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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대중가요는 시대의 거울

안도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거울이다. 일제강점기 대중가요는 민족의 애환을 담았으며, 식민지와 근대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위로의 역할과 욕망을 분출했다. 1950년대는 어지러운 시대현실을 잊으려 했기에 대중들은 미지의 세계와 대중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대중가요가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은 상식이 됐다. 노래들을 통해 시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과거에는 학문의 대상으로 거론조차 꺼렸던 대중음악이 이제는 학문의 대상이 되어 연구 성과도 꽤 쌓였다. 그만큼 대중가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듯 아픔에 겨워를 부르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우리는 갑자기 한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를 부르며 흥겨움을 알았고 음악의 즐거움을 알았다. 비틀즈가 서양 팝 역사의 분기점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전 세계 음악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우리 한국에도 신중현과 같은 싱어송 라이터가 있었다. 신중현은 기타 한 대 들고 음악무대를 누볐다. 6.25로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 살며 불행한 청춘을 보내야 했던 한국 젊은이들이 서양의 대중문화를 좀 더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다. 너무도 직설적인, 민망할 정도로 주관적이고 원초적인 단순한 가사와 그 가사만큼이나 쉽고 단순한 멜로디였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연주와 악곡에 실려 한 귀에 들려왔다. 복잡하지 않아 속임의 여지란 전혀 없이 담백하고 간결했다. 그렇기에 더욱 폭발적인 존재감을 통해서 한국 락(rock)음악 사상 최초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며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군사정권은 대마초 가수라는 죄목을 씌어 무더기로 구속시켰다. 그래서 그 사단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통기타, 청바지 문화로 상징되는 청년문화가 발아기에 정치적 탄압으로 신중현 음악은 발이 묶이고 손이 잘려서 한국대중음악의 발전은 후퇴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가 20C 말 10대들의 우상 서태지와 아이들이 돌연히 나타난다. 지금까지 사회가 젊은이를 대하는 방식은 엄격한 규율과 체벌, 무조건적 강요 등 물리적 폭력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사회는 이를 당연시 하고 용인이 되었다. 한국사회도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함과 동시에 비정규직, 저임금과 노동력 착취가 만연 되었다. 또 대학을 가려면 내신 등급이 옭아맸다. <난 알아요 이밤이/흐르고 흐르면/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이제는 나도 알 수가/알 수가 있어요> 이런 시기의 아이들이 서태지 노래를 들으면 마냥 흥겹고 신이 났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싹 씻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리는 단순히 서태지 노래가 흥겹고 신나서라는 도식적인 수준을 넘어 기성세대들에게 거부감을 주었기에 청소년들이 열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태지는 당시 국내에선 몹시 생소하던 힙합이란 장르를 자신의 코드에 맞게 변형시킴과 동시에 랩을 접목시키는 파격행위를 공연무대에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내가왔어 슈퍼스타! 난 뜰 거야. 모두들 날 부러워 할 거야! 난 뜰 거야. 슈퍼스타 ...> <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꺼야. 애 쓰지 말어 져도 괜찮아> 앞의 노래는 요즘 홍대거리 인디밴드에서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 가사다. 그리고 뒤의 노래는 요즘 잘나가는 빙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다. 10대들이 느끼는 삶, 사랑, 사회의 강요와 부조리들을 꽤 치열하게 살아온 그들의 시각과 에너지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의 문화는 관(官)이 주도할 수 없다. 건전가요를 위해 건강한 대중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안도 시인은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수석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전라북도국어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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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19 16:36

[금요수필] 몽골 나담축제

백봉기 10일간의 일정으로 몽골여행을 떠났다. 고비사막과 주변을 둘러보는 일정은 오지체험이라고 할 정도로 힘든 여행이었다. 승합차로 5~6시간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도정(道程)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영토 세상에 이런 땅이 있다니! 말문이 닫치지 않을 정도로 감탄사가 나왔다. 가끔씩 만날 수 있는 것은 양과 염소와 낙타, 소떼들뿐, 나무 한 그루 없는 척박한 땅에서 오직 가축만 바라보고 사는 유목민들의 삶이 기이했다. 여행 6일째, 뜻밖에 여행 일정에도 없는 나담축제를 보게 되었다. 이 축제는 몽골독립기념일인 7월 11일을 전후해서 2~3일간 열리는 행사로,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국가적인 축제가 성대하게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중앙정부와 마찬가지로 활쏘기, 말달리기, 씨름경기 등으로 온 국민이 즐기는 행사였다. 우리가 참관하게 된 나담은 고비사막 최대의 도시 달란자드가드라는 지방에서 열린 축제였다.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1만 5천여 명의 인구가운데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은 모인 듯했다.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마스게임과 성인들의 민속공연, 특유의 복장을 한 무당들 그리고 말과 낙타를 탄 유목민들의 행렬까지 이어져 볼거리가 많았다. 운동장 스탠드에는 전통옷을 입은 주민들이 가족단위로 나와 객석을 가득 메웠다. 운동장 밖에서도 먹거리와 특산품 판매, 민속놀이 등 장터가 열려 눈길을 끌었다. 우리일행은 어느 광산기업에서 운영하는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에 초청되어 몽골 전통음식으로 후한 대접을 받고 다른 일정 때문에 아쉬움을 남긴 채 축제장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 축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실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런데 다남 축제는 지역민이 주인이 되어 직접 참여하는 행사로 할머니도 화장을 하고, 할아버지도 부축을 받으며 주민 모두가 장롱 속에 깊이 간직했던 옷을 챙겨 입고 나와서 같이 즐기며 서로 화합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거기에다 어린이들도 말달리기에 참여하고, 여인들이 활쏘기에 출전하고, 남자라면 꼭 한번 도전하고 싶은 씨름경기 등의 전통을 이어가는 축제였다. 그래서 외국인들도 이 기간에 맞춰 민속여행을 즐기는 축제였다. 우리나라도 축제의 계절이 왔다. 전북만 하더라도 50여개의 축제가 있는데 대표적인 전주세계소리축제를 비롯하여 완주와일드푸드, 김제지평선, 고창모양성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열린다. 특히 본격적인 지방자치단체가 시작되면서 지역축제는 우후죽순처럼 번지기 시작해 현재 1,000개가 넘는 축제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축제란 어떤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나 시기를 기념하여 의식을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결속력이 필요하고, 지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계승하고, 지역민의 단결과 자긍심,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축제는 자생적인 부분보다 정치적이고 지역 이기적인 측면에서 기획되고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지역 특산물의 판로를 찾기 위한 행사로 오히려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가 있어서 비슷한 축제는 통합시켜야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축제는 명분보다 질이 중요한 문제다. 어디를 가도 똑같고 매년 변함이 없는 식상한 축제는 과감히 도태시켜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개발로 차별화된 축제를 하자는 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올해는 몽골 나담축제 같은 축제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 백봉기 수필가는 2010년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를 발간했다. 현재는 온글문학회장과 전북예총 사무처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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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5 17:18

[금요수필] 낙서(落書)는 최고의 예술

윤춘흥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삼척동자도 잘 안다. 유년시절의 버릇이 노년까지 간다는 말이다. 유년시절은 어린이가 성장 발달하는 과정의 하나로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쯤의 시기다. 이러한 유년기의 보고 들은 것을 시작으로 아동, 청소년기에 삶의 습관과 인격의 초석을 놓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버릇이든 나쁜 버릇이든 유년시절 부터 자기 나름의 특유한 행동을 하기 마련인데 성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시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기능을 습득하거나 관심을 갖고 노력한 결과 화려한 인생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 그 예화로 미국 링컨 대통령은 어린 시절 위인들의 필체를 그대로 옮겨 쓰는 연습을 한 덕분에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훌륭한 필체였다고 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버릇 중 하나가 종이에 마구 글씨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했는지 몰랐으나 차차 쓰던 글씨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재밋거리가 되었다. 글자를 예쁘게 쓰고 나만의 글씨를 잘 써보려고 애타기도 하고 글자의 자형을 여러모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다양화를 위해 한밤중까지 열성을 부렸던 날이 수다히 많았던 추억이 있다. 내가 좋아했던 낙서란 연필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고 바른 글씨 모양을 만들기 위해 종이나 노트에 닥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글씨를 썼던 일을 말한다. 연필 잡는 집필법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쓰는 방법도 차별성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연필의 위치가 약 45도 각도에서 남동쪽으로 기울어져 쓰는 것이 일반적 상식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나만의 방법을 궁리해서 색다른 모색을 해보았다. 연필을 세우는 각도와 위치가 방향에 따라 글씨체가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 나름대로 고심해 보았던 과정이다. 이런 과정 때문에 글씨는 용필과 운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유년시절 낙서를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계속 여러 글씨 자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어릴 적 낙서 습관에서 온 선물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낙서 방법과 집필법을 소개했을 따름이지 표준화된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싶다. 그러다 나는 어느 날 문득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전을 통해서 전통적 서예, 동, 서양의 서예와 회화, 글자와 그림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낙서는 최고의 예술이다는 격언이 가슴에 와 닿게 되었다. 이 한마디 격언은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낙서에 더욱 열중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지금은 연필대신 만연필로 서예의 골서 방법을 연구하며 성경 필사(筆寫)에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만년필 서예도 연필과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기까지 서예를 하게 된 것도 유년시절의 낙서 습관에서 동기유발이 되었고 삶의 목표의식과 자신감도 갖게 하였다. 그동안 서예를 한지도 수십 년이 되어 습관처럼 붓과 만년필을 잡고 있지만 아직도 심층 연습해야 할 것은 이들의 용도 활용과 집필법이다. 하지만 더욱 난해하고 무한한 연구가 요구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어릴 적 습관이 서예에 관심과 흥미를 갖게 하고 삶의 평생 동반자가 된 것에 감사하며 유년시절 즐겨 쓴 글귀, 낙서는 최고의 예술이다. 밤잠 설치던 그때를 불현듯 회상하는 것도 은혜라는 말을 되새기며 여생을 즐기려한다. * 윤춘흥은 오랜 교직생활 후 퇴직했지만 꾸준한 서예 작품을 통해 전라북도 미술대전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라북도 미술대전 서예분과 초대작가회 회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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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9 17:23

