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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9)탑천과 만경강이 만나는 자리

“저문 날 물가에 앉아 추억을 찾아낸다. / 생각도 하나하나 낚아서 챙겨놓고 / 구름도 바람도 듬뿍 한 망태기에 담아야지. / 늦도록 잊고 산 사람 바람처럼 찾아오면 / 그 무슨 그리움 하나 등불처럼 걸어놓고 / 강물은 추억으로 넘치거라 바람으로 울거라." 만경강과 탑천이 만나는 곳에 새겨진 시구이다. 시심이 어우러진 쉼터 이름이 ‘옴서감서’이다. 옴서감서는 전라도 방언으로 ‘오며 가며 드나든다’란 것인데, 만경강 물길따라 오며 가며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만경강이 휘돌아 흐르는 곳은, 물억새와 갈대가 아득하게 이어져 노전백리(蘆田百里)를 이룬다. 시구처럼 노을빛이 강물에 내릴 때 즈음 찾아가면, 은빛 물결 일렁이는 사이로 늦도록 잊고 산 사람이 불현듯 나타날까. 옴서감서 쉼터가 자리한 곳은 군산시 대야면이다. ‘대야(大野)’는 지명 그대로 평야 지대인 ‘넓은 들’에서 유래된 고장이다. 삼한시대 마한 땅으로, 백제시대에 마서량현, 조선시대에는 임피현이었다. 1914년 옥구군 대야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면서 군산시 대야면이 되었다. 군산 개항 전 만경강에 둑을 쌓기 전까지는, 백마산까지 배가 닿아 ‘배 닿을 메(山)’라 하여 ‘배달메’라 불린 곳이다. 1921년 개교한 대야초등학교의 교가 1절 시작이 “백마산 푸른 줄기 노령의 기상”이고 2절이 “만경강 젖어가는 옥야천리에~ 사랑과 희망에 찬 대야의 낙원”이다. 100년이 훌쩍 넘는 학교의 교가에 대야의 산과 강 그리고 너른 옥토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대야에는 천년 세월을 품고 옛 절터에 홀로 담담하게 서 있는 석탑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탑동 삼층석탑’이다. 백제 석탑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고려시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5.5m에 이르는 탑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지녔다. 탑신부는 여러 돌이 짜임새 있게 잘 맞추어져 있는데, 1층 몸돌은 높고 2층과 3층의 몸돌은 낮다. 기단 위에 3층의 몸돌, 지붕돌, 머리 장식이 올려진 상태로 얇은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지금은 탑골이라 불렸던 ‘탑동마을’ 이름도 석탑에서 유래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의 자랑이자 마음을 다독였을 탑이다. 잘생긴 탑을 마을에서는 토박이탑 ‘여장군탑’이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탑에는 특별한 내기 전설들이 전해진다. 백제시대 서로 흠모하던 총각 장군과 처녀 장군이 장난삼아 탑 쌓기 내기를 하였다. 처녀 장군은 탑동에 삼층석탑을 쌓고, 총각 장군은 다른 고장에 오층탑을 쌓았는데 처녀 장군이 먼저 쌓았다고 한다. 총각 장군의 허술한 탑 쌓는 실력에 실망한 처녀 장군이 인연을 끊고, 혼인하지 않은 채 삼층탑의 수호신이 되어 여장군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탑을 무너뜨린 내기와 관련된 ‘골샘 약수’의 전설이다. 탑골에 탑을 쌓은 여자장수와 인근 장자골에 탑을 쌓은 남자장수가 상대가 세운 탑을 두 손가락으로 무너뜨리는 시합을 해서 여자장수가 이겼다는 것이다. 이때, 힘을 준 남자장수 손가락 자국이 탑골 삼층석탑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무너뜨린 탑의 저주를 받아서인지 여자장수의 어머니가 지독한 피부병에 걸린다. 병이 심해지자 여자장수가 석탑에서 지성을 다해 백일기도를 드렸더니, 백발노인이 나타나 “골샘 약수를 먹이라”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병이 완치되었고, 골샘약수터는 피부병에 효험있는 명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골샘 약수’는, 탑동 삼층석탑 아래 안내판까지 설치된 마을 명물이 되었다. 이곳 마을을 지나는 하천도 ‘탑동 삼층석탑’에서 유래되어 ‘탑천’이라 불린다. 탑천은 익산 미륵산과 용화산 남쪽 비탈면에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와 대야를 적시고 만경강으로 합류하여 새만금에서 서해로 흘러간다. 대야 일대 만경강 유역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들어오는 곳이다. 그렇다 보니,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바닷물 유입을 막는 갑문을 만들어야 했다. 갑문 만들기에 적절한 만경강과 탑천 합류 지점에 ‘입석배수문’을 일제 강점기 1935년(소화 10년) 7월에 준공했다. 입석배수문이 노후되자 현대시설을 갖춘 배수갑문을 새로 설치했다. 오랜 풍파를 겪은 옛 입석배수문은 곳곳에 깨진 유리창과 콘크리트에 세월의 더께가 쌓인 채 만경강가에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배수갑문과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배수갑문이 함께 있다 보니, 만경강 유역의 배수갑문 변천과 역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세월 그대로 강변 풍경이 된 지 오래지만, 한쪽에 방치된 채 있어 아쉽다. 그 모습까지도 모두 품은 옴서감서 쉼터 주변은 만경강 낚시명소로 강태공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그래서인지 낚시꾼들로 몸살을 앓는다. 하지만, 만경강은 노랑머리 저어새와 천연기념물 황새가 찾는 수많은 생명을 품은 강이다. 겨울바람이 흘러가는 만경강에 기댄 풍경들을 바라본다. 오며가며 쉬어가는 것은, 사람 뿐 아니라 흔적을 남기는 모든 생물들이다. 이곳이 사람과 자연이 서로를 품고 쉼을 내어주는 추억의 자리로 오랫동안 이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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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1.30 15:5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8)왕의 흔적이 깃든 자리

