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넣는 수비수' 중거리슛 명수…69·74년 킹스컵·70년 메르데카컵서 골 작렬
1970년대 '아시아에서 킥이 가장 길고 정확한 선수'로 꼽혔던 전북 출신 축구 원로 최재모(62). 1968년부터 1975년까지 8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한 최 선수의 이력은 좀 특이하다.
당시 최 선수의 포지션은 수비수. 하지만 당시 기록을 살펴보니 국제대회에서 골을 기록했다는 자료가 나온다. 1969년 11월 2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 준결승에서 한 골, 1974년 12월 15일 킹스컵에서 또 한 골을 성공시켰다.
"당시 맡은 역할은 수비수였지만 전술상 필요할 땐 공격수에도 가담하는 당시로선 흔치 않은 선수였죠. 말하자면 리베로 같은 선수였어요." 최 선수는 킥 거리가 유난히 길어 '중거리슛의 명수'란 애칭이 붙었고, 이같은 장점이 경기마다 빛을 발했다.
1970년 메르데카컵 대회가 최 선수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경기. 최 선수는 당시 이세연 골키퍼가 슬쩍 굴려준 볼을 상대팀인 인도의 골대 앞까지 정확히 날리는 초장거리포를 가동, 곧 바로 점수로 연결시키며 국민적 환호를 받았다.
김제 만경 출신인 최 선수는 어릴 적부터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뭐든 둥근 것만 보면 발길질을 해댔죠. 심지어 담장에 열린 박도 차버렸어요."
축구공조차 구경할 수 없는 최 선수는 지푸라기를 뭉쳐 친구들과 뒷동산에 올랐다. 그런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군산에 가면 축구 원로 채금석 선생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만경고 1학년인 시골 학생은 그날로 군산까지 달려가 채 원로와 함께 숙식을 해결하며 2년간 개인지도를 받았다. 영명고(군산제일고 전신)와 한양공고를 거쳐 안양 금성방직 실업팀에 몸을 담은 최 선수에게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운동선수로선 늦깎이인 최 선수가 급성장한 동력은 축구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 최 선수는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축구 수업 4년만에 한국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최 선수에게 인상 깊게 각인된 축구 인생은 일명 '실미도 축구부대'에서 활동했던 1960년대 후반. 1966년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북한을 이길 팀을 만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실미도 축구부대는 1967년 창설을 거쳐 1970년까지 이어졌다. 최 선수를 비롯 이회택·김호·조정수·이영근 등이 팀원이었고, 이들은 서울 이문동 중정 내에서 합숙하며 특수부대 같은 훈련을 받았다.
국가대표를 마친 최 선수는 자신의 스승인 고 채금석 선생(1904-1995)을 기리기 위해 1992년 송두영(전 전북축구협회 부회장)씨와 함께 '금석배 전국축구대회'를 창설했다. 이 대회는 박지성·박주영 등 한국 축구의 주역들을 길러내는 산실로 성장했다.
군산제일중 축구부, 군산제일고 축구부, 전주대학교 축구단의 창단 감독을 거친 최 선수는 1990년대 들어 유소년 축구에 관심을 쏟으며 꿈나무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최 선수의 제2의 인생은 1994년 개설된 '최재모 축구교실'과 함께 시작되었다. 왕년의 최 선수는 전주 풍남초에서 축구교실을 운영하며 축구의 저변 확대를 향해 뛰고 있다. 도내 14개 시·군에도 유소년 축구교실을 개설, 전라북도유소년축구교실 대표직을 맡고 있다.
위암으로 지난해 위 절제 수술을 받은 최 대표는 축구를 무기로 병마와 싸우고 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풍남초에서 조기축구회와 함께 운동을 합니다. 이 시간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지요." 최 대표는 축구로 꽃 피운 인생의 황혼기를 축구와 함께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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