먹어도 좋고 국으로도 좋고, 그대로 말려 안주로 해도 좋다고 했으며, 서해에서 나오는 새우를 젓갈로 담가 전국에서 널리 먹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주로 서해안에서 잡히는 대하와 여러 종류의 새우는 지역에 따라 모양새나 품질도 다르고 불리는 이름도 다르다. 새우는 김장철 김치의 풍미를 내는 젓갈로도 쓰임이 큰데, 담그는 시기에 따라 오월에 담그면 오젓, 유월에 담그면 육젓, 가을엔 추젓, 겨울엔 동백하젓으로 부른다. 젓갈로 이름난 곳으로는 강경과 인천 소래포구를 들기도 하지만, 부안 곰소의 젓갈도 유명하다. 젓갈은 어패류에 소금을 첨가하여 발효시켜 감칠맛이 나게 한 음식으로 고대 중국에서도 발달한 특유의 저장식품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유래는 삼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젓갈을 일컫는 해(醢)가 신라 신문왕 3년 신문왕의 왕비를 맞이하는 폐백용 궁중음식에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들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즐기는 음식으로 대중화되었다고 『고려도경』에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계절과 지역에 따라 여러 원료를 사용하여 소금에 절이고, 술에 기름과 산초를 섞어 담그고, 누룩과 엿기름 찹쌀밥 등을 소금에 섞어서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젓갈을 담갔다고 한다. 또한, 미리 소금과 젓갈을 담글 독을 어선에 싣고 나가 새우가 잡히는 대로 배 위에서 젓갈을 담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런 까닭에 수산물이 많이 나고 염전이 있는 곳은 젓갈의 생산지로 각광 받았고, 서해안을 끼고 있는 부안군과 고창군의 경계에 자리한 곰소만은 조선 시대부터 어업과 염전이 성한 곳으로 다양한 수산물과 소금을 사용하여 양질의 젓갈을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갯벌이 발달한 곰소만의 안쪽 깊숙이 위치한 줄포는 과거에는 활발했던 어항으로 그 이름을 따서 줄포만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갯벌이 일부 매립되면서 어선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쇠락하게 되었다. 이후 북쪽 해안에 위치한 곰소가 대표 어항이 되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 들어 염전이 줄었다. 그러다 최근 갯벌이 살아나고 곰소를 중심으로 젓갈 생산에 필요한 소금이 주변 염전에서 다시 생산되고 젓갈 판매가 활발해지자 곰소젓갈식품센터가 생겼고 젓갈축제도 열리게 되었다. 게다가 넓게 펼쳐진 염전의 풍경이 특별한 정취를 자아내자 사진 찍기 좋은 명소가 되었다. 구울수록 붉어지는 대하는 가을 단풍이 물들어 가는 모습과도 닮았다. 아직은 겨울에 들지 않았으니 허균이 그리워했던 부안의 대하를 먹기에 늦지 않았다. 또한, 김장을 앞두고 있으니 김치의 맛을 돋우는 새우젓을 비롯한 다양한 젓갈을 구하러 부안을 찾아도 좋겠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서해안 어느 바닷가에서 허균이 별미 리스트에 올렸던 대하 알젓을 맛보는 행운을 만나지는 않을까.
가을이 깊다. 자연이 빚어내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다운 시기이다. 그 풍경만큼 사람의 심성이 깊어 주변에 좋은 영향을 건네며 물들이는 것을 선한 영향력이라 한다. 이러한 선(善)함을 단풍이 번지듯 주변에 아름답게 펼친 조선판 선한 영향력의 흔적이 우리 지역에 남아 있다. 바로 보물 제728호로 지정된 『설씨 부인 권선문』이다.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을 지은 이는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의 후손으로 세종 11년 순창에서 설백민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고령 신씨(高靈申氏) 신말주와 혼인한 설씨부인(1429~1508)이다. 그녀의 남편 신말주(1439-1503)는 신숙주의 동생이자 세종 때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의 막내아들로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계유정란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왕이 되고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상심하여 처가가 있는 순창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자신의 호를 딴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지내다 훗날 전주부윤과 대사간, 전라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써 명필로도 이름을 알리며 본인을 비롯한 열 명의 원로들을 묘사한 『십로계첩』을 남겼다. 