조선 왕실은 왕손이 태어나면 태(胎, 태반과 탯줄)를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胎室)에 봉안했다. 생명을 키운 태는 소중하게 다뤄져 명산에 모셨고, 왕실의 뿌리가 길지에 안착하는 것을 해당 지역에선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 흔적은 우리나라 곳곳에 태봉산을 비롯하여 태실과 태봉(胎峯) 그리고 태장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완주 구이면에도 태봉과 태실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전주 경기전으로 옮겨지기 전, 예종의 태실이 모셔진 곳이었다. 태는 어머니와 태아를 연결하는 신성한 의미로 여겨 민간에서도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고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태를 땅에 묻는 관습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제사를 지낸 태령산(胎靈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전해진다. 왕실에서는 안태(安胎) 의식을 철저하게 시행하며 의궤로 제작했다. 의궤의 기록과 그림을 통해 규모와 모양 제를 지낸 상황을 접할 수 있다.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산실 안에 미리 보아둔 좋은 방향에 안치하고, 정결한 물로 씻는 세태(洗胎)의식을 행했다. 태를 묻을 석실을 먼저 만들고 큰 항아리에 태를 넣은 작은 항아리를 담아 석실에 묻었다. 이중으로 봉한 항아리를 돌함에 넣어 태의 주인과 묻은 날짜를 쓴 태지석을 석실에 함께 넣어 안장했다. 조선 시기에는 태실 조성에 좋은 땅을 미리 찾도록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를 지방에 파견하였다. 태실 후보지를 찾아 전국을 다닌 태실증고사는 그 길함의 정도에 따라 후보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왕위 계승 가능자인 원자와 원손은 1등 태봉에 왕비 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 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인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했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을 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금표(禁標)를 세웠다. 왕의 태봉은 1등급으로 300보, 대군의 태봉은 2등급으로 200보, 왕자의 태봉은 3등급으로 100보로 정하였다. 금표 안에서는 나무를 벌목하거나 농사를 짓는 행위를 금하였으며, 금지 구역에 속한 집이나 밭은 보상해주고 철거하였다. 태봉은 명당으로 알려져 조상 묘를 쓰려는 시도가 많아 태실 관리를 위한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하게 보호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의 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그러다, 금표로 인한 불편과 관리 비용을 지역에서 부담하는 등의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대궐 내 정결한 곳에 장태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로 인해 성종의 태실은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 왕실의 태실은 국운과 연결해 정성껏 관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훼손되게 된다.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정기를 훼손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태실 유물 수탈을 위해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모았다. 전국의 왕과 왕실 가족의 태실 54기가 발굴되어 유린되었고, 이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일제에 의한 뼈아픈 조선 왕실의 훼손 흔적이 서삼릉에 모여있게 된 것이다. 구이면에 자리했던 예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1578년(선조 11년)에 이어 1734년(영조 10년)에 거듭 고쳐 봉안되었다. 예종의 태실 조성이 늦어진 것은 예종이 왕자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 2년 뒤에 형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1460년 그의 나이 11세에 16세의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다. 다음 해, 예종은 인성대군을 얻어 조선 국왕 중 최연소 아버지로 기록된다. 하지만, 세자빈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만인 1469년 의혹을 남긴 채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전주 경기전으로 1970년에 옮겨 자리해 있고, 태실 유물인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누어 소장되어 있다. 