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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4)숙빈 최씨와 영조의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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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 전경사진과 드론사진, 오른쪽 위에 청와대 전경이 보인다./사진=문화재청 제공

청와대가 개방되었다. 연일 관심이 뜨거운 청와대는 역사성과 장소성이 특별한 곳으로, 고려시대 남쪽 수도인 남경 궁터의 흔적을 품고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굴곡진 일제 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12명의 대통령이 업무를 보고 생활해 대통령궁으로도 불렸다.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러 장장 천여 년의 시간이 중첩된 장소인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그 서편에 자리한 칠궁도 주목받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고도 왕비가 되지 못한 7명의 후궁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 다음으로 큰 사당이다. 칠궁에 모셔진 후궁들은 살아있을 때 왕비도 못되었고, 죽어서도 왕의 곁에 묻히지 못했지만 낳은 왕자가 왕이 되었으니 외로웠으나 성공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왕실의 암투에 전전긍긍한 인생을 살았을까.

원래 칠궁은 영조(1694-1776)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로 알려진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인 ‘숙빈묘’였다. 무덤을 지칭하는 묘(墓)가 아닌 사당을 지칭하는 묘(廟)로 숙빈묘는 이후, ‘상서로움을 기른다’란 뜻의 이름을 받고 ‘육상(毓祥)묘’로 고쳤다가 ‘육상궁’으로 격상되었다. 영조는 육상궁에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현판을 내리며 자주 들러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기렸다. 영조 재위 시절 200여 번 정도 육상궁을 방문했다 하니 영조의 효심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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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필 육상묘도/사진=문화재청 제공

그 옛 모습은 현재 칠궁 내 우물 냉천에 남긴 영조의 시구와 영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던 냉천정 등이 남아 있으며,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739년에 그린 <육상묘도>에서는 육상궁의 초기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데 홍살문과 초가의 건물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고, 육상묘 신위 봉안에 참여한 18명의 관원 명단이 상단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연우〉에서는 초가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하지만, 영조의 정성이 무심하게도 육상궁은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추존 왕인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위를 모신 연호궁이 육상궁에 옮겨와 함께 있다. 점차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덕안궁(순헌 귀비 엄씨)이 옮겨오고 조성되면서 칠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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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궁과 육상묘 현판

칠궁이 원래 육상궁이었다고 하나 실제 가보면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 새겨진 현판이 연호궁 현판 뒤에 걸려 있다. 가려진 듯 보이는 위치에 육상묘로 남아 있는 현판을 보자면 괜히 마음이 씁쓸한데 죽어서까지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시고 있는 정빈 이씨가 안쓰럽고 육상궁의 현황을 보면 영조의 억장도 무너질 것 같다.

조선왕조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 자리를 지킨 영조는 왕위에 오른 내내 숙빈 최씨의 지위를 격상시키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지만, 어머니 숙빈 최씨가 궁중 나인출신이어서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한다. 숙빈 최씨는 7세 때 입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궁 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의 후궁이 된 후 기록은 왕자를 출산한 호산청 일기 등 자세한 사료들이 남아 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알려져 있다. 훗날 영조가 된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귀인’이 되었으며, 단종이 복위 되었을 때 ‘숙빈’으로 승급되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세상을 뜨자 왕비가 될 수 있었지만, 희빈 장씨의 폐해에 지친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서는 안된다’고 내린 법령에 따라 왕비도 못되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머니의 지난날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궁중 나인으로 일을 할 때 누비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의 손주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서린 한을 풀어냈다면, 영조는 고생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기리며 사모곡을 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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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소령원​​​​

영조는 숙빈묘를 육상궁으로 격상시킨 것처럼, 파주에 있는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높여 고쳐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숙빈 최씨의 아버지인 최효원(1638-1672)을 영의정으로 어머니 남양 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또한, 숙빈 최씨의 생가가 서울 세종로 일대인 여경방 서학동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반면,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담양과 장성 일대 그리고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생가가 있는 정읍에 신분상승 꿈을 이룬 최복순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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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군지와 고지도/사진=정읍시 제공

최복순은 어린 시절 숙빈 최씨 이름인데 어린나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숙빈 최씨가 담양의 용흥사에서 기도를 올려 왕자를 낳는 꿈이 이루어져 용흥사에 은혜를 갚아 번창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대각교에서 귀인인 인현왕후의 가족을 만나 훗날 궁에 들어가 소원을 이룬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정읍에는 그 만남을 기념하는 ‘만남의 광장’도 있다. 하지만,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칠궁의 세월을 묵묵히 품고 있는 오래된 나무에 기대니 지나는 바람에 영조의 애절한 사모곡이 실려 오는 듯하다. 가만 눈을 감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구중궁궐을 지나 삼남대로 옛길의 한 모퉁이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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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 전경사진과 드론사진, 오른쪽 위에 청와대 전경이 보인다./사진=문화재청 제공