설씨 부인 또한 문장과 서화에 능한데, 부부가 순창에 지낼 때 불심 깊은 설씨 부인이 강천사 부도암의 중창을 위해 시주를 권하는 그림과 글을 지은 문서로 『설씨 부인 권선문』을 남겼다. 설씨 부인이 불사 참여를 독려한 이 작품은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히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보물이 되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은 원래 문첩이 아닌 한 폭의 두루마리로 된 것을 잘 보관하기 위하여 병풍과도 같은 문첩 형식으로 개장하여 총 16폭이 되었으며, 그 크기는 가로 19.8㎝, 세로40㎝로 모두 펼쳐 놓으면 317㎝가 된다. 일부 보수한 흔적이 눈에 띄어 아쉽지만 대체적으로 보관이 잘 된 편으로 힘찬 글씨체와 더불어 수려한 그림이 조화롭다. 내용을 보면 전체 16폭 가운데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에는 채색화가 그려져 있으며, 특별하게도 뒷면에는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이라는 정확한 연대와 정부인 설(薛)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다. 조선의 여류 문인들의 작품이 대부분 시조 형식의 짧은 문장인데 비해 그녀의 권선문은 산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장문이다. 조선 시대 여성 문인이 쓴 장문의 필적으로도 의미있지만, 설씨부인의 <광덕산 부도암도>는 사임당 신씨(1504-1551)보다 70여 년 앞선 채색화로 현존하는 조선 시대 청록산수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하다. 주로 화초와 곤충을 그린 사임당 신씨의 작품과 달리 <광덕산 부도암도>는 설씨 부인이 지은 권선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으로 광덕산에 자리한 부도암의 경치를 소개한 실경산수화다. 멀리 보이는 산에는 침엽수를 묘사하며 찍은 듯이 그린 산의 형세와 수려한 소나무가 잘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표현한 것은 물론이고 그 속에 중창 후 모습을 드러낼 암자의 조감도와도 같은 그림을 섬세하게 그려 넣고 설씨 부인 본인이 권선문을 지은 까닭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 글을 보면, 어느 날 밤 꿈에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나타나 내일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너와 함께 선한 일을 짓자고 청할 것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따르되 게을리하지 말아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큰 근원이 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과연 다음 날 아침 평소에 잘 아는 약비(若非)라는 사람이 찾아와 광덕산에 부도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세워 지키고 있으나 크게 쇠락하여 새로이 절을 짓고자 시주를 구하러 찾아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지난밤 꿈을 생각하고는 손수 선을 권하는 그림과 글을 지어 시주를 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권선문의 내용에는 암자가 크지 않은 규모이다 보니 부인 본인의 시주만으로도 지을 수가 있지만, 옛 사찰을 보수하면 천하의 복을 받는다니 모든 이들이 함께 불사를 일으킴이 마땅하다. 그런 연유로 부도암의 중수에 동참하는 선을 행하면 응보의 복을 받으니 감히 이 글을 써서 모든 이들에게 선을 권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조선 초기 명문가의 정부인이 사찰의 중창 불사에 관심을 갖고 불교의 인과응보법을 설명하며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다. 『설씨 부인 권선문』은 부도암 스님의 부탁을 받은 약비의 청을 받아 지은 글이라 하여 <증약비문(贈若非文)>이라고도 한다. 이는 처음에 부도암에서 보관하였으나 암자가 다시 쇠락해지자 고령 신씨 귀래공파의 가문으로 돌려주어 보관하다 지금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위탁되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사연도 특별하다. 