[금요수필] 만경강 풍경화

최정호 어쩌다 강둑을 거닐 때나 버스를 타고 지나칠 때 만경강을 쳐다본다. 나 어릴 때만 하더라도 요즈음 같은 복더위 때는 물 반, 사람 반일 정도로 만경강은 더위를 씻어주는 요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놀이를 하는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다. 강물이 깊어 위험한 것도 아닌데 아예 사람조차 접근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강으로서 매력을 잃은 것이다. 무성한 잡초와 한 길이 넘는 갈대밭과 억새풀이 올망졸망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감싸고 있어서 강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럽고 늪이라 부르기엔 어색하다. 어쩌다 불법 낚시꾼이 여러 개의 낚싯대를 늘어뜨리고 강태공이나 된 것처럼 세월을 낚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물오리 몇 마리가 물웅덩이 주인이 되었고 가끔씩 해오라기가 큰 날개를 펴고 순찰을 돌아주는 게 고작이다. 그나마 곳곳에 낮은 물막이 보들을 조성하여 흐르는 물을 가두어 놓아서 강이라는 체면을 살려주는데 강바닥 높은 곳이나 둔치는 무성한 풀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래도 가끔은 야생오리나 들새들이 마음 놓고 보금자리를 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으로 지나다 보면 운 좋게 고라니나 꿩을 볼 수도 있어 눈이 번쩍 띄며 마음이 포근해진다. 다리가 없던 예전엔 강한 빗줄기가 반나절만 내려도 강물이 범람하여 강 건너 사람들은 서둘러서 얕은 여울목으로 건너야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발이 묶일까 봐 서둘러 귀가를 시켜주면 나는 집에는 가지 않고 물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강물이 불어나면 수영에 자신이 있던 나는 겁내지 않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물이 배꼽위에 오르고 두 발이 강바닥에서 뜨게 되면서 몸이 떠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조금씩 둔치 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헤엄을 쳐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렇게 여름철엔 여러 차례 홍수가 강변을 휩쓸어 갔고 일 년 내내 푸른 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어서 잡초가 강바닥에 자랄 수 없었다. 하지만 홍수가 자갈과 모래를 실어오니 드넓은 보석 같은 자갈밭, 설원 같은 모래밭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옛 모습이 사라졌을까? 생각해 보니 홍수를 예방하고 토지를 이용하려고 제방을 쌓은 탓이고 아파트와 도로를 건설하려고 모래와 자갈을 마음 놓고 쓸어갔기 때문이었다. 예전 같은 민둥산이 아니라 나무가 울창한 산과 우거진 숲의 들녘이 감질나게 내리는 비는 모두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은 수 십 년 동안 장마다운 장마, 비다운 비, 눈다운 눈이 제대로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국에 큰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도 웬일인지 우리 고장은 일기 예보와는 무관하게 해맑은 날들이다. 그러니 평소에 만수 된 대아저수지를 본 적이 없고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 웬만한 비쯤이야 메마른 산과 들이 갈증 풀기도 아쉬웠다. 초여름부터 이른 가을까지 뛰어들어 물장구치고 헤엄치던 만경강.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도 컥컥댔지만 샘물처럼 생각했고, 다슬기나 새우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만경강이지만, 희미하게 사하라가 생각난다. * 최정호 수필가는 완주 출생으로 <수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같은 해 월간 <문학세계> 시 부문에 등단했다. 시집 <노을 꽃>, <언덕에 오르면>과 수필집 <외딴 오두막>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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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22 16:55

커피 한 잔의 행복 - 김경희

▲ 김경희 수필가 한 잔의 커피를 맛있게 얻어 마셨다. 커피를 가져다준 임 화백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종이컵 안 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아침 시간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던 나는 일어서서 그 잔 커피를 두 손으로 받았다. 이어서 한 모금 가볍게 마시고 말했다. 절집에서 새우젓을 맛보고, 용궁 가서 토끼 간을 먹어보는 격이라고. 왜냐 하면 아침 일찍 나와서 하루 몸을 운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자동차 예열받게 하듯 하고, 연료 점검하듯 자기 몸을 습관대로 움직여 보는 곳이 체육관이다. 그것도 남녀가 함께. 나는 평소 낯가림이 있어 수인사를 트기 전, 먼저 다가가는 친교성이 부족하다. 그럼으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보는 사람은 낙태한 고양이 상이라고 한다 해도 따질 것이 못된다. 그런데 오늘 운동하면서 가벼운 눈길로 보니 임 화백께서 자기 보온병에 온수를 채워 문 밖 복도로 걸어 나간다. 곧바로 여자 손님이 뒤따른다. 이어 몇 분이 더 나간다. 슬며시 다가가 보니 그분들은 가끔 그곳에서 커피타임을 즐겨온 것 같았다.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는 임 화백께 모른 체 하고 혼자만 드시고 오시느냐고 농담 같은 말을 했다. 화백께서는 말없이 돌아가서 서둘러 제조해 가져다 준 것이 내가 마신 커피였다. 내가 마신 그 커피가 내 목 안 위장으로 잠입하기까지에는 컵을 준비한 분, 봉지커피를 잘라서 적당량을 따르고 물 붓고 저었을 손길과 눈길 그리고 함께 묵언으로 동의한 마음의 이웃이 있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금 보태서 그렇듯 유머로 새우젓과 토끼 간을 들먹여 웃고자 하였다. 커피는 세계 시장에서 원유 다음으로 가장 큰 교역량을 차지하고 있다. 쌀과 밀보다 더 큰 산업이 바로 커피산업이다. 커피의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인스턴트커피라고 한다. 인스턴트커피는 1초에 1만 컵 이상이 소비된다고 추산할 정도이며, 20세기 음식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발명이라고 한다. 커피 맛에 길들여져 있는 미군들은 따뜻한 물만 있으면 진하게 농축된 커피를 언제 어디서든지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인스턴트커피를 환영한다고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속이 불편해 향기와 맛과 색깔이 있어 정신을 다스리는 차(茶)를 선호한 편이다. 커피며 짜고 매운 음식은 피해왔다. 차나 술이나 기호 식품이다. 그리하여 누구와 어디서 무슨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가에 의미를 두며 겸손한 지출도 염두에 둔다. 고인이 된 이병철 씨는 그가 젊디젊은 시절부터 원두커피를 즐겨 마시고 항시 정장차림이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는 나 같은 시골 태생보다는 50-60년 전부터 모닝커피가 주는 행복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임 화백께서 가져다준 체육관 커피를 마시고 보니 와인을 한 잔 마신 듯 행복한 취기가 가슴 위로 오르는 것 같았다. 그 기분으로 운동을 마치고 자동차로 덕진연못과 대학로 길을 달리니 비 갠 뒤, 숲 속 아스팔트길은 유난히 정갈하고 개운해 보였다. 차 안 라디오에서는 나훈아의 머나 먼 고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김경희 수필가는 198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수필집으로는 <도공과 작가> <사람과 수필이야기>외 몇 권이 있으며, 국제펜클럽 전북위원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덕진복지관에서 수필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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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15 15:45

[금요수필] 가슴 철렁한 단어 ‘헬조선’

