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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동비토론(東匪討論)>과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동비토론 첫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동비토론 1894년 11월 4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동비토론(東匪討論)>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강릉부사(江陵府使)로 있던 이회원(李會源)이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 진압  문서를 모아 놓은 것이다. 동학농민군 진압과 관련한 감영(監營), 순영(巡營), 의정부(議政府) 등의 상급 기관의 관문(關文) 및 전령(傳令), 이들에게 올리는 강릉부의 첩보(牒報), 그리고 주변 관아를 상대로 보낸 관문(關文) 및 전령(傳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서들을 <동비토론(東匪討論)>으로 묶은이는 이회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생몰년대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선원속보(璿源續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권39(卷之三十九)에 따르면 1830년(순조 경인) 4월 19일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효령대군파 15대손이다. 족보에 따르면 생원(生員)에 급제하고 음승지(蔭承旨)를 거쳐 소모사(召募使)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회원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동소모사(關東召募使)를 역임하였으므로 이 족보에 나온 인물임이 확실하다. 

이회원은 그의 조상인 효령대군 11대손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강원도 강릉에 정착하여 선교장(船橋莊)을 건립한 이래 1830년 출생하여 1844년(헌종 10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1883년(고종 20년) 순창원(順昌園) 수봉관(守奉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6년 사헌부 감찰, 이듬해에 의금부 도사와 공조좌랑을 지냈으며, 이후 상서원(尙瑞院) 별제(別提) 등의 관직을 거쳤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에는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회원을 일컬어 ‘전승지(前承旨)’라고 하는 것이다. 

임영토비소록 첫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임영토비소록 1894년 9월 6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또한 동학농민군 토벌을 지휘했던 이회원의 관련 기록이다. 여기서 임영(臨瀛)은 강릉의 별칭이다. 그런데 작성자가 불분명하다. 작성자가 선교장 주인 이회원이라는 설과 이회원이 아니라 그의 지인일 것이라는 설로 엇갈렸다. 실제로 <임영토비소록>을 읽어보면 이회원을 ‘본읍(本邑) 정동면(丁洞面) 선교(仙橋)의 이(李) 승지(承旨)’로 지칭하여 작성자 본인과 이회원을 구분짓고 있어 이회원이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자료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이회원이 본인을 3인칭으로 설정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자료의 모두(冒頭)에는 이단의 성행을 개탄하고, 동학을 두고 요망한 술수이며 재물을 갈취하려는 방도로 규정하는 사설이 길게 실려 있다. 아무래도 강릉 지역 동학농민군 토벌의 총 책임을 맡았던 이회원 본인이 아니면 작성하기 어려운 사설로 보인다. 

다음으로 1894년 8월 20일 이래 강릉 및 주변 지역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 및 토벌에 대한 서술이 보이는데 11월 차기석(車箕錫)과 박학조(朴學祚)를 처형하고 수급을 원주 순무영에 보내어 관동 일대의 동비(東匪) 평정을 마무리 짓는 내용이 길게 이어진다. 여기서도 이회원은 ‘전승지(前承旨)’, ‘강릉부사(江陵府使)’만으로 지칭되고 이회원 본인이라고 서술되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어떤 객(客)이 돈천재(沌泉齋)를 지나다 주인(主人)이 쓴 토비소록(討匪小錄)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실록입니다’라고 말하니 주인이 쳐다보고 탄식하여 말하는” 문답이 이어진다. 여기서 돈천재(沌泉齋)는 이회원이 기거하는 선교장에 있는 활래정(活來亭)의 별호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미 토비소록(討匪小錄)을 언급하였다는 것은 문답 이전의 동학농민군 토벌 내용이 바로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임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문답은 “토비소록(討匪小錄)”, 즉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의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문답을 보면 문답의 돈천재 주인이 “내가 수령의 지팡이를 짚고서”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돈천재 주인은 수령, 즉 강릉부사의 지팡이를 짚은 이회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임영토비소록>의 작성자는 이회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통비토론(東匪討論)>이 강릉부사로 재직하던 이회원이 순영(巡營) 등 상급 기관 및 주변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서를 엮은 것이라면,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은 그가 동학농민군 진압 과정에서 스스로 느낀 감정과 토벌 과정에 대한 자신의 서술, 그리고 객(客)과의 문답을 통한 자기 정당화를 담은 개인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를 동시에 검토하면 강원도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의 활동 상황과 토벌 과정에 대하여 공문서를 통하여 드러나는 공식 기록과 당시 토벌의 책임을 맡았던강릉부사 이회원의 개인적 인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두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강원도 강릉 지역의 동학농민군 활동 및 이에 대한 진압 상황은 다음과 같다. 1894년 8월 20일부터 동학교도들이 강릉 대관령 서쪽 대화면(大和面)을 침범하여 대관령을 넘어간다고 큰소리쳤다. 이들은 “강릉의 어떤 부잣집은 우리들을 위해 술을 빚고 소를 잡아 저장하여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선교의 이 아무개는 우리를 해치려고 창검을 점고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선교의 이 아무개’는 이회원을 지칭한다.