한학자이자 교육자인 정인보가 순창을 찾아 『설씨 부인 권선문』을 접하고 크게 감동하고 1934년 동아일보에 <권선문평해>를 연재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정인보가 『설씨 부인 권선문』을 접한 곳은 순창의 남산대 마을이었다. 이곳은 신말주와설씨부인이 지낸 곳으로 특히, 신말주가 터를 잡을 때 풍수에 귀(貴)가 보장된 장소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등 주요 관직을 역임한 실학자이자 고지도를 제작한 신경준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를 이루며 살아 귀래정 신말주후손세거지로 불리는 귀한 장소가 되어 199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설씨부인의 권선문과 인연이 있는 강천사는 887년(진성여왕 1) 도선이 창건한 사찰로 고려시기에는 열두 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천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쇠락해졌고 몇 차례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불에 훼손되었다가 이후 신축한 뒤 비구니의 도량으로 전승되고 있다.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찬사를 얻는 강천산은 단풍이 고운 곳으로 매년 11월 초순께 절정을 이루는 단풍명소로 손꼽힌다. 이제는 구름다리도 놓인 관광명소로 더욱 알려졌지만, 곳곳의 이름난 바위들과 비룡폭포로 절경을 지어내며 강천사를 비롯하여 강천사 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92), 금성산성(전라북도기념물 52),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27),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기념물 97)등의 문화재를 품고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때에 고운 단풍과 함께 설씨부인의 <광덕산 부도암도>가 그려진 강천사 부근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복을 나누고자 글과 그림으로 선함을 권한 그 선함과 자비로움을 헤아리며 이 가을 깊어가기를 소망한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물건을 가보(家寶)라 한다. 2019년 TV 프로그램인 진품명품에 특별한 사연이 담긴 가보가 의뢰품으로 소개되었다. <효부 정씨 상서 고문서>라 이름 붙은 병풍으로 조선 시기 용안현(현 익산시 용동면)에 살던 동래 정씨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것이었다. 동래 정씨는 18세 때 전주 이씨 완창대군파 경양군손인 이순면과 혼인하여 줄곧 용안현에서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가 병이 들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효부 정씨로 불렸다. 병든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신 그녀의 이야기는 전주 이씨의 사람이 혼인했는데 그 부인이 동래 정씨라는 사람이었다. 여러 번 표창이 있었으나 시기가 흐르고 사정이 변해서 왕의 표창은 받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전주 이씨 족보에도 남아있다. 족보에서도 왕이 내린 큰 상을 받지 못한 아쉬움을 엿볼 수 있듯이 당대 효부 정씨의 효행에 감동한 지역의 사람들이 여러 차례 큰 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상소문을 귀히 여긴 전주 이씨 집안에서는 이를 가보로 삼아 대대로 물려주었는데 그 후손인 이강재(1941년생)가 1970년대에 병풍으로 제작하였고 지금은 아들인 이종길(1971년생)이 간직하고 있다. 집안의 제사에 펼쳐 놓고 사용하는 병풍에는 어디선가 들었을 법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며느리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서 시어머니께 먹여 병을 낫게 했다는 사연이다. 지극한 효행의 전설이자 지금 시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무시무시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중국 명나라 출신 이시진이 저술한 『본초강목』에 인체의 각 부위에 대한 약효가 설명되어 있어, 병든 부모를 살리기 위한 효행으로 더러 있었던 일이라 한다. 말로만 전해 듣던 그 사연이 실재했다는 증거가 1854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6장의 상소문에 자세히 담겨있다. 