이종희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처음에는 돕다는 뜻의 help와 우리나라를 뜻하는 조선의 합성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께름칙해서 검색을 해보니 젊은이들이 한국을 자조自嘲하며 일컫는 말이었다. 즉 헬조선이란 삼포세대, N포세대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층이 지옥(Hell)과 조선(朝鮮)을 합성한 신조어로 말 그대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란 뜻이다. 삼천리금수강산 한국이 어느새 지옥 같은 한국이 되었으니 말만 들어도 청년층들의 현실에 대한 불안과 절망, 분노가 드러나 기성세대로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60년대 국가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경지정리 현장에 삽자루를 들고 나갔고, 건설현장에 나가 막일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또, 모내기를 끝낸 후 일거리가 적은 시기에는 건어물 상회에서 미역, 다시마 등을 떼어 한 짐 어깨에 메고 집집마다 팔러 다니기도 했다. 하루 고생해서 얻은 돈은 고작 몇 푼이었지만 배고픔에 허덕이는 가족을 생각하며 보람을 찾았다. 피 끓는 젊음을 일자리에서 끼니도 거르며 정열을 쏟았다. 그러면서 푼돈을 모아 목돈이 되면 셋방을 면할 수도 있었다. 삼포세대는 경제적 여건상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말이며, N포 세대도 주거, 결혼, 인간관계 등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 20~30대 청년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보수가 열악한 비정규직이나 옥탑방, 고시원 같은 빈곤층을 가리키는 민달팽이 세대라는 말도 있다. 이 모두가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불안정한 청년 세대를 총칭하는 말들이다. 얼마 전 지인의 자녀 결혼식장에 갔다. 혼주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신랑에게 부모님께 효자라는 격려와 함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랬더니 뜬금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잠시 후에 내 말을 이해했는지 허리를 굽혀 다시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기가 어렵다고 헬조선이라니, 언짢아진다. 일자리가 없다는 젊은이들이 곳곳에 펼쳐진 건설현장에 나가는 보았는가? 기껏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이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 정도였지, 땀 흘리는 일자리는 외국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 않던가. 근무하기 좋은 환경에서 보수는 많이 받고 싶지만, 그런 일자리가 아무나 받아줄 만큼 너그러운가.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며 배우지만, 경력이 붙이고 실력을 키워 대우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회가 자동화 시스템으로 전환되는 추세여서 인력 수요가 점차 줄고 있는 건 사실이다. 기업에서도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면 좋겠지만, 이윤을 저울질 할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장기적인 정책을 펴야 하는데 명쾌하지 못하니 청년들이 아우성이다. 생태계가 보존되려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듯이,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기업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 젊은이들이 학교교육을 충실히 마치면 취직 걱정 없는 사회가 되도록 정책적인 연구와 실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의 기둥인 청년들에게 상실감을 회복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이 지옥 같다는 생각을 국민으로써 할 말은 아닌 듯싶다. 작지만 세계 여러 나라 중 상위그룹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주는 산업이 한둘이던가.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첨단산업과 k-pop을 비롯한 한류산업, 그리고 스포츠에서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다. 한국이 지옥이라면 다른 나라는 천국이란 말인가? 천국과 지옥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를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천국을 얻을 수 있다. △이종희 수필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직하고 대한문학에서 수필로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필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초원을 찾은 나그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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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8 17:38

[금요수필] 나의 수필의 산고(産苦)

윤철 나는 글을 좀 쉽게 쓰는 편이다. 처음에는 대략의 얼개에 맞춰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다가 곧 생각나는 대로 그리고 느낌이 오는 대로 그냥 줄줄 써내려 간다. 단어의 선택이나 문장의 길고 짧음에도 별로 구애받지 않는다. 생각이 중간에 끊길까봐 오히려 서두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쓴 수필은 초고가 아니라 메모해 둔 내용을 주제에 따라 순번에 맞게 정리해 놓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퇴고 과정이 더 어렵고 힘이 든다. 어떤 때는 퇴고를 마친 원고와 초고를 비교해 보면 완전히 개작 수준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어 폐기해 버릴 때도 있다. 그리고 다시 작품이 마음에 들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듭한다. 퇴고를 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문제는 단어의 선택이다. 쉬우면서도 의미 전달이 분명한 단어를 찾아서 적절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일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유의어를 찾아 쓰고 문장의 어순이나 표현을 유연하게 바꾸는 일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참을성을 가지고 여러 번 읽으면서 고민하고 다듬어야 하는 만큼 시간도 많이 소비된다. 문장도 짧은 문장, 긴 문장이 적절히 배합되도록 조절한다. 문법은 물론이고 문장의 앞뒤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수님께서는 생선을 토막 내어 요리하듯 수필의 문장 역시 그렇게 토막을 내서 쓰라고 하셨다. 그렇게 쓰다보면 어떤 때는 너무 토막을 냈는지 글이 딱딱할 때도 있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어보면 목에 숨이 턱턱 걸린다. 이는 유연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생선을 적당한 크기로 절단 해 주듯 문장도 적당하게 토막을 내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상상과 함께 또 다시 문장을 붙였다 잘랐다 반복하며 다듬기를 거듭한다. 그러나 토막을 낸 문장들을 다시 적절한 접속어나 부사구, 수식어로 이어주는 일은 아직 시기상조다. 왜냐하면 아직 내게는 미치지 못할 만큼 높은 곳에 있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글은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삭제하고 간결하게 써야한다고 배웠다. 이것이 퇴고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한 번 써놓은 글은 마치 내 자식과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너무 아까워서 함부로 잘라 버릴 수가 없다. 하지만 나무도 칼을 많이 댄 나무가 더 반듯하고 굵게 자라듯이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자르고 비우는 과단성도 연마해야할 과제다. 모든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데 퇴고는 끝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퇴고를 거듭해야 작가도 독자도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다. 글이란 산고의 고통을 딛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내 놓은 내 작품을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아쉬움이 생긴다. 잘못되고 미진한 부분이 그때서야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주먹으로 가슴만 칠뿐이다. 그리고 나서 내가 보관하고 있는 원본 원고라도 고쳐 놓는다. 그리고 앞으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보다는 앞으로는 내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끝없이 퇴고를 거듭하는 수필가가 되어야겠다. 그것이 비록 산고와 같은 고통이 따르는 힘든 과정일지라도 기꺼이 감수하리라 * 윤철 수필가는 김제 출생으로 진안군 부군수를 역임하는 등 36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수필전문지 에세이스트로 등단하여 현재 수필가로서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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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8.01 18:27

[금요수필] 내면을 보는 눈과 마음이 있어야

김덕남 왜소한 체격에 걸음걸이마저 어둔한 그를 보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동호회 활동에서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그의 말을 들으려면 미간을 찌푸려가며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는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될 뻔했는데 악전고투 끝에 고비를 넘겼지만 그 후유증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가 이런 상태로 나마 여까지 오도록 일으켜 세운 것은 본인의 필사적인 노력은 물론이고 가족의 사랑과 헌신의 힘이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취미활동의 끈을 놓지 않고 성실히 참여한다. 무너진 건강 때문에 나머지 인생을 패배자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인 듯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한 신체적 취약함 때문인지 자기표현의 기회가 통 없었고 내가 그를 깊이 이해하는데 제한적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 사람은 눈에 비치는 상대의 겉모습만으로 우선 그 사람의 총체적인 역량을 추측하며 단정 지으려 한다. 용모와 언변, 문필과 판단력 등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처음 대면하는 상대를 평가하는 잣대라면 외모나 차림새는 첫 관문인 셈이다. 다음으로 목소리나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또 다른 끌림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가 설사 미흡했다 해도 부드럽고 밝은 목소리의 여성이나 윤기 있는 저음의 남성에게 마음이 한층 설레고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다. 장소와 대상에 맞는 진실한 화술은 더욱 신뢰감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훌륭한 언변은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과 인격까지도 짐작하게 하여, 설사 부족했던 외향적 평가도 상쇄하게 하는 마력을 갖는다. 어느 날 문학 사이트에서 우연히 그가 발표했던 지난날의 많은 글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의 관문에서도 나의 후한 평가를 받기 힘들었던 그가, 글을 통해 관념적이었던 내 많은 생각을 바로잡게 했다. 절제된 문장은 펄펄 살아 움직이는 기운을 보였고 필력에서 묻어나는 깊은 사유와 가치관은 보이지 않은 내면의 인품과 곧은 성품까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나이 들고 추레해 보이던 외모나 중언부언하는 듯한 명료하지 않은 답답한 말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평가절하 했던 나였다. 그런데 멀쩡해 보였던 나의 능력의 훨씬 우위에서 미시적인 안목과 편견, 오만함을 꾸짖는듯했다. 오래전의 글을 통해서라도 그의 고매한 사상을 살필 수 있었던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글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의 판단력까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더는 그의 능력을 살필 수 없는 조건에서도 그가 가진 총체적 고등 능력까지를 알게 하여 그를 대하는 마음을 새롭게 했다. 필체나 문장력은 저마다가 배워, 품고 있는 학식이며 내면의 표출이다. 그것들이 결국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격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내 주관적인 시각에 비춰지는 상대의 겉모습만으로 그의 많은 부분을 쉽게 재단하며 선입견을 품고 말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것들은 나의 원초적인 느낌이었을 뿐이다. 인간적인 언어가 쌓인 진정한 내면의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맑은 눈과 마음이 내게 필요했었다. 그러나 모두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놓는 말과 글이 언제, 어디서고 행동과 일치 해야만 한다는 것은 나의 오랜 생각이다. * 김덕남 수필가는 전주용소초등 교장으로 정년하고 에세이스트 신인 수필가상으로 등단했으며, 풍남제 주부백일장(시), 전국 물사랑 공모전(은상) 향촌문학 대상을 수상했다. 수필집 <아직은 참 좋을 때>. <추억의 사립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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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25 17:20

