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동학농민군들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내걸었던 폐정개혁안의 일부 내용이다.
반봉건 개혁의지를 천명한 동학농민군이 떨쳐 일어선지 한 달 여.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장악하며 파죽지세로 올라와 전주성을 함락한 것은 1894년 4월 27일(음력)이었다. 황토재와 황룡촌 전투의 승리에 이어진 전주성 함락은 그야말로 농민군의 쾌거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남쪽에서부터 뒤를 쫓아온 관군 홍계훈 부대와 벌인 접전에서 농민군은 패하고 말았다. 첫 싸움이 벌어진 4월 28일부터 큰 피해를 입은 농민군은 5월 3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대포로 무장한 관군의 위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패전의 타격은 컸다. 소년장수로 불렸던 이복용이 죽음을 맞았고, 지도자 김순명을 잃었으며 전봉준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더 이상의 결전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농민군은 어떤 식으로든 상황을 돌파해야만했다.
큰 승리를 거둔 관군도 입장이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농민군의 위압적인 기세를 막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 군대 출병을 요청하자 그에 맞서 일본군까지 출병하면서 외국군대 주둔의 외세 의존이라는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까닭이다.
서로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열세에 놓였으면서도 의기충천해있던 농민군은 관군과 협상(혹은 타협)에 들어갔다. 드디어 5월 8일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다. 협상의 결과다.
폐정개혁안을 이끌어 낸 ‘전주화약’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이루어졌던 협상과 그 내용이 실행된 과정을 이른다. ‘화약’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이 있지만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 혁명의 실질적 결과물인 폐정개혁안과 관민통치와 농민통치를 실현한 집강소 설치를 이어냈다는 점, 농민군과 정부가 외세(청과 일본)를 몰아내야 한다는 것에 뜻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절대적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전주화약일’이 추진된다. 기념일 제정 추진위는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5월 7일과 타협안이 실행에 옮겨진 8일 중 연구자 대다수가 받아들이고 있는 8일을 택했다.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전주화약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합의에 앞세워질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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