9월 4일에는 영월과 평창, 정선 등 5개 고을의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강릉부사가 바뀌는 때를 엿보아 일제히 강릉 읍내에 들어와서 삼정(三政)을 바로잡을 것을 칭하고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만 이들은 다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1일 이회원이 강릉부사에 제수되고 이후 관동소모사를 겸직하게 되었다. 이제 강릉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은 더 이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2일 강릉 영서의 봉평(蓬坪) 등에 있던 동학농민군도 이미 토벌당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 7명이 체포당하고 나머지 무리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더 이상 강릉을 공략할 수 없었던 동학농민군은 정선과 평창에 집결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이회원는 양양(襄陽)과 삼척(三陟)에서 군정(軍丁)을 모집하였다. 지금은 강원도 평창(平昌)에 속해 있는 봉평에서의 전투는 11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동학농민군이 패배하여 9명이 참수되었다. 한편 내면(內面)에는 강원도 중부 영서 내륙 동학교단의 중심지였던 홍천(洪川)에서 도소(都所)를 꾸리고 홍천 서석 풍암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쫓겨온 차기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린(麒獜), 인제(麟蹄), 양양(襄陽), 간성(杆城) 등에 통문을 보내고 군호(軍號)로 동학농민군을 모아 봉평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1월 9일 순영중군행진소(巡營中軍行陣所)가 정선(旌善)까지 진출하였다. 일본군도 정선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정선의 동학농민군은 도망가서 흩어졌다. 이미 11월 7일 강릉에서 나온 포군이 순영 중군과 함께 정선읍으로 가서 동서로 나누어 동학농민군을 물리쳤다.   

한편 차기석은 정선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내면에 있다가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16일 무렵 관군이 내면 동학농민군 지도자 차기석과 오덕현(吳德玄), 그리고 집강 박석원(朴碩元) 등 3명을 사로잡은 보고가 도착하였다. 결국 11월 22일 차기석은 박학조와 함께 교장(敎場)에서 참수당하였고, 수급은 원주 순무영으로 보내졌다. 이로써 <임영토비소록>에 따르면 강원도 강릉 지역의 동학농민군 토벌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임영토비소록> 말미에 있는 주인과 객(客)의 문답에 따르면 주인의 활동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동쪽으로 오는 형세를 모면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영동의 주민들이 안도할 수 있었다”는 객(客)의 질의가 나온다. 이는 이회원의 ‘밝은’ 지휘가 일본군의 영동 진입을 막은 점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사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점에서 강릉부사 이회원과 일본군은 같은 입장이었고, 일본군의 영동 진입을 막기 위하여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는 것은 나름 본인은 일본군도 막았다고 하는 군색한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일본군을 경계한 점은 조선의 고을 수령으로서 최소한의 중심은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영토비소록>은 “상(上)의 32년 을미(乙未) 국월(菊月) 하한(下澣) 돈천재(沌泉齋)에서 짓다”로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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