[금요수필] 낭패(狼狽)

이희근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한다. 살아가는 일생이 파도를 헤치는 것과 같다는 뜻일 게다. 살다보면 실제 예기치 않은 일로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며 자주 낭패를 당한다. 90년대 중반 프랑스 파리에서 여행 중 있었던 일이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선물을 사기 위해 친구들과 호텔 앞 백화점을 갔다. 몇 가지 물건을 골라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계산대 문이 닫혔다. 급한 용무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그 문이 열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우리 뒤에 줄서 있던 프랑스인들은 다 가버리고 우리 일행들만 문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알고 보니 근무시간이 끝나 퇴근한 거였다. 처음 당한 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입학원서 접수나 채용고시원서를 접수를 할 때 마감시간 안에 접수창구에 도착만 하면 처리해주는 따뜻한 문화가 있는데 칼 같은 퇴근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글로벌 시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외국 문화와의 갈등, 촌각을 다투는 전자시대에 대응하지 못하고 겪는 어려움, 나이가 들어 건망증 때문에 생기는 당혹감, 예기치 못한 돌발사건 등이 매일 반복되기 때문에 안이하게 처리하다 일어나는 실수 등 우리의 인생은 낭패의 연속이다. 누구나 이처럼 낭패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간과하지 않고 그 원인을 잘 규명하고 마무리하면 그것은 낭패 없는 자기 성장의 큰 동력이 될 수 있다. 또한 낭패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다. 그러나 같은 낭패를 두 번 당하는 일이 없도록 대비하는 것도 산 경험이다. 실제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많은 사건들도 마무리 뒤에 보면 별거 아닌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참고 견디며 살아가노라면 이러한 것들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국내 여행을 할 때마다 컴퓨터로 차표를 예매한다. 혼잡할 때 줄을 설 필요도 없고 주말이나 일요일 어느 때고 필요한 시간에 원하는 좌석에 앉을 수 있어 꼭 예매를 한다. 그런데 어느 주말 갑자기 성남에 사는 큰 딸네 집에 갈 일이 생겨 예매를 하고 버스에 올랐더니 내가 예매한 좌석에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지 않은가? 나는 차표를 확인해 봤다. 확실히 예매한 좌석번호가 맞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컴퓨터로 예매했다고 정중히 말하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더니 그들도 차표를 다시 확인하고 자기들 좌석이란다. 검표원이 와서 이중 발매되었는지도 모른다며 표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내 표가 잘못되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예약해서 틀려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고 큰 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자 표를 또 다시 살펴보더니 일자가 틀렸다고 했다. 나는 차표 시간과 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정확하다고 말했더니 검표원이 다시 살펴보더니 내 행선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지세히 보니 행선지가 출발지와 도착지를 잘못 입력하여 성남에서 전주로 오는 표를 예매한 것이었다. 운전기사가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본더니 자기들이 알아서 처리할테니 우선 빈자리에 앉으라고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당신, 이제 큰 일 났어. 맨 앞자리에 앉은 후 아내는 낮은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나는 힘없이 물었다. 너무 자신만만해 하다가 이런 꼴을 당했지 않아? 당신도 이제 다 됐어. 나는 정신을 차리라는 아내의 핀잔을 듣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뒤통수만 만지며 눈을 감았다. 차분하지 못한 내 행동 때문에 생긴 낭패니 어떤 말이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 이희근 수필가는 정읍 출신으로 계간 문학사랑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원종린수필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산에 올라가 봐야>, <사랑의 유통기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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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8 17:04

6백년 역사 용담 향교 - 이용미

이용미 수필가 용담 향교는 원래 진안군 용담면 옥거리 용담면 소재지 북쪽 용강산 남쪽 기슭의 비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려 초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초창 후 공양왕 3년인 1391년에 용담 현령 최자비(崔自卑)가 용강산 기슭에 중건하였다. 용담면은 조선시대 여산부에 속한 11개 고을 중 용담현의 읍치가 있던 곳으로 진안현과 같은 품계의 수령이 다스리는 고을이었으나 현재는 진안군에 병합된 작은 면 단위의 행정구역이 되었고, 더욱이 용담댐이 생기면서 많은 면적이 수몰되어서 이제는 그 자취마저 희미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용담향교는 전라북도의 26개 향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두 곳 중 하나로 그 존재 가치가 크기 때문에 당시의 건물을 그대로 옮겨 보존하게 된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을 빌면 조선 개국 전인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건립되었으니 예순 두 번이 변했을 세월이다. 그 세월을 머금은 용담향교는 그동안 중수를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향교란 성균관과 더불어 공자 사당에 올리는 제례와 전통시대 교육의 중심역할을 맡아 많은 인재를 키워낸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현재 중고등학교로 보면 되리라. 조선 태조의 교육정책을 이어받은 태종 때는 전국 행정단위마다 설치된 향교의 수가 360개에 이르렀지만, 일제의 집중적인 탄압과 국내외 급격한 변화로 현재는 교육 기능은 거의 잃은 채 제사 기능만 이어지고 있는데 용담향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릉지 형태 건물배치로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아래, 배향 공간인 대성전이 위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 그 사이에 동서로 현대의 기숙사 기능공간인 시습재와 양사재가 있지만, 확실한 제 역할을 하는 공간은 대성전뿐이다. 다만, 1980년대부터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청소년 대상 인성교육으로 사회교화와 교육기관으로서 본래 기능 일부를 살리고 있다. 정유재란과 갑오농민전쟁의 병화(兵火)로 많은 기록을 잃기도 하고 1990년~2001에 준공된 용담댐 건설로 장소마저 용담면 옥거리에서 동향면 능금리로 옮겼다. 이런 파란의 역사 속에 기억할만한 주인공들이 있다. 구순과 고계춘으로 향교 외삼문을 들기 전 오른쪽에 있는 비각 속내용을 보면 정유재란 때 향교가 불타자 대성전에 모셔진 오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위패를 지고 구봉산으로 피신, 바위굴에 모셨다가 평정 후 다시 모셔온 공로자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헌신한 태인 유생 손홍록과 안의, 필사적인 수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장수 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가 모시거나 지켜야 할 대상은 다르나 가치관은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이런 사람들이 있어 감동할만한 역사도 이어지고 잃을 뻔한 유물과 유적도 보존될 수 있는 것이리라. 2018년 9월 14일에는 용담댐 건설로 미뤄왔던 용담향교 6백 주년 기념식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고 받으며 자랑스러운 내 고장의 역사를 다시한번 되새기며 성대하게 치렀다. 용담 향교 대성전은 1984년 4월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로 지정되어 지역 내의 학술을 선도하는 중심으로 현재도 지역 내 많은 학자들의 회합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아동들을 위한 한문 교실을 열기도 하며 진안 학문의 뿌리를 지켜오고 있다. /이용미 수필가 *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하여 마이산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이다. 수필집 <물 위에 쓴 편지> 외 2권을 냈으며, 행촌수필문학상과 진안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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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11 14:46