청와대가 개방되었다. 연일 관심이 뜨거운 청와대는 역사성과 장소성이 특별한 곳으로, 고려시대 남쪽 수도인 남경 궁터의 흔적을 품고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굴곡진 일제 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12명의 대통령이 업무를 보고 생활해 대통령궁으로도 불렸다.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러 장장 천여 년의 시간이 중첩된 장소인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그 서편에 자리한 칠궁도 주목받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고도 왕비가 되지 못한 7명의 후궁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 다음으로 큰 사당이다. 칠궁에 모셔진 후궁들은 살아있을 때 왕비도 못되었고, 죽어서도 왕의 곁에 묻히지 못했지만 낳은 왕자가 왕이 되었으니 외로웠으나 성공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왕실의 암투에 전전긍긍한 인생을 살았을까.

원래 칠궁은 영조(1694-1776)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로 알려진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인 ‘숙빈묘’였다. 무덤을 지칭하는 묘(墓)가 아닌 사당을 지칭하는 묘(廟)로 숙빈묘는 이후, ‘상서로움을 기른다’란 뜻의 이름을 받고 ‘육상(毓祥)묘’로 고쳤다가 ‘육상궁’으로 격상되었다. 영조는 육상궁에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현판을 내리며 자주 들러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기렸다. 영조 재위 시절 200여 번 정도 육상궁을 방문했다 하니 영조의 효심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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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필 육상묘도/사진=문화재청 제공

그 옛 모습은 현재 칠궁 내 우물 냉천에 남긴 영조의 시구와 영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던 냉천정 등이 남아 있으며,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739년에 그린 <육상묘도>에서는 육상궁의 초기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데 홍살문과 초가의 건물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고, 육상묘 신위 봉안에 참여한 18명의 관원 명단이 상단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연우〉에서는 초가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하지만, 영조의 정성이 무심하게도 육상궁은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추존 왕인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위를 모신 연호궁이 육상궁에 옮겨와 함께 있다. 점차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덕안궁(순헌 귀비 엄씨)이 옮겨오고 조성되면서 칠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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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궁과 육상묘 현판

칠궁이 원래 육상궁이었다고 하나 실제 가보면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 새겨진 현판이 연호궁 현판 뒤에 걸려 있다. 가려진 듯 보이는 위치에 육상묘로 남아 있는 현판을 보자면 괜히 마음이 씁쓸한데 죽어서까지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시고 있는 정빈 이씨가 안쓰럽고 육상궁의 현황을 보면 영조의 억장도 무너질 것 같다.

조선왕조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 자리를 지킨 영조는 왕위에 오른 내내 숙빈 최씨의 지위를 격상시키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지만, 어머니 숙빈 최씨가 궁중 나인출신이어서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한다. 숙빈 최씨는 7세 때 입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궁 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의 후궁이 된 후 기록은 왕자를 출산한 호산청 일기 등 자세한 사료들이 남아 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알려져 있다. 훗날 영조가 된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귀인’이 되었으며, 단종이 복위 되었을 때 ‘숙빈’으로 승급되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세상을 뜨자 왕비가 될 수 있었지만, 희빈 장씨의 폐해에 지친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서는 안된다’고 내린 법령에 따라 왕비도 못되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머니의 지난날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궁중 나인으로 일을 할 때 누비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의 손주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서린 한을 풀어냈다면, 영조는 고생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기리며 사모곡을 불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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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소령원​​​​

영조는 숙빈묘를 육상궁으로 격상시킨 것처럼, 파주에 있는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높여 고쳐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숙빈 최씨의 아버지인 최효원(1638-1672)을 영의정으로 어머니 남양 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또한, 숙빈 최씨의 생가가 서울 세종로 일대인 여경방 서학동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반면,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담양과 장성 일대 그리고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생가가 있는 정읍에 신분상승 꿈을 이룬 최복순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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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군지와 고지도/사진=정읍시 제공

최복순은 어린 시절 숙빈 최씨 이름인데 어린나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숙빈 최씨가 담양의 용흥사에서 기도를 올려 왕자를 낳는 꿈이 이루어져 용흥사에 은혜를 갚아 번창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대각교에서 귀인인 인현왕후의 가족을 만나 훗날 궁에 들어가 소원을 이룬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정읍에는 그 만남을 기념하는 ‘만남의 광장’도 있다. 하지만,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칠궁의 세월을 묵묵히 품고 있는 오래된 나무에 기대니 지나는 바람에 영조의 애절한 사모곡이 실려 오는 듯하다. 가만 눈을 감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구중궁궐을 지나 삼남대로 옛길의 한 모퉁이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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