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눅눅하고 무더운 날들의 연속이다. 일방적인 개발논리에 포기각서를 쓴 전북의 산하, 방폐장과 새만금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 찬반논리에 '완장'을 찬 전라도의 민심… 온통 뒤숭숭하다.
'어서 햇볕이 반짝여야 하는데 채소들도 긴 빗속에 뿌리들이 녹아버렸는지 여기저기 죽은 시체들로 즐비하다. 장마철에는 하루가 다르게 풀들이 우거진다더니…'
모악산 기슭 외딴 황토집에서 고추밭을 매며, 꼬리를 까딱까딱 거리는 할미새와 개울물에 발을 담그면 반갑다고 입맞춤하는 버들치들과 노란 꽃다지 꽃을 식구 삼아 살던 마흔 여섯 총각 시인이 '모악산방'을 떠났다. '모악산 시인'으로 알려진 박남준 시인. 언제부턴가 "간다고”"가야겠다고” 곱씹던 시인은 더 깊은 정막을 찾아 경남 악양의 한 산사에 새 터를 잡았다.
전남 법성포가 고향인 그가 본래 무당집이었다던 모악산방에 몸을 기댄지 벌써 14년째. 이틀만 비워도 방안이 습기로 가득 차는 곳이지만 동치미 한 사발에 고마워할 줄 아는 그에게 더 없는 보금자리였다. 모악산도 그가 있어 더 당당했을 것이다.
'모악산 시인'은 서정만 가득한 시인이 아니다. 열혈독자라고 해도 잘 모르는 사실이 시인의 민주화운동 이력. 20대의 그는 담당형사까지 배정된 '위험인물'이었고, 민족문학과 지역문화운동의 선봉에서 깃발을 꽂았으며, 뻘밭을 막아 없애려는 무리에게 이른바'전투적 서정'을 던질 줄 아는,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활동가였다.
5일 밤 11시 도내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찾는 술집 새벽강엔 그의 지인들이 모였다. 시인은 "전주는 어미의 품안과 같은 곳이었다”고 고백하며 "이제 어미의 품에서 벗어난 것. 이제 걸을 수도 잘 하면 뛰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뜬금없는 말로 지인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어미의 품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심정은 더없이 착잡했을 터였다.
그가 전라도 땅을 떠나는 이유는 올 여름 지긋지긋했던 이 놈의 비가 모악산방과 시인에게 곰팡이 냄새를 피워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한 월간지에 새만금에 관한 '순정한' 자신의 생각을 기고한 뒤 일방적인 폭언과 협박해 오랜동안 시달려야 했다. 그것도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폭력적 '입심'은 그를 견디기 힘들게 하기에 족했다. 황당한 폭력 앞에 시인은 분노했다.
'세상은 왜이리 눈물만 나는지/속절없이 쓰러져 쓰러져 울며/당신께 보내는 나의 눈물 방울/뚝뚝, 아- 흐를 길 없는'('모악산방 일기'부분)
바짝 약이 오르기 시작한 풋고추에 속이 다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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