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상치 않은 태몽에 이어 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런데 주로 서자(庶子)로 기술된다. 그 집안이 정쟁이나 여타의 연유로 풍비박산이 나고 부모가 죽지만 아이는 다른 사람 손에 구출된다. 그리고 비범한 스승을 만나서 뛰어난 무공을 익혀서 하산을 하는데 그 스승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검이나 책자 등을 건네며너 주인공의 가족사를 알려 준다.
속세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기 가문을 몰락시킨 악당들과 대결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 배필감이 등장한다. 우여곡절을 겪은 주인공은 악당들을 물리쳐 부친의 원수를 갚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한다. 그리고 고락을 같이 한 여인네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영웅설화에서 볼 수 있는 줄거리는 대략 이러한 ‘원형’을 갖고 있다. 이는 반복된 경험이 동서고금을 통해서 보편성이 확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원형은 문학작품에서만 발견되는 거은 아니다. 신화와 종교 심지어는 개인적인 꿈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원형이 시위문화에서도 발견되는 듯하다. 정부와 지자체 혹은 지자체와 시민 등 이해관계가 다른 두 편이 처음에는 협상테이블에서 다투게 된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전되다 보면 결국 서로의 입장만을 확인하는 선에서 더 이상 논의는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 문제는 법정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다툼은 법정보다 시위현장에서 더 빨리 진행된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하지만 끝내는 폭력이 유발된다. 그리고 이런 다툼에 제 삼자가 개입하게 된다. 그리고 대립관계가 심화되다 보면 어느새 제삼자의 목소리가 민원인의 목소리보다 커지고 원래 다툼의 본질에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논리적 대치는 찾아보기 힘들다. 물리적 대치 과정에서 피차 알게 모르게 탈법과 위법이 횡행한다. 그리고 물리적 대치가 감정적 대립으로 비화되어 문제의 본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데까지 대립각을 세운다. 굳이 좋게 표현하자면 기싸움이지만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묻지마 폭력과 다를 바 없다. 흥분하기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연일 부상자, 구속자 등에 관한 기사는 줄을 잇지만 정작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충적인 보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수가 흥분해 있더라도 객관적이고 냉정한 기사를 통해서 진실을 전달하려는 언론의 자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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