첫 번째 상소문의 내용에는 정씨의 효행이 소개되어 있다. 용안현 비야동(지금의 비야마을)에서 살았던 효부 정씨의 시어머니가 가래가 끓고 지금의 천식과도 같은 담증을 한 달이 넘게 앓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고 심지어 대변을 맛보게 하며 하늘에 빌고 정성을 다했다. 그럼에도 시어머니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의 왼쪽 넓적다리 살을 칼로 잘라 국을 만들고 약에 타서 마시게 하자 기력을 차린 시어머니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당시 기적 같은 사연을 접한 지역의 사람들이 효부 정씨를 칭찬하면서 관아에 공동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지역의 유림들을 비롯한 많은 유력인사들이 그 내용을 익히 듣고는 공을 인정하고 효부 정씨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했다. 그럼에도 큰 상을 내리지 않자 몇 차례에 걸쳐 내용을 더하고 청원하며 상소를 올린 것이다. 마침내 이어가기 어려운 목숨을 소생시켜 조금 다시 살아나는 효험이 있었으니 어찌 지극한 효성이 하늘을 감응시켜 그러한 것이 아니겠나이까! 이는 실로 열녀전 가운데도 드물게 보이는 지극한 효도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포상을 내리는 은전을 입지 못한 까닭으로 고을의 사론이 오랫동안 억울하게 여겼습니다... 수의께서 처분해주소서! 상소문에는 자신들의 이름과 직함을 써 직접 추천함을 증명한 흔적이 빼곡히 적혀있다. 당시 직함을 착함(着銜)이라고 부르고 지금의 서명 사인을 수결(手決)이라 했는데, 이 착함과 수결이 같이 있어야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성명 또는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 자필로 써야 본인과 연결이 된다. 특히 한 일(一)자를 그은 위에 마음 심(心)과 그림 같기도 한 지금의 사인이자 서명이 나름의 부호 같은 조합으로 독특하게 적혀있어 눈길을 끈다. 상소문을 올리면 기관의 장이 결재하게 되는데, 세 번째 폭에는 순찰사가 서명한 것으로 인장이 찍혀있고, 순찰사 중에서도 높은 도순찰사의 사인으로 도읍 도(都)에 순찰사의 사(使)자를 형상화해서 멋들어지게 적은 것이 보인다. 특히, 다섯 번째 폭에는 암행어사라는 직함 끝에 마패 직인이 찍혀있고 30일이라고 날짜가 표기되었다. 이를 보아, 암행어사가 읽어보고 30일 날 처리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암행어사도 감동한 효행이지만 매우 가상하다.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더욱 논의해야 할 일이니, 공적인 의논을 좀 더 해서 소문이 무성하게 하도록 기다려라. 내가 지금 결정하기에는 섣부르다라며 아쉽게도 때를 기다리라 이르는 내용과 암행어사를 증명하는 마패를 찍었다. 마지막 폭에는 주인공 부부에 관한 내용이 있어 한 가문의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효행을 다한 사실이 거듭 담겨있다. 방송을 통해 조명된 사연은 가문의 자랑이 된 효행을 널리 알렸고, 고문서를 병풍으로 꾸며 제사 때 선조를 추모하고 활용하는 사례로 선보였다. 또한, 효부 정씨의 흔적이 어린 지금의 용동면 비야마을은 인근 고창마을에 전해지는 단지에 피를 내어 아버지를 소생시킨 효자 이보할지의 사연과 함께 효의 터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 정신을 이으며 익산시는 효 문화도시를 조성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일반적인 날들은 물론이고 명절마저도 서로 손을 맞잡으며 가족의 정을 나누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가을이 깊어가고 찬바람이 부는 시기 가문의 자랑에서 빛나는 지역의 자산이 된 효행의 흔적이 더욱 크고 숭고하게 다가온다.
고향이란 말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요. 저 옥정호 안에 내 고향이 있어요. 어릴 적 추억이 생생한 모든 게 수장되면서 고향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지요. 그 심정을 말도 다 못혀요. 여기 호수를 내려다보는 양요정도 14대조 할아버지가 지은 건데, 우리처럼 섬진댐을 만들면서 산날 동쪽 끝트리 물속 자리에서 수몰되기 전에 옮겨온 거요. 임실군 운암면 간좌터라 불렸던 고향을 떠나 인근마을에 정착한 최종춘(1938년생)은 선조가 지은 정자인 양요정을 어루만지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양요정(兩樂亭)은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사람은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에서 요의 2자를 따온 것으로 정자를 지은 양요당 최응숙의 호이기도 하다. 