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일대 광풍을 일으킨 정여립(1546-1589)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라는 극찬에서부터'잔인한 모반자'라는 폄하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또 그의 모반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와 날조되었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선다.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다를까.
전주 남문밖(현 색장동), 또는 동문 밖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과거에 급제한 후, 홍문관 수찬에 오른다. 박학다식하고 호방한 성품을 지녔으며 율곡 이이 등의 천거로 중앙 인물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하지만 거침없는 언변과 스승 등에 대한 비판으로 선조 임금의 눈밖에 나, 전주로 낙향한다. 금산사 아래 구릿골(동곡마을)에 살며 대동계를 조직하고, 이어 진안 죽도에 들어가 서당을 열고 활쏘기 모임 등을 이끌었다. 이때 왜구가 침입하자 대동계원 등을 데리고 왜구를 물리친다. 그의 조직은 황해도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던 중앙 정계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한때 서인이었다 동인(집권세력)에 가담한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한 것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주장한'천하는 공물인데 주인이 있을 수 있는가(天下公物論)'등은 그의 모반을 뒷받침했다.
이로 인해 그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또 3년 동안 선비 1000여 명이 처형당했다. 대부분 동인과 호남출신이었다. 역사는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 이름 붙였다. 당시 이 사건은 조선 전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었다. 말이 1000여 명이지 지금으로 치면 야당과 학계인사 등 반대세력의 씨를 말린 것이다.
또 그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오랫동안 이름 석자를 입에 올리는 것도 금기시되었다. 그러니 기록이 남아 있을리 만무다. 결국 후세 사가들은 파편화된 언행을 퍼즐 맞추듯 맞추며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호남은 반역향으로 몰리고 인재 등용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나아가 조선 전체가 인재고갈과 선비정신의 후퇴로 활력을 잃었다.
정여립 사건은 고려때 훈요십조와 이중환의 택리지 등과 함께 호남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제공한 뿌리로 작용해 왔다.
마침 전주역사박물관에서'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앞으로 더 많은 조명이 있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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