자손에게도 업보를 남겨주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태실은 어디에 자리했을까. 세종의 왕자이니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금성대군 안평대군 등 형제 태실은 물론이고 단종의 태실이 있는 성주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흔적만 남은 구이면의 태실마을에는 태봉의 이름을 지닌 야산을 비롯하여, 태실교와 태봉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왕의 태실이 있던 명당으로 소문나서 인지 길가에는 “불법 묘지 조성을 절대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외지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태실 자리 초입에는 “이곳은 조선 8대 예종의 태를 묻었던 곳으로 태실이라고도 한다”는 낡고 작은 안내판이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귀하게 모셔졌으나 무상한 세월에 그 주변은 쓸쓸함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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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10.26 15:5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7)조선에 남은 하멜 요리사 얀 클라슨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디서 오는 길인가?” “우리는 화란인이며 코레아에서 오는 길입니다” 1666년 9월 14일, 조선 탈출에 성공한 네델란드 선원 하멜 일행 8명이 나가사키 관리에게 심문받으며 답변한 말이다. 본국인 네델란드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은 표류한 이유와 당시의 현황 그리고 조선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름·나이·항해할 당시 직책과 거주하는 장소까지도 최선을 다해 답변하였다. 남원에는 요리사 얀 클라슨(Jan Claeszen, 49세)을 비롯하여 헨드릭 코넬리슨(Hendrick Cornelissen, 37세)과 요하니스 람펜(Johannis Lampen, 36세) 3명이 남아있고, 순천에 조타수 야콥 한스를 포함한 3명 그리고 여수 좌수영에는 포수 산더 바스켓을 포함 2명이 남아있다고 『하멜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조선을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하멜표류기』의 일부이다. 하멜 일행이 표류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행적이 자세하게 전해진 데에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네델란드 본사에 <항해일지> 등을 기록해서 보고 해야만 하는 직책인 ‘서기(書記, 회계사 겸)’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653년 하멜 일행은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7월 30일 지금의 대만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났다. 악전고투 끝에 암초에 좌초되어 제주도에 표착한 날이 8월 16일이었다. 선원 64명 중 선장을 포함한 28명이 죽고 36명이 살아남았는데, 당시 하멜은 23살이었고 훗날 1666년 탈출할 때 나이는 36살이었다. 조선 땅에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생존자들은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묻어주며 조선에서의 ‘13년 28일’ 중 첫날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파도에 떠 밀려온 생필품을 살펴보고 밀가루와 고기 베이컨이 들어있는 상자와 와인 상자를 발견했지만, 불이 없어 요리하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텐트를 만들어 비를 피하고 있는데 세 명의 현지 사람이 나타나 화승총으로 위협해 불을 얻어내었다. 아마 그때 첫 요리를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그 요리사가 ‘얀 클라슨’일 확률이 높지만, 기록에는 없다. 그들은 좌초한 곳이 일본 부근일 것이라는 생각했으나, 그들을 포위하고 억류한 사람들의 옷차림이 일본이나 중국과 달라 어딘지 알 수 없었다가 제주임을 알게 된다. 제주도 사람들은 점차 하멜 일행을 관대하게 대했으며 지닌 음식이 베이컨과 고기뿐임을 알고, 너무 굶주린 상태에 많이 먹으면 탈이 날 것을 염려해서 쌀죽을 조금씩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와인을 맛보고는 무척 만족해했다고 하며, 이후 숙소로 옮겨와 심문받을 때도 외출을 허락해 점차 반찬 요리도 해 먹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10월 29일 벨테브레이(J.J. Weltevree)라는 조선으로 귀화한 네델란드인 박연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음료수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상륙하였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여 귀화한 사람이었다. 박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과 맞서 싸운 조선의 군인이었다.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총포 제작과 조작법을 지도하며 포로들을 감시하고 통솔한 자로, 하멜 일행의 통역을 위해 제주에 내려가 대면하게 되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겠는가?” 