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김형진의 오디세이 <노정약기(路程畧記)>
△백범 김구와의 만남과 만주 동행
<노정약기(路程畧記)>는 전라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 이명 봉회[鳳會]‧형모[炯模], 자 원명[元明], 1861~1898)의 동학농민군 활동과 이후 행적에 관한 자서전 기록이다. 김형진은 1894년 남원성 전투에서 패하자 피신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895년 5월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을 찾아갔다. 그는 안태훈의 집에서 며칠 동안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 집 사랑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안동 김씨 종씨인 김구(김창수)를 만났다. 동학농민군 출신인 김형진은 황해도 동학농민군 토벌의 중심에 있던 안태훈을 만나는 상황을 ‘우연히’ 신천에 가게 되었다고만 간단히 기술하고만 있을 뿐 특별한 언급은 없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참빗장수로 변장한 김형진이 자신은 남원군 이동에 살고 있는데, 삼남에서도 신천 청계동 안 진사는 당세 대문장‧대영웅의 풍문이 있어 만나보고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김형진은 김구와 의기투합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고통과 기쁨을 같이하며 서양과 왜를 물리칠 계획을 의논’하였다. 논의 결과 함께 중국행을 결정하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백두산을 유람한 후에 동북 삼성을 지나 중국 수도 베이징까지 가기로 계획하고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참빗과 필묵 등을 한 짐씩 지고 장사꾼 행색으로 변장하여 재령-중화-평양을 거쳐 함경도 고원-영흥-정평-함흥-북청-단천-갑산-혜산진-후창-자성(중강)을 지나 드디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통화현 모아산에 도착하였다.
<노정약기>에 의하면 통화현을 지나 북쪽으로 1천여 리를 걸어 심양의 서쪽 금주(錦州)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김형진과 김구는 행적을 의심한 현지 군인들에게 포박되어 ‘마통령(馬統領)’으로 불린 마대인을 만나게 된다. 이때 김형진은 의병을 모아 강포한 왜적을 좇아 싸우다가 패하여 ‘부모의 나라’인 상국(중국)으로 망명하러 왔다고 설명하였다. 이들의 기개를 지켜본 마대인은 결박을 풀어주었고 며칠간 그곳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 지방관으로부터 망명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국길에 올라 7월 다시 청계동으로 되돌아왔고 김형진은 이후 김구의 집에서 한 달 넘게 머물렀다.
청계로 되돌아온 후 김형진은 김구를 통해 이항로 계열의 화서학파로 안태훈의 초청으로 신천에 와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던 고능선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김구도 ‘고산림(高山林)’으로 불리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학문과 인품에 큰 감화를 받았다. 김형진은 ‘평생 마음으로 왜와 서양을 배척하여 서양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는 서양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고 그에 대한 첫인상을 기록하면서 그에게 중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했고, 이후 늘 교유하면서 서로 간에 뜻이 통하였다고 한다. 김형진은 그를 ‘정말로 바르게 배운 군자’로 기억하였다. 이때의 만남과 스승과 제자로서의 교감은 이후 김형진의 의병 활동을 전적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 연합의진 구상의 현실화
이 무렵 김형진은 ‘왜놈의 화가 날로 달라지고 달로 극성스럽게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김구와 의병을 일으킬 계책을 의논하였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가 8월 민왕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 직후였다. 그는 김구에게 여비를 마련하여 중국에 다시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김구는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김재희에게 이 말을 전하였고 안악 사람인 최창조로부터 여비 100여 냥을 마련하여 그해 9월 12일에 제2차 중국행에 오르게 되었다.
함경도로 우회했던 제1차와는 달리 이번에는 단거리 직행 길을 채택하였다. 즉, 문화-안악-용강-강서-평양을 거쳐 안주와 삭주를 지나 압록강에 이르렀다. 도강 이후 두 사람은 심양에 도착한 후 그곳에 유람하고 있던 강서 출신 최연순과 해주 출신 김성찬 등과 함께 연명으로 관동 연왕 이크탕가(依克唐阿)에게 편지를 썼다. 이크탕가는 청일전쟁 후반 평양으로 출동하다가 청국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구련성을 방어하면서 남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대적하였고 이후 ‘성경장군(盛京將軍)’에 임명된 만주 지역 최고 사령관이었다.
특이한 점은 김형진은 자신들을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들’이라 표현하여 동학농민군을 ‘의병’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왜와 수십 차례 싸움을 해서 수천 명의 왜놈을 죽이고 식량 길을 끊었으나”라는 표현도 1894년 말부터 1895년 초까지 반일을 기치로 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언급한 것이다. 편지에서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과 청국이 처한 공통의 현실과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의 전면 부정과 그들에 의한 농민군의 탄압에 대한 비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나아가 경복궁 점령 이후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격퇴를 위해 1895년 가을 추수기 이후를 기점으로 한 조선과 청국의 반일 연합군 편성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크탕가는 매우 기뻐하여 술과 고기로 융숭히 대접하고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남아서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좌우의 만류를 무릅쓰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연왕은 진동영(鎭東營)의 쉬칭장(徐慶璋)에게 공문을 보내 의논한 후 청국군이 후일 조선에 들어갈 때 서로 통할 신표를 삼고자 ‘보군도통령(步軍都統領)’과 ‘금자영기(金字令旗)’ 한 쌍을 내어주었다. 김구는 ‘의병 좌통령’의 직함을 받았다. <노정약기>에는 김형진과 김구가 쉬칭장과 결의하고 그의 배려로 진동영에서 설을 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김이언 의병 실패 직후에 돌아온 것으로 기록하여 양자 간 차이가 있으나 이후 상황으로 보면 적어도 11월 무렵에는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김형진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피신 과정에서 김구를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을미의병으로의 변신이었다. 척사위정론을 견지하던 고능선의 교화를 받은 그 역시 초기 의병의 일반적 모습과 같이 ‘소중화’ 의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제2차 중국행 시 이크탕가에게 전한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전 동학농민군에 적극 참여하였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한중 연합 의병이라는 국제적 연대의 모색 노력이 엿보인다. 김구와 김형진의 선행작업은 을미의병 종결 이후 의병장 유인석의 서간도 망명을 유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 운동의 역사에서 김형진은 상호 대척점에 있던 두 계열에 대한 큰 거리낌 없이 서로 넘나들면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차별성이 나타난다. <노정약기>는 백범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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