최응숙은 성균관 진사로 임진왜란 의주파천 당시 선조를 호위한 공신이었으나, 당파싸움을 피해 낙향하여 운암에 살면서 물좋고 산좋은 위치에 양요정을 지었다. 이후 고향을 떠난 수몰민과 같은 신세가 된 양요정은 옥정호를 내려다보는 곳으로 1965년 옮겨져 자리하게 되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7호가 되었다. 옥빛 우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옥정호(玉井湖)는 인근 지명인 옥정리에서 유래했다. 일설에는 조선 중기에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머지않아 이곳이 맑은 호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고도 하며 섬진강댐 준공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운암호로 불린 이름을 옥정호라 칭하라는 지시에 따라 개칭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옥정호는 임실군 운암면과 강진면, 신평면과 정읍시 산내면 4개 면의 마을을 품고 있다. 면소재지가 있던 잿마을을 비롯하여 간좌터, 구석물, 어리골, 용소, 도마터 등의 일부는 정겨운 이름만을 남긴 채 꿈속에서나 찾아갈 수 있는 마을이 되었다. 옥정호는 운암호, 칠보댐, 갈담저수지, 섬진저수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곳으로 지금의 섬진강댐이 품은 인공호수이다. 인공호수가 된 기원은 일제강점기 인근의 곡창지대에 농업용수를 위해 축조된 운암제(雲巖堤)이다. 곡창지대가 있어 대표 수탈지역이었던 동진강 유역은 강바닥이 얕고 상류와 하류의 지형적 높이 차이가 커 물을 충분히 가둬둘 수 없었기 때문에 늘 수자원이 부족했다. 1924년 심한 가뭄이 들자 섬진강의 물을 동진강 쪽으로 돌려 농업용수로 공급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승인하에 동진수리조합을 설립하고 1925년 운암제 축조에 나섰다. 이후 1927년 완공하여 이듬해부터 저수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이 수몰되어 타향을 떠도는 수몰민이자 실향민이 생겼다. 당시의 수몰로 600여 호가 피해를 입고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합당한 보상을 요구했지만, 무시한 채 공사를 강행했다. 피해주민들이 결성한 상조회와 동진수리조합 간의 충돌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국 준공이 되었고, 당시 식량 증대만을 부각하며 홍보한 기록과 문제를 제기한 기사들만 남아있다. 그렇게 건설된 운암제 물은 일대의 농업용수로 이용되었고 남는 수자원을 이용하고자 1931년 정읍 산외면 종산리에 주관사가 바뀌어 운암수력발전소를 준공했다.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으로 부족해진 식량과 군수물자의 증산을 위해 남한 최초의 유역변경식 다목적댐을 만든 것이다. 섬진강의 물을 수력발전에 이용하기 위하여 이후 확장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인 1944년과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재차 중단되었다가,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에 의하여 운암제 아래 섬진강댐을 1961년 착공하여 1965년 12월에 완공된다.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구경 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로써 전력자원이 빈약한 호남지방의 주요 동력원이 되고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게 되어 치수와 이수를 어우르는 다목적댐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수몰지구가 확장되면서 운암면 용운리 외안날과 운정리 수암마을들은 배가 아니면 다닐 수 없는 뭍섬 마을이 되었으며 이주민의 수는 2786세대 1만9851명로 늘어났다. 수몰민 이주는 자유이주와 현지잔류, 3개 지구의 집단이주로 1962년부터 4년에 걸쳐 실시되었다. 3개 지구의 집단이주는 부안의 계화도 간척지와 동진 폐유지, 안성의 반월 폐염전에 이주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단이주 예정지의 개답공사가 댐 준공 후 10년이 훌쩍 넘은 뒤에야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수몰민의 상당수가 이주 예정지에 정착하지 못하고 타향을 떠돌다 귀향하여 댐 인근 지역에 재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경제발전이 우선이었던 정부가 수몰민의 정착을 살뜰하게 살피지 못했고, 더욱이 일제강점기 때 잘못 측량된 자료를 토대로 재정착지를 마련해준 탓에 댐 인근의 터가 1968년 대홍수로 다시 물바다가 되는 시련까지 겪었다. 