그가 누군지 제주 목사가 묻자, “우리와 같은 화란인”이라 대답하자 제주 목사는 웃으며 “틀렸다. 이 사람은 코레시안(Coresian, 조선인)이다”라고 했다. 하멜 일행의 제주도 표류와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윤행임(1762-1801)의 문집 『석재고(碩齋稿)』에는 “박연은 그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뒤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자기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제주에서의 10개월을 보낸 뒤 왕명을 받아 박연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와 훈련도감에 배치된 하멜 일행은 조선군 신분이 된다. 하지만, 일행 중 두 사람이 청나라 사신을 만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쫓겨나게 된다. 유배 가는 길에 배웅나온 박연과 마지막으로 보고, 1656년 강진의 전라병성에서 담장을 쌓으며 잡초를 뽑고 주변을 정비하는 노역을 하며 고향으로 갈 희망 없는 삶을 살게 된다. 현재 강진 병영성 인근의 천연기념물 성동리 은행나무는 하멜의 기록에 등장한 나무라하며 주변의 특별한 마을 돌담은 그들의 흔적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그곳에서 하멜 일행은 7년 동안 22명이 남는다. 그러다 기근이 심해지자, 12명은 여수로 5명은 순천으로 5명은 남원으로 각각 이송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여수에 있던 8명이 탈출에 성공하고, 죽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2년 뒤 1668년 일본으로 송환된다. 그런데, 그중, ‘남원에 살던 요리사 출신인 얀 클라슨’은 송환을 거부하고 조선에 남았다. 네델란드에 도착한 하멜은 억류 기간 못 받은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동인도 회사에 보고용으로 기록한 항해일지를 기반으로 <하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것이 1668년 책으로 출간되어 인기를 끌게 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조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에 연재된 것을 최남선이 발견하여 『청춘』 6월호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하멜표류기』로 출판되었다. 하멜 일행은 남(南)씨 성을 나라에서 하사받았고 강진에는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후손들이 있었다고 하나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위해 남원에 남았던 요리사의 흔적은 더욱 묘연하다. 오래전 이국적인 모습의 사람이 조리한 서양 음식의 흔적이 남원에 아직 남아있을까? 그 마음과 자취를 따라 가을날 사랑이 깃든 남원으로 특별한 맛 기행을 떠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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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9.28 15:3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6)무주 치목마을의 삶을 엮는 길쌈

무주 적상산 동남쪽 적상산성으로 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수림이 특별한 풍경을 자아내는 치목(致木)마을이 있다. 치목마을은 옛 전통 그대로 길쌈을 하며 삼베를 짜는 집이 많아 ‘삼베마을’로도 불리는 고장이다. ‘길쌈’은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것으로,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한 그림과 문헌 및 유물에 그 흔적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일반 부녀자들은 농사일이 끝나면 저녁 밥상을 차린 후 베틀에 앉아 새벽까지 길쌈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길쌈하던 윗세대 모습은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섬유산업이 발달하면서 어렴풋한 기억과 기록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 길쌈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당나라로 모시를 보낸 기록과 『삼국사기』에 추석의 다른 명칭인 가배의 유래와 더불어 전해진다. 신라 유리왕 9년(32년) “왕의 딸 2명으로 하여금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 음력 7월 16일부터 길쌈을 하게 하여 한 달이 된 8월 15일에 승부를 가렸는데, 진 쪽이 이긴 쪽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온갖 놀이를 하는 것을 가배(嘉俳)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팔월 대보름 추석을 한가위 혹은 가배라고 칭하는데 길쌈을 장려하며 ‘가배’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월 칠석 전설의 여주인공도 옥황상제의 딸이자 베를 짤 짜 이름마저도 직녀(織女)였다. 