[금요수필] 차 한잔의 여유

한일신 하계휴가가 그다지 반갑지 않을 때가 있었다. 사무실을 벗어나 집에 오면 마음이야 날아갈 것 같지만 집이 사무실보다 더 덥고 답답했기 때문이다.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버티려니 너무 힘들어서 더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생각해낸 것이 다방이었다. 다방에서 차 한 잔 시키면 한나절은 거뜬히 보낼 수 있었으니까. 전주 경원동에 있는 바다다방으로 갔다. 이름만큼이나 크고 넓어서 들어서기만 해도 속이 확 트이고 시원했다. 수족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 한 잔을 시켰다. 감미로운 음악에 귀를 열어놓고 커다란 수족관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귀여운 금붕어들과 눈을 맞추며 마음을 내어주면 세상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지금은 다른 건물에 밀려 흔적도 없지만, 오늘 갑자기 그 옛날이 그리워진다. 차의 원산지는 중국이라지만, 우리 조상은 삼국시대 선덕여왕 때 이미 차를 마셨다고 한다. 오늘날 물 다음으로 마시는 음료가 차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식사하러 가자는 말보다 차 한 잔 하자는 말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직장에서도 직원들이 커피타임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시작하면 분위기도 좋고 직원간의 유대가 더욱 돈독해지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일이다. 시청에 갔다가 커피를 마셨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마셨다. 그런데 그 커피 때문에 그날 저녁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며 괴로웠던 기억이 어제 일 같다. 어떤 사람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해서 커피로 휴식하고 커피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나는 지금도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향만 즐긴다. 지금은 위장이 좋지 않아 웬만하면 약도 먹지 않고 음식이나 민간요법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식사도 외식보다는 집에서 거의 해 먹고 은행, 대추, 생강, 도라지 등 몇 가지 약초를 준비해놓고 수시로 끓여 마신다. 몸에 좋다는 약초 차 만들기도 좋아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 중에 당뇨가 있어서 해마다 뽕잎 차를 만들어 보내주기도 했다. 어제는 순창에 갈 일이 있어서 쑥을 조금 캐왔다. 마늘, 당근과 더불어 성인병을 예방하는 3대 식물로 알려진 쑥을 밭두둑이나 논두렁에서 캤을 때는 손이 가렵고 붓는 증상이 있었는데 산에서 캐서인지 아무렇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았더니 쑥차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였다. 생 건조, 쪄서 건조, 쪄서 덖기, 그냥 덖기 등이 있는데 나는 아무래도 쪄서 덖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 방법을 택했다. 줄기와 쑥대는 제거하고 잎만 사용했다. 여러 번 씻어 건져서 물기를 뺀 다음 약간 건조한다. 그리고 찜 솥에 면포를 깔고 뚜껑을 덮고 찌다가 숨이 죽으면 꺼 낸다음 팬에 덖음질을 하여 치댄다. 덖다가 치대고 덖다가 치대기를 9번 하라고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끝냈다. 종일 쑥과 씨름했더니 집안이 온통 쑥향으로 가득했다. 다 만들어진 쑥을 컵에 조금 담아 뜨거운 물을 부었더니 아주 맑은 연초록빛이었다. 한 모금 삼키자 은은한 향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면서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쑥은 여러 가지 효능이 있지만, 특히 알칼리성 식품으로 장을 튼튼하게 해준다니 매일같이 꾸준히 마시면서 육신의 건강도 챙기고 여유로운 시간도 가져야겠다. 에센바흐는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바빠도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스리는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 * 한일신 수필가는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한 후 수필에 입문해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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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7.04 17:20

[금요수필] 김치찌개의 별미

신팔복 우리네 밥상에 김치가 빠지면 팥소 없는 찐빵과 같다. 나는 매일 김치를 먹는다. 만약에 김치가 없다면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식사가 되고 만다.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김치는 우리 조상들이 발명한 세계적 저장식품이다. 좋은 배추나 무를 다듬어 절이고, 찹쌀 풀에 고춧가루와 갖은양념을 넣어 만든 고춧가루 죽에 좋아하는 액젓으로 간을 맞춰 버무려서 김치를 담근다. 독에 넣어 서서히 자연 발효시키면 젖산이 풍부해지면서 더욱더 맛깔스럽게 숙성된다. 김장김치는 무기물과 비타민을 제공하고, 풍부한 영양분이 들어있어 겨울철 반찬으로는 모자람이 없다. 잘 삭힌 무김치는 찐 고구마와 매우 궁합이 잘 맞아 가난했던 시절에는 끼니로 먹었다. 김치전도 좋고 김치죽도 맛있다. 나는 추운 겨울이면 어렸을 때 입맛이 생각나 가끔 김치죽을 먹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살살 불어가며 먹는 김치죽은 끝 숟가락에서 더 개운한 맛을 느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김치찌개의 개운한 맛은 밥맛을 돋웠고 술을 당겼다. 그래서 친구와 김치찌개를 먹으려고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오늘도 친구와 함께 손맛이 좋은 작은 식당을 찾아왔다. 묵은김치에 돼지고기를 넣고 콩나물과 두부를 조금 올리고 그 위에 대파를 썰어 얹어 펄펄 끓이는 김치찌개가 식욕을 돋웠다. 밥은 제쳐 두고 막걸리를 한 사발씩을 마시고 찌개를 맛봤다. 야, 이 맛이야! 감미롭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친구도 무척 좋아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김치찌개 맛을 느꼈다. 어머니는 네발짐승의 고기를 못 드셨지만, 원체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음식이라 눈으로만 보고도 단박에 맛 좋게 끓여 내셨다. 김장김치와 돼지고기를 넣어 만든 김치찌개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한잔 술을 또 친구에게 권하며 나도 마셨다.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갔다. 김장용 무와 배추는 한여름 더위가 지나고 기온이 서늘해질 때 심는다. 무와 달리 배추는 가꾸기가 까다롭다. 무는 종자를 직접 흙에 뿌리지만 배추는 모종을 사다가 심는 게 보통이다. 모종을 심은 초기에 벌레나 귀뚜라미가 어린 배추 속잎을 끊어먹어 없어지고, 조금 자라면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기 때문에 가꾸기 힘들다. 그래서 해충 방제는 꼭 해야 한다. 올해도 배추 모종 한 판을 사다가 작은 남새밭에 심고 가꿨는데 그런대로 되었다. 며느리와 딸을 불러 김장을 마치고 무와 김치를 몇 통씩 싸서 보냈다. 잘 익은 김치를 먹고 긴 겨울을 거뜬히 이겨냈으면 좋겠다. 김치는 묵을수록 맛이 좋아진다. 묵은 지에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넣든가 신선한 꽁치나 고등어 등의 생선을 넣어 끓이면 감칠맛이 난다. 갓 지어 고슬고슬한 쌀밥에 얹어 먹으면 언제 먹었는지조차 모를 만큼 금방 밥 한 그릇을 비우게 된다. 김치찌개를 놓고선 입맛이 없다고 투정부릴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막 담근 김치보다 신 김치를 더 좋아한다. 숙성되어 시어진 김치가 내 입맛에 맞다. 특히 무김치 국물의 시원한 맛은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어 좋다. 땅속에 독을 묻어 숙성시킨 김치는 겨울을 지나면서 더욱 아삭해지고 시원한 맛을 낸다. 지금은 김치냉장고가 그를 대신하지만.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에 김장김치는 우리네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던 영양식품이었고, 건강을 챙겨주었다. 김치찌개로 안주를 하며 또 한 잔을 마셨다. 입안이 개운해졌다. 옆자리에서도 김치찌개가 끓고 있다. * 신팔복 수필가는 중등교사로 퇴직하여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 회원, 진안문협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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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27 16:56

가기 싫은 곳 - 최기춘

최기춘 수필가 살다 보면 가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이가 아파 치과에 가려면 마음이 심란하여 가기 싫다. 군대도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제대한 지 50년이 되어가는 요즘도 가끔 군대 가는 꿈을 꿀 때가 있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늙어서 가장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라 한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다르다. 적용법도 요양병원은 국민건강보험 의료보호법이 적용되고 요양원은 노인장기요양보험 노인복지법을 적용한다. 요양병원에는 의사가 있지만 요양원에는 의사가 없다. 간혹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엘 가 보면 병원이나 요양원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 주말 아내와 함께 요양병원에 문병을 다녀왔다.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방안 공기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우리가 문병한 환자는 거동이 불편하여 일상생활을 요양사들에게 의지하지만 정신은 맑았다. 병실에는 여섯 명이 있었다. 여섯 명 모두가 스스로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어떤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분들이었다.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 우리나라도 문병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내는 문병을 갈 때면 꼭 음식을 챙긴다. 집에서 끓여간 도토리묵을 대접하려고 준비하는데 문 옆에 있는 성미 급한 할머니가 나도 좀 주세요! 했다.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 가지고 갔기에 그렇지 않아도 나누어 드릴 참이었다. 입원 환자 중 스스로 앉지도 못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분들은 먹여드렸다. 어떤 할머니는 정신이 혼미하여 아내가 먹여드리는데도 혼자서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횡설수설하는데 웃지 않으려 해도 웃음이 나왔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때가 많다. 그러나 매일 간병하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의 애환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젊은 시절 술좌석에서 웃으며 농담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이 먹으면 예쁘고 미웁고,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 벼슬이 높고 낮고, 돈이 많고 적고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요양병원에서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고 누워서 연명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 말이 실감났다. 우리는 불과 30년 전만 해도 대부분 안방에서 임종했다. 사랑에서 거처하던 할아버지도 임종할 때면 안방으로 모셨다. 그래서 안방이 제일 위혐한 곳이라는 우스게 말도 있었다. 사람들이 안방에서 제일 많이 죽으니 안방이 제일 위험한 곳이란 뜻이다. 요즘은 위험한 곳의 순위가 바뀌었다고 한다. 요양시설에서 죽는 사람들이 많으니 요양시설이 제일 위험한 곳이 되었다. 요즘은 몸이 불편한 어른들을 집에서 모시기 어려운 가정이 많다. 요즘 노인들은 웬만해서는 요양시설에 가지 않으려 한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요양시설에 가기를 꺼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요양시설을 갈 때마다 느낀 일이지만 요양시설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근무하는 사람들의 근무 환경이나 처우가 좋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서비스의 질도 좋지 않다. 노인들도 사회환경이 바뀌어 노후에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면 요양시설에 갈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 잘 알지만 요양시설의 환경과 서비스가 나쁘니 가기를 싫어한다. 딱한 현실이다. 요양시설의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의 개선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이 다함께 노인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인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안락하고 품위있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는 장소기 되어야 할 것이다. 요양시설이 스스로 가고 싶은 곳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 최기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은발의 단상> 등 2권을 냈다. 현재 대한문학작가회, 영호남수필, 전북수필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북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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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20 15:45

