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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홍재일기(鴻齋日記)

한국 근대 이행기 전체를 관통하는 장기간의 기록

홍재일기 5권(1890-1894) 표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홍재일기 5권 1894년 3월 27일 백산 봉기 관련 내용.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홍재일기 6권(1895-1904) 표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홍재일기.hwp<홍재일기(鴻齋日記)>는 1책(19.5cm×22cm), 2책(23×19), 3책(21.5×19.5), 4책(20×20), 5책(19.5×20), 6책(21×21), 7책(21×19.5)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부안군 남하면(현재의 주산면)에서 활동했던 유생 기행현(奇幸鉉, 1843∼?)이 1866년 3월 10일부터 1911년 12월 30일까지 45년간 농촌 지식인 기행현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 장기간에 걸쳐 직접 경험하거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탐문한 내용을 일기로 작성하였다. 그가 살던 시기는 개항 이후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기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사회의 변동 양상은 어떤 시기보다도 급격하게 전개되었다. 일기의 최종 부분은 그의 중년과 만년에 해당하는 근대화와 정치 사회적 격변과 이후 식민지로의 진행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보고들은 내용과 주민들의 사정과 생활 형편, 조세 부과, 날씨와 자연재해, 호구조사, 물가와 시세 변동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일기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기는 병인양요 무렵부터 시작해서 경술국치로 인한 대한제국 멸망 무렵까지이다. 기행현의 일기는 근대 이행기 정치사회 변동은 물론 경제 상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로, 동학농민혁명을 전후로 한 부안과 고부지역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내용은 1893년과 1894년의 기록으로 금구 원평의 동학집회, 고부농민항쟁과 안핵사 이용태의 작폐, 백산대회 등과 관련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특히 1894년 4월 9일 자 일기에 “동학인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밟히지 않고 벌레 한 마리 죽지 않았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생명 존중 사상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894년 6월 17일 자 일기에 “곳곳의 동학인들이 당당하게 횡행하면서 나쁜 짓을 하고 폐해를 끼치며 거리낌 없이 살인을 하니 대소 인민들이 그 기세에 두려워하였다”라고 적고 있듯이 농민군에 대한 기행현의 인식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홍재일기󰡕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전북대학교 이재연구소에서 부안군의 지원을 받아 이를 탈초하고 2권의 책으로 번역 발간하였다. 

 이 책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부안지역의 새로운 사례를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이자 1894년 전후의 국내 상황을 폭넓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최근 발견된 국내 자료 중에서 매우 가치 있는 사료로 판단된다. 기행현은 1866년부터 1911년까지 일기를 썼는데. 특히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심지에 거주하면서 동학농민군⋅관군⋅일반백성⋅장사꾼⋅민보군⋅유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 내역을 기록한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홍재일기󰡕는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홍재일기󰡕에서 담고 있는 주요 사건과 내용을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의 활동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색출과 토벌을 위해 부안지역에도 유회소(儒會所)가 설치되었고 농민군 체포와 처단은 1895년부터 1904년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기행현은 이들도 ‘구 동학도’와 ‘신 동학도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동학농민군 색출을 위해 전라도 각 군과 읍에는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와 사상통제를 위한 향약(鄕約)이 광범위하게 실시되었는데, 특히 개항 이후 일상화되었던 오가작통제는 러일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도 부안지역에서 계속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작통제는 각 마을에서 매달 2회에 걸쳐 시행하였는데 주민들은 각기 호신용 무기를 소지하고 훈집소에 모여 점검하는 형식인데 그 내용을 두 권의 책으로 작성하여 비치해 두었다.

 그는 동학농민군 외에도 여타 변혁운동에 대해서도 일기에 언급하였다. 고산 등지에서 활동하다 이후 대둔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한 동학농민군 최후항쟁과 전봉준⋅손화중이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실도 들었다. 기행현은 이후 경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의 민란소식을 들었고, 대한제국 시기 초반 제1⋅2차 제주민란과 서울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과 함께 특히 전라도 정읍과 고창⋅흥덕⋅김제 등 주변 지역에서 크게 활동하던 영학당(英學黨) 관련 내용도 일기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정부에서는 영학당을 ‘서양 종교를 빙자하여 침학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무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는 영학을 동학의 변형으로 평가하면서도 영학⋅동학⋅서학 등으로 엄밀하게 구분하여 이해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거주지인 부안지역은 영학이 없어 태평하다며 안도하고 있었다. 홍재일기는 을미사변 이후부터 시작되어 남한대토벌 작전까지 이어지는 호남의병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국망 직전의 일기에서 그는 “‘무신 난리는 웬 난리? 기유 생난리에 큰 개 작은 개가 시냇가에 드러누워 임자를 기다리네’”라는 당시 회자되던 동요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왕궁 매입과 철거 등을 통해 무너지는 조선 왕실과 망국적 사태를 우려하면서 일본에게 대한제국의 권리를 양위하는 조칙 번역문과 칙령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한편 호남의 곡창지대인 부안지역은 일본인들의 토지 점탈과 식민지 농업기반의 거점이 되었다. 일기에 그는 일본인의 부안지역 토지 점탈과 그들의 소작인과 마름 고용의 사례를 적고 있다. 그의 아들도 일본인의 논을, 그 역시 후지모토 합자회사의 논을 소작하였다. 부안지역의 일본인 토지매입과 그로 인한 소작권 변경은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 직후부터 본격화되었고 그 여파는 기행현 자신에게도 피부적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자료는 그의 후손 기곤 씨가 소장하고 있으며, 2024년 국가유산청에 의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재곤(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이병춘의 ‘이풍암공실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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