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오월이다. 이해인 수녀는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색 서정시를 쓰는 달’을 오월이라 했다. 이 초록이 한창인 늦은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흰 눈이 나무에 쌓인 듯이 꽃피는 나무가 있다.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니고 그 모습에 잘 어울리는 ‘하얀 눈꽃’이라는 의미도 품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라는 학명의 이팝나무이다.
이팝나무의 꽃은 좁쌀에서 이름이 유래된 조팝나무의 흰 꽃송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조팝나무는 조밥을 붙인 것처럼 꽃이 피는 장미과의 나무이고, 이팝나무는 바람개비처럼 네 갈래로 갈라진 꽃잎의 물푸레나무과 나무로 크기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이팝나무는 언뜻 꽃송이가 팝콘이 펑펑 튀겨진 모습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사발에 흰 쌀밥이 소복하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여 ‘쌀밥나무’로 불린다. 그래서인지 이팝나무는 풍년을 점치는 나무였다. 문화재청에서 1967년 천연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받은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도 흰 꽃이 풍성하게 많이 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믿게 하는 나무이다.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는 특히 수형이 아름다워 만개한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나무로 유명하다. 꽃이 피는 이즈음이 되면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려는 사람들이 이 나무의 꽃이 피어난 모습을 보러 온다. 더욱이 이곳의 이팝나무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내려달라 정성을 들이면 비를 내려주는 신목(神木)으로도 알려졌다. 그렇다 보니 300여 년의 오랜 세월 마을 어귀에서 풍년을 비는 간절한 바람과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한 마을 사람들의 풍상을 오롯이 품고 있는 나무이다.
오래전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린 이팝나무를 선조들은 여섯 가지의 도를 깨우친 나무라 하여 ‘육도목(六道木)’으로 혹은 ‘유소수(流蘇樹)’라고도 불렀는데, 유소는 깃발이나 장신구 등에 매듭짓고 꼬아서 다는 매듭 장식 술로 이팝나무의 흰 꽃잎이 모여 길게 늘어진 것이 하얀 실로 만든 술이 늘어진 것처럼 보여 불린 이름이다. 또한, 이팝나무는 식용으로 나물로 무쳐 먹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잎을 차(茶)로 사용해 ‘다엽수’라고도 하고 한방에서는 ‘탄율수’라 하여 꽃과 열매를 중풍과 기억력 감퇴 그리고 토담증 등 다양한 약재로 쓴다.
지금의 이팝나무로 이름 붙여진 것에는 여름에 들어서는 입하에 피는 꽃이라 ‘입하목(入夏木)’이라 불렸는데 ‘입하’가 연음이 되어 ‘이파’라 불리다 ‘이팝’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이(李)씨 왕조 조선 시대에서는 벼슬을 해야 임금이 내리는 ‘이씨의 밥’인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쌀밥을 ‘이밥’이라 하여 ‘이밥나무’가 ‘이팝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진안에서는 이팝나무를 이암나무 혹은 뻣나무로도 부르는데, 쌀밥나무와 관련하여 ‘아기사리 이팝나무’라 불리는 나무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시체를 묻은 일명 애기무덤을 아기사리라 하는데 마이산을 지척에 둔 진안 마령초등학교에 자리한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 군락’에 담긴 슬픈 이름이다.
흉년이 들어 어른도 굶어 죽는 시기에,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 어미의 빈 젖을 물고 죽은 갓난아이와 먹을 게 없어 배고파 죽거나 병들어 죽은 어린아이를 묻어 준 부모는 아이의 넋을 위로하면서 무덤 곁에 “아가...죽어서라도 실컷 쌀밥을 배불리 먹거라...”하며 쌀밥을 닮은 꽃이 피는 이팝나무를 심어주었다고 한다.
흉년과 전염병이 들면 하나둘 늘어나는 어린아이의 무덤과 함께 부모의 애달픈 마음을 담은 이팝나무가 점차 군락을 이루게 되어 흰 꽃송이가 수북한 밥꽃으로 눈이 시리게 피어난 것이다. 그곳은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보호를 받다가 1922년 지금의 마령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학교 담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치 아기사리의 슬픔을 딛고 아이들이 못다 이룬 꿈들을 꽃 피우듯이 교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자리하여 아이들을 묵묵하게 지켜주고 있다.
‘진안 평지리 이팝나무’는 1968년 ‘천연기념물 제214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군락이다. 당시 약 280살 정도 추정된 나무를 포함하여 수나무 3주 암나무 10주 총 13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973년부터 나무가 고사하기 시작하여 1996년 7주만 남았다가 2017년 4주에서 2018년 3주, 지금은 2주만 꽃을 피워내고 1주는 안타깝게도 고사가 진행 중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끝을 다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오래전 축대 작업 시 점질토인 논흙이 복토로 사용되면서 이팝나무의 수세가 쇠약해져 이후 생육환경을 개선하는 등 문화재 돌봄 사업의 노력을 지속하며 남은 나무들을 돌보고 있지만, 아이들의 무덤을 오랫동안 지켰던 나무 역시 시간의 흐름에서 비켜 가지 못하니 안타깝다. 작년 2020년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마령초등학교 총동창회가 기증한 후계목으로 인정되는 두 그루의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와 함께 군락을 이루며 그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또한, 전북 산림환경연구소에서는 진안과 고창 두 곳 천연기념물 이팝나무의 후계목을 완주 대아수목원에 육성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아름답게 꽃을 피워내는 고창 중산리 이팝나무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후계목 그리고 해 맑은 모습으로 학교 안의 아가사리 이팝나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지킴이를 자청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가정의 달인 오월 초록색 서정시를 쓰며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라는 이해인 수녀의 오월의 시가 눈꽃처럼 피어난 이팝나무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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