[금요수필] 감동적인 정년퇴임식

고안상 2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후배 L의 전화가 왔다. 갑자기 이렇게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며, 2월 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오늘 오후 5시에 지인들 몇 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려고 하니, 시간이 나면 참석해달라고 했다. 어인 일로 오늘 행사를 이제야 전하는가 했다. 하지만 나는 무사히 퇴임하게 됨을 축하하며 참석하겠단 말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후배는 나와는 30여 년 가까이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 사이다. 직장에서 열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후배는 제자들이 많이 따르고 또 존경을 받았다. 후배는 아이들에게 항상 성실하고 의젓하게 살도록 가르치니 제자들은 그를 작은 거인이라 부르며 따랐다. 동료로서 그런 모습에 부러운 마음 가득했다. 약속 시각에 모임 장소로 나갔다. 후배 내외와 세 딸, 그리고 사위가 정중히 우리를 맞았다. 식장에서 많은 제자, 선후배 동료, 학부모와 지인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식장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퇴임식이 시작되었다. 명문대를 나와 직장생활을 하는 큰딸이 사회자로 나섰다. 큰딸에 의하면 조용히 퇴임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아는지라, 후배에게는 어제저녁 늦게서야 알렸다고 한다. 한 달 전, 세 딸은 어머니께 행사 계획을 말씀드리고, 후배의 제자들과 서로 연락해 조용히 이 행사를 준비해왔단다. 먼저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지난 시절의 후배와 가족들, 그리고 교직 생활의 모습을 담은 영상자료가 주위를 숙연케 했다. 이어서 세 딸과 사위가 나와 오늘을 있게 해준 부모님께 보은의 마음을 담은 해외여행 티켓을 증정하고, 둘째 딸이 애틋한 마음을 담아 감사의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감사와 존경을 담은 감사패와 공로패 증정이 뒤따랐다. 이어 현재 경찰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제자가 단상에 섰다. 부모님의 반대로 경찰대 진학을 포기하고 있던 자신을 선생님께서 직접 시험장까지 승용차로 데려다주어 오늘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며, 평생 그 은혜 잊지 않고 살겠다고 했다. 자랑스러운 후배 모습을 다시 한 번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뿌듯했다. 마지막으로 후배 L이 단상에 섰다.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후배가, 지난 30여 년을 무사히 교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아내와 가족,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에게 감사하다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다며, 교사로서 지난날이 부족했지만 즐겁고 행복했노라고 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마련해준 가족과 제자들에게 고맙다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축하객들의 우레같은 박수가 터졌다. 가족과 동료, 특히 제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온 후배는 성공한 인생을 산 것으로 보였다. 이 순간에도 일선 학교에는 후배와 같은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아이들이 그들의 꿈을 키우며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해진다. 누구나 정년퇴임식을 성대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 퇴임식을 보면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한 맥아더 장군의 말을 잠시 되새기며,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이렇게 조용히 퇴임한다면 오히려 더 의미가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감동 또한 오랜 시간 여운으로 남을 것 같았다. * 수필가 고안상은 정읍 호남고등학교 교장으로 퇴임, <대한문학>에서 수필가로 등단했다. 신아문예대학 작가회, 정읍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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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3 17:00

[금요수필]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임두환 수필가 어느 날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재전진안읍 향우회장인 J씨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와는 KT&G에서 오랜 동안 근무하며 신뢰를 쌓아온 사이다. 평소에도 내 고장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 왔지만 재전진안읍향우회장을 맡고부터는 더욱 열심이었다. 막상, 회장을 맡아보니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며 힘을 보태달라는 부탁이었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운을 부르는 부자의 말투란 책자를 전하고 가는 게 아닌가. J선배가 전해준 책자를 받아들고는 별스런 책도 있구나 싶었다. 운을 부르는 부자의 말투라는 제목부터가 호기심을 끌었다. 책장을 넘겨보니 말과 운의 관계를 알면 인생이 바뀐다.로 시작되었다. 대화법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바꾸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읽을수록 흥미진진하고 구구절절 귀감이 되었다. 좀 더 젊어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말 잘하는 사람을 청산유수라고 한다. 사람들은 막힘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그 사람의 말솜씨에 감동한다. 이 책의 저자 마야모토 마유미는 말할 때 중요한 건 유창함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잘 전달해야 된다고 했다. 상대방을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결론을 먼저 말하고 해설은 나중에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지 않는가. 말은 많지 않아도 밝은 표정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아, 그래요? 그렇군요? 하면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했다. 특히, 상대에게 호감을 얻으려면 마음에 거슬리는 언행을 삼가고,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험담이나 독설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말 잘하는 것은 환경이나 학습에 따라 다르겠지만 성격과도 무관치 않다고 본다. 나는 본시 가방 끈이 짧기도 하지만 사회물정을 몰랐다. 직장이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건배사를 할 때가 있다. 너와 나를 가릴 것 없이 술자리에 들어서면 본인이 건배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어느 날 직장 회식자리에서였다. 본부장이 나더러 건배사를 하라고 했다. 사전준비가 없던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맥주에 거품이 다 빠지고 미적지근해질 때까지 말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직원들은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분명히 저런 얼간이 같은 놈!이라고 했으리라. 두서없이 지껄이는 말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건배사도 그렇지만 어느 곳에서나 말은 짧으면서도 메시지만 분명하면 만점이려니 싶다. 이 책의 저자 마야모토 마유미는 상대와 대화할 때 말 끊어 먹지 말기, 같은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 늘어놓지 않기, 한자리에서 중언부언 하지말기 등을 강조하고 있다. 대화는 조물주가 인간에게만 허락해준 훌륭한 능력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던가. 즐겁고 긍정적인 대화는 웃는 얼굴에서 나온다. 상대방을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도 운을 부르는 부자의 말투이지 싶다. 긍정적인 말은 뇌세포도 변화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말버릇을 고치면 운명도 변한다는 것처럼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경험으로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말은 불운을 가져다주며 줄 수 있으므로. 남의 흠을 보는 눈이 아닌 장점을 볼 수 있는 눈과 언행을 기르도록 노력하자. * 임두환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해 전북문인협회, 영호남수필문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행촌수필문학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수필집으로 <뚝심대장 임장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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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6 15:10