이들 수몰민들이 타지와 고향인근에서 정착하는 과정 중에 겪은 고생은 말할 수 없었고, 그 아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가을빛이 물들어가는 옥정호와 아름답게 어우러진 양요정 앞에는 희로애락 함께 하던 이웃들과 뿔뿔이 흩어지는데 설움은 삼켜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멈출 수 없었다라는 수몰민의 애환이 새겨진 망향비가 망향탑과 함께 세워져 있다. 그 사라진 흔적을 가슴에 새기는 망향의 슬픔이 서럽고 애잔하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달라질 명절을 맞게 되는 우리의 추석도 어떤 회한을 남기게 될지 모르겠지만, 올해 수해를 입은 곳에 따스한 손길을 전해주어 아픔과 고충을 덜어주고 위로를 건네면 좋겠다.
문밖을 나가지 않고 천하를 만나는 것 즉, 집에 누워서 하는 유람을 송나라 소옹은 와유(臥遊)라 했다. 조선의 이익은 몸은 누워 있지만 그림을 그려 눈앞에 펼쳐놓고 천하의 산수를 관람하는 것이라 했으며, 정선의 그림에 발로 밟아서 두루두루 다녀 본다 하더라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과 같겠는가라는 구절이 달려있듯이 이는 조선 선비들 사이 유행을 이끈 문화였다. 요즘 말하는 조선판 랜선 여행이 와유였던 것이다. 당시 우리 고장의 명승지인 지리산과 변산을 비롯한 여러 풍광을 담은 그림과 유람기를 나누며 상상을 더해 이야기꽃을 피운 선조들은 지금 우리와 닮아있다. 요즘 우리는 추억이 깃든 사진을 들춰 보기도 하고, 가고픈 곳의 모습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며 위안을 받기도 한다. 기나긴 장마와 태풍 그리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사태를 지켜보며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것에 대한 고마움이 커져만 간다. 엄청난 수해로 큰 피해를 입은 남원에서 조선 선비들의 유람 일번지였던 광한루원이 건재하다는 소식에 그나마 안도하며 야경이 빚어내는 모습을 따라 달빛야행을 시작한다. 광한루원 앞의 요천을 따라 내려가 상처투성이 섬진강 물길을 만나는 곳에서 상류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진안의 수선루를 만나게 된다. 신선이 잠자는 곳으로 이름 지어진 수선루(睡仙樓)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굴에 세워진 누각이다. 수선루가 지어진 사연도 특별하지만,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바위 동굴 틈 사이 딱 들어맞게 끼워 넣듯이 기막히게 세워진 모습은 가히 독보적이다. 천연 바위굴에 누각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의 암석이 진안의 마이산과 같은 역암이기 때문인데, 역암은 모래와 진흙과 자갈 등이 섞여서 굳어진 암석으로 표면에 벌집같은 구멍이 많아 짓기가 수월했을 것이라 알려졌다. 그런 물성을 지닌 암반이라지만, 바위굴 공간의 크기에 맞추어 조화롭고 아름답게 지은 솜씨가 놀랍다. 신선이 잠자는 곳이란 명칭에 걸맞도록 온돌을 놓아 아늑하게 방을 들이고, 아궁이는 뒤로 빼놓았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연과 어우러지게 지어진 수선루는 암벽 틈새로 빛을 끌어들였으며 상부로 휘어진 창방(기둥머리를 연결하는 부재)을 사용하고 바위 틈새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출입구를 조성하였다. 또한, 암벽을 따라 샘물길을 내고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조망 공간을 배치한 안목이 빼어나다. 수선루 지붕의 전면은 겹처마로 전통 기와를 쓰고 후면은 홑처마에 돌너와를 사용하여 지역 건축의 특성을 지닌 채 바위굴 안에 암반과 맞닿은 지붕의 모습을 기막히게 보여주고 있다. 방의 천장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는데 대들보 위 벽면에는 신선을 연상시키는 흰 수염의 사형제들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 내부 벽면에는 사계를 표현한 산수화 등 민화가 그려져 있으며 2층 중앙에는 수선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수선루는 자리한 그 모습도 아름답지만, 만들어진 사연도 귀하다. 조선 1686년(숙종 12년) 연안 송씨의 진유와 명유 철유 서유 사형제가 효심을 담아 지은 것이다. 