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손병희 세력과 큰 연결고리 없이 기포 / 유족회 '일본인 미화' 처형지 안내문 교체 주도 / 농민군 후손 문원덕 선생, 추모탑 건립 등 헌신
살아남은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
“올라온다! 일본군이 올라온다!”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총소리가 이어졌다.
일방적인 화력이었다.
최후까지 맞서 싸우리라 다짐했던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하나하나 총에 맞아 죽거나 끌려가 참혹하게 살해됐다.
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은 그렇게 피로 물들어야 했다.
△내포 지역에 동학이 전래되다
내포 지역은 지금의 충남 서북부, 즉 태안·서산·당진·홍성·예산 등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중환이 택리지에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고 언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내포 지역이라 해도, 조선 말기 사회의 모순은 피할 수 없었다. 수탈과 학정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1890년, 최형순이라는 사람이 동학 교주 최시형을 찾아 입도한 뒤 태안 지역에 동학을 퍼뜨렸다. 최형순과 함께 박희인이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으며, 불과 3년여 만에 내포 지역에서 동학은 상당한 위세를 구축하게 됐다.
△봉기, 그리고 실패
갑오년에 전라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고, 내포 지역에서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봉기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1차 봉기 기간에는 커다란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바뀌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는 남접의 2차 봉기가 이뤄졌다.
1894년 10월 1일, 농민군은 태안 원북 방갈리에서 기포했다.
이 때 기포한 농민군은 전봉준 등이 이끈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과 최시형·손병희 등의 북접 세력과는 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 자생적·독립적인 군세였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말했다.
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잡아 죽이고 갇혀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한 농민군은 이어 서산, 해미 등을 석권하고, 기세를 몰아 홍주성(지금의 홍성) 공격에 나섰다.
그리고 농민군은 대패했다. 비록 내포 지역을 석권하면서 기세가 올랐다지만,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성 안에서 굳게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진격로를 따라 다시 그대로 쫓겨간 농민군은 태안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지금 추모탑과 전래비,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잡혔음을 알리는 비석이 있는 백화산 자락이 그들의 마지막 자리였다.
“냇물 흐르는 거 아까 보셨죠? 여기가 전부 피로 물들었다고.”
△교장바위, 혹은 교살바위
추모탑과 전래비 뒤편에는 바위 봉우리가 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잡아 참혹하게 죽이던 곳이 바로 그 바위였다.
“그 당시에 일본군이 여기서 공개처형을 한 거예요. 그래서 교살바위라고 했지.”
교살바위라는 말의 어감이 너무 섬뜩해서였을까? 지금은 교장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장살’, ‘장형’이라는 말에 쓰이는 ‘지팡이 장’자를 쓰는데, 안내문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정류소에 돌을 던지던 조선인 어린이들을 감싸주며 그 아이들과 바위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는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의 일화가 적혀 있었다. 그 교장의 인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교장바위’가 됐다는 것.
“물론 그것도 역사지만, 일본인을 기리는 내용이 안내판에 있으니까 좀 그렇잖아요. 동학 관련 내용은 빠져 있고….”
문영식 선생은 이 때문에 태안군에 민원을 여러 차례 넣었단다.
이에 대해 태안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동학 관련 내용을 담은 새로운 안내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조만간 교체 예정이라고 답했다.
△태안 지역 기념사업 현황
내포 지역, 그 중에서도 태안 지역은 동학 교세가 대단했고, 혁명의 열기는 전라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전라도 이외 지역 중에서는 태안 지역의 동학 관련 기념사업이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으며, 정리된 자료도 방대하다.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군 관련 자료들은 대부분 문 회장의 아버지인 문원덕 선생이 밝혀낸 것들이다. 특히 1965년에 작성된 ‘순국 혁명군 명단 288인’ 기록물은 국가기록물로 인정돼, 후에 동학농민군 유족 인정 관련 자료로서 요긴하게 활용됐다.
1978년 세워진 추모탑 역시 문 선생의 작품이다. 관의 주도로 세워진 다른 지역의 기념물과는 달리, 선생이 설계부터 모금까지 발로 뛰어가며 완성시켰다.
문 선생이 이처럼 헌신적이었던 것은, 그가 바로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문장로 접주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영식 회장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주도해오고 있다.
“동학 정신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목표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기념관 건립 사업을 잘 매듭짓는 것. 태안군은 이번 주부터 건립 준비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를 제대로 해내는 것이 일단의 목표란다.
또 하나는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에 기념물을 세우는 것.
현재 기포지에는 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문원덕 선생이 생전에 그 자리에 기념탑을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유지를 잇고 싶다는 것이었다.
“발전소 내에라도 조형물을 세우려고 여러 번 찾아갔어요. 그런데 ‘좋다, 세워주겠다’고 약속을 받아도 이 사람들이 자꾸 바뀌고 발령이 나니까 또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하고….”
이에 대해 태안화력발전소 측에 문의한 결과,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 태안 지역의 다른 유적들 - 농민군 처참하게 쓰러져간 '목네미샘'
내포 지역 항쟁의 중심지였던 만큼, 태안에는 유적도 많이 남아있다.
농민군이 습격했던 태안 관아는 백화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있다. 관아 자체는 없어졌지만, 경이정이라는 건물은 기념사업회 사무실 바로 근처에 남아 있다.
이원면 사창리에는 목네미샘이라는 곳이 전해진다. 이곳은 1894년 11월 일본군의 토벌작전 당시 농민군이 처형당했던 장소다.
일본군은 큰 작두에 농민군의 목을 놓고, 다른 농민군에게 서로 밟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농민군의 목 넷이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목네미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서산 지역에서는 1차 봉기 기간에 이 지역 최초 봉기가 있었던 원벌 집결지와 2차 봉기 당시 농민군이 공격했던 서산 관아가 대표적인 유적지로 전해져오고 있다.
또 당진 지역에는 승전곡 전투지가 있다. 1894년 10월 24일 2만여명의 농민군이 지형을 활용한 전술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곳으로, 이후 농민군은 홍주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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