보리누룽지

김순길 탁 트인 들판의 청보리 밭에 봄의 향기가 가득하다. 푸르름이 넘실대는 초록의 대향연이다. 전국 최초로 보리를 주제로 한 경관농업으로 우리나라 대표축제가 된 고창청보리밭축제 한마당이다. 대지와 하늘이 온통 푸른색으로 가득하니 나와 주위 사람들도 모두 푸르러 한껏 젊어진 듯하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이런 길이 아닐까 생각하며 잠시 시간이 이렇게 멈추었으면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축제의 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거리이다. 즐비한 먹거리 중에서 특히 오늘의 주인공인 보리로 만든 먹거리가 풍성했다. 꽁보리밥과 비빔밥, 보리죽, 보리개떡 등 종류도 다양했다. 아내와 지인부부는 보리비빔밥을 주문하고, 나는 추억의 보리누룽지를 주문했다. 보리누룽지에는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깊게 서려있다. 일제 36년의 수탈로 인한 헐벗음과 굶주림. 뒤이어진 6.25전쟁. 1950년대 우리민족의 뼛속까지 스며든 가난은 당연시되었으며, 그것을「보릿고개」라는 말이 대변해주고 있다. 보릿고개는 태산(泰山)보다 높다고 했다. 여기에는 우리 어머니들의 한(恨)과 설움이 맺혀 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점심걱정, 점심을 겨우 해결하면 또 저녁걱정, 그리고 내일... 매일매일 끼니 걱정을 해야 했던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태산보다 높은 분이셨다. 나의 어린 시절, 아침식사는 꽁보리밥, 무밥, 시래기밥 등으로 연명하고, 점심은 고구마나 감자 등으로 때웠는데, 이것마저도 없을 때는 물 한 바가지로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물만 마시는 나를 보고 새까맣게 타버린 보리누룽지를 먹으라고 주셨다. 밥 지을 때 밑바닥에 있는 보리가 탄 숭늉은 감칠맛이 조금 있었지만, 보리누룽지는 퉁퉁 불어터져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내가 맛있게 먹는 줄 아시고 보리누룽지를 매일 먹을 수 있도록 부엌에 준비해놓고 논밭 일터로 나가셨다. 늦은 저녁시간 일터에서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항상 물 한 바가지를 달라고 하시고 그걸 단숨에 들이키셨다. 어머니는 평소 일터에 나가시기 전에 드시던 보리누룽지를 나에게 주시고 저녁이 다 돼서야 물 한 바가지로 허기를 달래셨던 것이다. 요즘 보리누룽지의 효능에 대하여 좋은 말이 많다. 쌀은 산성식품인데 반해 보리누룽지는 약알칼리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보리누룽지는 쌀누룽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몸에 좋다고 한다. 또한, 보리누룽지는 몸속에 있는 온갖 종류의 유독물질과 기름때, 콜레스테롤 같은 것들을 분해시켜 몸 밖으로 모두 빼내 혈액을 깨끗하게 해준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살이를 보면 때로는 시간이 아름다움을 만든다고 한다. 또한 시간이 해답을 안겨줄 거라고도 한다. 진정, 그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게 되었다. 「시커멓게 타버린 보리누룽지」는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그 속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눈물이 들어 있었다. 청보리밭 내음이 가득한 오늘, 먼 곳에 계신 어머니가 더욱 생각난다. 어머니, 그립고 그립습니다! * 김순길 수필가는 <에세이스트>로 등단했으며, 무주 부군수를 지냈다. 신아문예대학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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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30 17:16

[금요수필] 내장산 용굴암

이대영 초여름 은빛 햇살 쏟아지는 싱그러운 연초록 잎 사이로 도열한 신록 터널이 나를 반긴다. 이 터널 끝에는 내장사가 있고 왼편으로 올라가는 길이 용굴암으로 가는 길이다. 여름의 전령사 매미들의 합주소리가 예서제서 넘쳐흐르고 절간에서는 둔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의 절박한 외침이 들려올 것만 같다. 용굴암 자락에서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계곡을 따라 험한 절벽의 도랑 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다보니 벌써 숨이 차고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평탄한 도로라 여유 있게 올라가는 나를 보면서 400여 년 전 두 분의 모습을 반해 보려고 애를 썼다. 내장사에서 용굴암까지 평탄한 계곡사이를 걷고 돌다리를 몇 번 건너다보면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전설을 지닌 용굴암에 이르게 된다. 내장산의 비경에 취하여 굽이굽이 금선계곡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용이 승천했다는 용굴암을 보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용굴암은 거의 수직으로 된 바위에 부엉이 집처럼 자리하고 있어 철제 사다리를 수십여 계단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다. 헐떡이며 겨우 올라 한숨 내쉬고 바라보는 순간 내가 바로 임진왜란 때 우리조상 태조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용굴이다. 알겠느냐?하는 소리가 폐부 깊숙이 울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1592년 부산에 침입한 왜적들이 서울을 향해 돌진하며 전 국토가 함락의 위기에 처해 사람마다 자기 살길을 찾아 동분서주 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나라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이때 혼란스런 속에서도 의연히 일어난 두 선비가 있었다. 두 선비는 자기 집 가솔들과 우마차 20여대를 끌고 태조 어진과 왕조실록이 있는 전주 경기전 향해 정읍에서 출발하여 도착하니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마침 전라감사 이광과 정읍 내장산을 적합한 피신 장소로 협의 하여 확정하고 있던 차였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태조어진과 바로 옆 사고에 있는 실록들을 우마차에 실으니 62궤짝이나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눈을 피하여 밤낮없이 무거운 우마차를 밀고 끌며 용굴암의 험악한 계곡을 올라갔을 모습을 생각하니 두 분의 거룩하고 숭고한 나라사랑에 고개가 숙여졌다. 맨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바위절벽위에 이렇게 끌어 올려 진 어진과 실록을 두 분이 번갈아가며 숙직을 서면서 애를 태웠겠구나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장산이란 지명의 내장(內藏)이란 말은 안쪽에 깊이 감춘다는 의미가 있으니 아마도 이런 연유에서 지어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7년간의 긴 전쟁이 끝난 뒤 다른 곳에 모셔있던 어진과 실록은 모두 화마에 소실되어 버리고 없었다. 그런데 1년 여 이곳에 머물던 어진과 실록은 아산객사로 이안했다가 강화도를 거쳐 묘향산보현사 별전에 봉안하여 화를 면하고 다시 전주에 모셔져 지금의 태조어진과 실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역사의 한도막인 태조부터 명종까지 열세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 안의, 손홍록 두 선비의 숭고한 나라 사랑의 정신에 참으로 고개가 숙여진다. 어진은 국보317호 지정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은 국보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오늘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며 유유히 우리와 함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 이대영 씨는 전주 서신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으며 현재 어진박물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잊혀가는 옛말 모음집 <그게 시방 무신 말이디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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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16 20:11

[금요수필] 우리 동네 꽃동산

이금영 연둣빛 물결이 아침의 빗장을 연다. 베란다에 나가 싱싱한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한다. 하룻밤 사이에 연두가 초록으로 재주를 넘었나. 아니야 아직은 연두야. 온도계를 오르내리는 일교차에도 따사로운 초록 햇살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뭇잎도 꽃잎도 하루가 다르게 초록을 닮아 간다. 한낮엔 초여름 날씨인 듯 착각을 할 수도 있겠다. 목련이 지고 구름 같은 벚꽃도 꽃비로 흩어진다. 철쭉이 자기 차례라고 홍조를 띠고 있어 그 진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우리 동네 완산 칠봉은 요즈음 동요속의 꽃 대궐이 되었다.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 노래가 흥얼거려질 수밖에. 꽃 대궐 가는 길 이곳은 나의 고향은 아니지만 20여 년을 살아 왔으니 고향 같은 곳이다. 남부시장 다리를 지나 싸목싸목 걸어서 완산 시립도서관으로 오르다 보면 도서관 뒷산이 바로 꽃 대궐이다. 꽃향기 따라 걷다 보면 솔 내음이 코를 간질이고, 가슴으로 파고드는 소쩍새 소리가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핑크빛 겹 벚꽃이 만개하면 터널을 이루어 꽃그늘 아래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셀카봉 셔터를 눌러댄다. 망울망울 피웠던 꽃들이 바람에 흔들려 연분홍 꽃잎들의 꽂진 자리가 꽃눈으로 펼쳐진다. 차마 발걸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요리조리 살피며 한발씩 즈려밟아 본다. 완산 칠봉은 꽃 대궐뿐이랴. 봉우리가 일곱 개라 칠봉이 아니던가. 자세히 숲을 드려다 보면 맹감나무와 산딸기도 보이고 키 작은 야생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거기에 송진 냄새도 더하며 지나는 사람들을 산으로 유혹을 한다. 완산 칠봉 꽃동산은 몇 해 전만 해도 지금처럼 알려지지 않았다. 시대는 바야흐로 넷트워크 시대인지라 신문과 TV에 몇 번 소개되더니 오늘에 이르렀다. 완산 칠봉 투구봉 꽃동산은 개인의 소유였는데 명소가 되다 보니 사회에 환원했다는 이야기다. 그가 선친의 묘가 있는 야산에 꽃나무를 심기 시작하면서 부터 40년 이상을 정성 들여 가꾼 꽃밭이었다. 비록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평생을 자연적인 꽃동산을 만들겠다는 열정과 의지로 그는 꿈을 이루었다. 그의 노력으로 봄맞이하는 이들에게 화려한 불꽃 같은 생명의 꽃을 선물로 안겨준 것이리라.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꽃구경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꽃봉오리 같이 예쁜 아이들이 부모 손을 잡고 오고, 꽃보다 더 예쁜 사랑으로 만난 젊은이들이 사랑의 꽃향기에 취해 헉헉대며 올라온다. 저어, 꽃동네가 어디쯤 있나요? 네, 벌 나비들의 날갯짓을 따라서 곧바로 오르면 됩니다. 거의 다 왔어요. 끝없는 상춘객 물결들의 대열이 우리 동네 꽃동산으로 밀려오다니 마치 주인처럼 흐뭇하기만 하다. 짙붉은 꽃들이 아침 햇살에 불꽃 되어 반짝거리면 마음도 따라서 반짝이고, 순백의 철쭉을 만나면 마음도 순화되는 느낌이며 어른 키보다 훌쩍 커서 만개한 영산홍을 올려다보면 관객도 어느새 훌쩍 커진다. 우리 동네 봄꽃동산의 대표적인 꽃들은 조팝나무, 영산홍, 겹벚꽃과 해당화, 백일홍, 철쭉, 흰철쭉, 노랑 매화 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해 말 그대로 아름다운 꽃 대궐이다. 완산칠봉 꽃동산에 만개한 겹벚꽃과 철쭉 사이에 선들선들 징검다리 밟고 오는 봄바람이 휘어진 초록을 붙들고 고향의 봄노래를 부른다. * 이금영 수필가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하여 가톨릭문우회. 전북수필. 행촌수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수필집 <행복을 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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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9 20:28