송경을 시조로 한 연안 송씨 일가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에 세거한 가문으로 인근 마을에서 내다보이는 섬진강 건너 바위틈에 부친과 부친 친구들이 신선놀음 하듯 즐기며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신선처럼 지내며 늙지 않기를 기원하여 지은 누각이기 때문이다. 효행으로 지어진 누각은 훗날 목사(牧使) 최계옹이 우애가 두터운 송씨 사형제가 80세가 되어서도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옛날 중국에서 전란을 피하여 상산(商山)에서 은거한 4신선인 동원공, 하황공, 용리선생, 기리수의 기상과도 같다고 하여 수선루라 이름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쇠락해진 수선루를 1884년(고종 21년)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을사늑약 때 항의하며 자결한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년)이 1888년(고종 25년) 재중수하였다. 당시 송병선은 송씨 수선루는 진안현 서쪽 산수가 교회하는 곳으로 맑기가 그지없고 볕이 잘 들어 양지바른 곳에 사람들이 올라 먼 곳을 조망하다 보면 기분이 상쾌하여 신선이 되어 오른 듯한 느낌을 얻는 곳이다.라 쓴 「수선루 중수기」를 남겼다. 수선루 안쪽의 바위에는 송씨 수선루와 송씨 4형제의 이름을 새긴 글자 등이 새겨져 있다. 그 또렷한 흔적에 더해진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독보적인 건축미와 지역의 특색을 실린 선비문화와 가족 공동체가 지닌 가치를 인정받아 수선루는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작년 12월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물 제2055호로 격상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예전과 달리 인적이 드물어진 수선루의 신선계는 더욱 높아진 것만 같다. 이제는 와유를 즐겼던 선조들처럼 서로의 오래전 여행 사진을 나누며 위로 삼고 견뎌야 할까. 지금의 세상을 초연결사회라 불렀었는데, 이제는 집 문밖을 나서기조차 꺼려지고 여행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주변에 있어 옆집에 마실 가듯이 다녔던 장소들이 애틋하다. 평안한 어느 날, 광한루원을 찾아 달빛야행도 하고 수선루에 올라 수선루를 노래한 소응천의 시구 따라 가을바람에 문득 늙은 매미 소리를 듣고는 휘돌아 나는 섬진강의 물길에 근심을 흘려보내고 신선처럼 낮잠을 달게 자고 싶다. 그날이 언제일지 아득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린다.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제나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 한 구절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제목이 될 뻔한 그 시는 당시 박신양 주연의 <편지>가 개봉을 앞둔 탓에 그 여운만을 담고 <8월의 크리스마스>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 때문인지 8월이면 문득 그 영화의 배경이 된 군산이 떠오른다. 군산에서 대부분 촬영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전주 출신 영화감독 허진호(1963년생)의 데뷔작으로 1998년 개봉하여 흥행한 영화이다. 허진호 감독은 영화 구상단계에서 『즐거운 편지』의 구절과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사를 모티브로 했다가 장례식장에 있던 활짝 웃는 가수 김광석의 영정 사진을 보고는 영감을 받아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사진사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화는 여름에서 겨울까지의 이야기로, 주차단속원인 다림(심은하)이가 정원(한석규)이 운영하는 초원사진관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고 투덜대면서 첫 만남이 시작된다. 여름의 상큼한 이미지를 풍기는 다림은 생기발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세상과 이별을 준비하는 시기에 찾아든 사랑을 부여잡지도 못하는 정원은 안타깝다. 마지막 사랑을 하며 더 살게 해 달라고 절규하지 않는 정원은 그대로 그 사랑을 스미듯 그저 사소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다림의 표정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긴 시간이 필요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정원이 더욱 가슴 아프다. 