[금요수필] 할머니의 연봉

정남숙 나는 지금까지 일을 하고 보수를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10년 전, 선생님, 이제 아이들 한 번 가르쳐 보시죠. 귀향하여 농장을 가꾸며 틈틈이 서원에 들러 한자사범과 훈장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훈장 선생님이 권하는 말이었다. 아직은 가르칠 실력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충분하다며 노인복지관에서는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며 한 번 가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내가 왜 거기를 가? 하며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웃할머니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분은 정치, 경제, 시사, 교육까지 다방면으로 모르는 게 없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느냐고 묻는 나에게, 노인복지관에 다니다 보니 이런 상식적인 것은 기본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래요? 하며 응대를 해주니 더욱 신이 나서, 만날 때마다 새로운 뉴스를 전해 주었다. 별로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며, 전문가 수준도 아니니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면 괜히 얌전한 할머니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주책을 떠는 떠들이로 만든 주범이 노인복지관인 것 같아 복지관 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뒤에도 노인복지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해 재능 나눔 자원봉사 일자리로 노인복지관을 찾았다. 복지관직원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며 추후 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단 한 번 나를 봤을 뿐인데 나를 기억하고 내 이름까지 불러주다니, 그 동안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노인복지관에 대한 나의 감정은 눈 녹듯 녹아내리고 반가움에 신뢰감까지 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지관을 나서다 뒤돌아보니 아무 의미 없이 일자리만 원해 들어갔던 복지관 건물이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며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았다. 나는 손자손녀가 세 명이 있다. 그 중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출국할 날이 다가왔다. 한 달 방학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다. 제 부모들은 학비며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등이 휠 테지만 나는 할머니로서 의무감으로 적은 용돈만 주며 잔소리만 들어놓았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손자에게 내 연봉에서 두둑이 현금을 찾아 할머니도 연봉 받는다.고 자랑을 했다. 옆에 있던 제 어미가 할머니 일 년 수고하신 보수라며 허투루 쓰지 말고 할머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내가 받는 연봉은, 1일 3시간, 1달, 열흘 30시간, 1년 중 9개월 동안만 일할 수 있는 노인 일자리에서 받는 보수다. 매월 십일조를 떼고, 남은 금액을 차곡차곡 모아 쌓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손자손녀에게 할머니의 사랑으로 인심을 쓸 수 있게 해 준 게 나의 귀한 연봉이다. 손자들에게 전에 주던 용돈보다 비록 액수는 적을지라도, 내 수고의 대가를 받아 전해주는 보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뿌듯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막내 손녀와 성적이 올라 좋아하는 큰 소녀에게도 축하해 줄 수 있어 더욱 행복하다. 과거 노인들은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요즘 노인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늙으면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는 말이 있다. 품위 있는 노년의 삶을 위해 일하는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일자리와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연봉이 필요하다. 내 수고와 내 이름으로 받은 보수는 액수와 관계없이 내가 아직은 건재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나의 연봉은 아주 의미 있는 소중한 나의 근로소득이다, * 정남숙은 대한 문학으로 등단하여 행촌수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에서 40여 년 살다가 귀향하여 고향에서 농장경영하며 전주의 역사, 문화, 알리는 문화해설자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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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2 20:46

[금요수필] 격양가를 부르는 봄까치꽃

왕태삼 바야흐로 에메랄드빛 봄까치꽃이 온 산하에 피고 있다. 하얀 겨울을 지우는 푸른 별들의 향연이 보석처럼 빛난다. 얼음장 개울가에도 잔설의 밭둑에도 피더니, 대문 밖에도 올망졸망 아기들처럼 무더기로 몰려왔다. 푸른 은하수가 백주대낮에 가장 낮은 땅에서 지천으로 흐르고 있다. 이에 비해 매화는 게으른 미녀처럼 이제야 기지개를 켠다. 언제부턴가 봄의 전령사는 빙자옥질 고매한 매화가 아닌, 장삼이사 봄까치라 생각했다. 봄까치는 지조와 절개의 매화보다 단연 봄의 선구자들이다. 단지 뽐내지 않았을 뿐, 무관심 속에서 묵묵히 피고 지는 신비한 코발트빛 선남선녀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근면과 희망, 지혜와 순수, 겸양한 신화를 가르친다. 향기 대신 몸으로 보여주는 처절한 봄까치 - 새끼손가락만 한 키에 새끼손톱만 한 꽃을 보노라면 나는 절로 무릎을 꿇고 숙연해진다. 봄까치는 근면과 희망의 연주자다. 엄마보다 일찍 일어나 스스로 박수치며 노는 돌배기를 닮았다. 칭얼대지 않고 아침 햇살을 튕기며 옹알거리는 아기의 목소리는 지친 어른들을 눈 녹듯 풀어준다. 봄까치는 지혜로운 천사다. 농부의 발걸음이 들녘으로 나오기 전, 다른 풀들이 깨기 전, 미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마치 지금쯤 깊은 산 속에서 얼음을 이고 피어오를 노란 복수초 같다. 그러나 복수초는 외로이 멀리 살지만 봄까치는 들판, 개울가, 길가, 화단 등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봄소식을 한 아름 직접 보듬고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처럼 작은 체온을 싣고 골목골목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봄까치는 겸양한 무리들이다. 늘 상대를 배려하고 낮은 자세로 임하라는 공자의 말씀〔려이하인慮以下人〕을 새긴다. 저렇게 궁벽지고 냉혹한 벌판에서도 봄의 불쏘시개로 들어가 세상의 배경으로 타오른다. 그들은 진정한 보석 같은 사람들이다. 결국 작은 꿈과 꿈들을 모아 푸른 언덕을 함께 쌓아간다. 봄까치는 벌들의 놀이공원이다. 벌들은 한 오라기 미인의 속눈썹만 한 봄까치의 꽃대에 올라 롤러코스터를 탄다. 마치 벼룩의 간을 빼먹듯 잔인해 보이지만 벌들은 아이들처럼 곡예 부리며 신나게 꿀을 딴다. 눈 깜짝할 새 꽃대는 활처럼 휘어져 내리고, 벌들은 화들짝 놀란다. 봄까치가 통째로 춤을 춘다. 벌들은 또 오르며 즐겁게 소스라친다. 나의 고개도 방아깨비처럼 절로 끄덕인다. 벌은 꿀도 먹고 놀이도 즐긴다. 이것은 자기의 수분 값을 지불하는 봄까치의 상도덕이 선사하는 자연의 놀이다. 자기보다 몇 배 덩치 큰 벌들을 부르는 봄까치 - 그들은 외유내강의 꽃이다. 이처럼 봄까치는 가장 작지만 가장 큰 고요한 평화를 구가한다. 그 화평한 세상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봄까치를 본받을 일이다. 풍요로운 음식을 싣고 가는 이 시대, 그 수레바퀴는 왜 삐걱거리며 절며 가는지? 과적은 아닌지? 수레바퀴는 짝짝인지? 즐거운 격양가는 왜 부르지 못하는지? 시대착오적 망령들이 수레바퀴의 핸들을 썩어버린 자기 방죽이나 이념의 투기장으로 꺾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 들판에 달려 작지만 화평한 세상, 푸른 봄까치를 만나 심리치료라도 받아 볼 일이다. 무릎 꿇고 자세를 낮춰 태평성대를 귀담아 들어볼 일이다. * 왕태삼 시인은 계간 <문학시대>를 통해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작촌예술상을 수상했으며 시집 <나의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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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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