영화는 마치 오랜만에 꺼내든 옛날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그 영화 속 초원사진관이 있는 신창동 인근은 이제 군산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초원사진관은 사실 원래부터 사진관도 처음 촬영지로 염두 한 곳도 아니었다. 제작진이 주요 촬영지가 될 사진관을 찾아 전국의 사진관을 다니며 물색하다가 지금은 사라진 월명사진관을 마음에 두고 군산을 촬영지로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월명사진관은 주변이 막혀있어 막상 촬영하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적당한 장소로 차고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차고지가 지금의 초원사진관이 된 것이다. 부지를 대여하기 위해 주인을 만나 어렵게 설득해 촬영 후 세트장을 없애고 차고로 다시 복원하는 조건으로 세트장인 사진관을 만들었다. 허진호 감독은 당시를 회상하며 세트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애로사항이 많았지만, 영화를 찍을 때 주민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길을 다 막고 촬영을 해도 지역에서 뭐라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어요. 특히 마지막 씬이 눈이 내린 것으로 해야 해서 소금을 뿌려야 했는데, 그 소금이 처치가 곤란하거든요. 그런데 주민들이 소금을 가져다 김장할 때 쓰기로 하여 뒤처리의 수고를 덜어주었지요. 지금도 그 인심과 촬영하며 먹었던 맛있는 음식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렇게 감독의 기억에도 좋았던 장소는 영화 촬영 후 약속대로 차고로 복원되었다가, 구불길의 한 코스인 탁류길의 이야기 자원으로 발굴되어 2012년 군산시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초원사진관으로 재복원한 것이다. 영화 속의 모습 그대로 재현된 초원사진관 앞에는 다림이가 타던 주차단속 차량과 정원의 스쿠터가 세워져 있다. 이제는 군산의 관광명소가 된 초원사진관은 영화 속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추억을 더 하는 장소가 되었다. 다시 재현된 초원사진관과 인근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의 카페를 가본 허진호 감독은 소장한 자료와 영화 소품을 기증하여 초원사진관에 전시해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추억을 선사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가 애물단지로 전락한 곳이 많은데, 특별한 제목과도 같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남은 영화는 빛나는 군산의 자산이 되었다. 군산은 8월의 크리스마스 외에도 영화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개항 이후 외래문화가 어느 지역보다 풍성하게 유입된 곳으로 전북 최초의 극장인 군산좌를 비롯하여 명치좌, 희소관 등이 생겨 성황을 이룬 곳도 군산이었다. 당시 명성과 그 흔적은 관련된 신문의 기사와 광고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1914년 철도 호남선을 준공하고 기념으로 발행한 『호남선 선로 안내』에도 등장한다. 극장이 있는 도시 군산은 영화제작의 도시로도 이어져 1948년 이만흥 감독의 <끊어진 항로>를 시작으로 장군의 아들, 투캅스 3, 박하사탕, 최종병기 활, 변호인, 신세계, 화려한 휴가, 말죽거리 잔혹사 등 수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고 이제는 영화의 흔적을 품은 이야기 길로 남았다. 지루한 장마 속에도 8월이 되니 우산을 쓰고 초원사진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초원사진관 앞에서 영화 주인공인 심은하와 한석규처럼 아련한 느낌을 담은 인증 사진을 SNS로 확장하며 추억의 장을 넓히고 있다. 비록 우리가 기억하는 팔월의 태양아래서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의 모습은 못보겠지만, 2020년 지루하게 내리는 비도 그칠 것이고, 숨이 턱턱 막히는 팔월의 바람에 비릿했던 이 비바람도 사소한 그리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내 기억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던 영화 속 그들처럼 말이다.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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