신라의 공주도 편을 갈라 길쌈을 한 것처럼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옷을 짓는 것은, 의생활을 담당한 여성들의 삶 속에 오랫동안 지속된 풍습이자 몫인 셈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견우와 직녀가 함께 있는 모습과 직녀로 추정되는 여인이 베틀에 앉아 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왕과 왕비가 칠석날 궁에서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기록으로는,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고려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고려는 모시와 삼을 스스로 심어 많은 사람이 베옷을 입는다”란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공민왕 13년(1364년)에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면서 무명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길쌈은 남성들의 농사일과 함께 농가의 중요한 소득원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직조 노동인 길쌈의 결과로 나온 포목은 화폐처럼 통용되어 교환가치를 가졌고 국가의 조세로도 쓰이며 가계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 시기 군역을 지는 대신 내는 군포는 1명당 2필인데, 군역이 면제되는 양반을 제외하고 16세에서 60살까지의 남자는 군포를 내야 했다. 대가족을 꾸리던 당시 집안에 성인 남성이 5명이 있었다면 10필을 내야 했으니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군정이 문란해질 때면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강제 징수했다. 갓 태어난 새 새끼의 입 주위가 노란 것을 어린아이에 빗대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고 했고, 이미 죽은 이에게도 체납을 구실로 징수를 강행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로도 불리었다. 게다가 군포를 못 내고 도망을 간 경우가 생기면 이웃과 친족들에게 징수하기도 했으니, 가족을 입히는 것 외에도 세금을 내기 위해 했던 여성의 길쌈 노동은 무척 고단했다. 무슨 일이든 반복해서 몸에 푹 밴 것을 “이골 난다”라고 하는데, 길쌈의 거친 과정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수확한 삼이나 모시를 손질해 한 올 한 올 실로 삼기 위해서는 손톱으로 가르고 이(齒)로 째게 된다. 한 올씩 입술과 치아를 사용하여 삼는다고 하는데 이를 계속하게 되면 이에 골이 파여 생긴 말이다. 고단함과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베틀가를 부르고 놀이도 함께 하면서 ‘내방문화’가 전해지고 ‘길쌈 두레’와도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또한, 길쌈한 삼베는 지방에 따라 경북 안동산을 ‘안동포’, 경북산을 ‘경포’, 함경도산을 ‘북포’, 전남 곡성산을 ‘돌실나이’라고 불렀다. 삼베 길쌈은 봄에 파종하여 여름에 수확하는 재배와 거두고 삶아서 껍질을 벗겨 실을 뽑고 짜는 등 수십 번의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이제는 보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치목마을은 집집마다 삼을 재배하고 길쌈을 이어온 마을이다. 1988년 손순임(1950년생) 부녀회장을 중심으로 공동작업을 하다 2011년 영농조합이 만들어져 전통 길쌈 방식을 잇고 있는데, 최근 ‘삼베짜기’가 전라북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되는 경사를 맞았다. 치목마을에서 오랜 세월 삼베를 짜온 김영자 어르신(1937년생)은 어린 시절부터 친정어머니가 길쌈하던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레 배웠다고 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친정어머니가 지어주신 10여 벌의 옷을 혼수로 해서 이웃 마을로 시집와서 줄 곳 길쌈을 했다. “젊었을 때 어찌 살았는지 모르겠소. 농사지으며 애덜 키우고 길쌈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해요. 내가 만든 수의를 남편에게 입혀 보내고 내가 입고 갈 수의도 마련해 놓았어요. 길쌈이란 것이 특별한 게 아니요. 예전엔 다들 옷 짓는 게 당연한 일이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이도 무릎도 망가졌지만, 그래도 길쌈해서 살림에 보태고 애들 학비 내줬어요”라며 길쌈과 함께한 그녀의 삶을 이야기했다. 질곡의 삶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어르신의 담담함이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을 떠올리게 한다. 고단함과 보람을 한 올 한 올 엮으며 이뤄낸 그 모든 여정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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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24 14:1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5)우영우 팽나무 vs 수동리 팽나무와 마을 숲

“어린 시절 저 나무 타고 안 논 사람이 없고, 기쁜 날 저 나무 아래에서 잔치 한 번 안 연 사람이 없고, 간절할 때 기도 한 번 안 한 사람이 없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마을 어귀 오래된 나무와의 추억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마을 이장의 말이다. 도로 건설로 빚어지는 갈등을 천연기념물이 되면서 해결하는 일명 우영우 팽나무를 보며 고창 수동리 팽나무와 사연을 품은 노거수들이 떠올랐다. 우영우 팽나무가 있는 곳은 ‘소박하지만 덕이 넘치는 마을’인 경기도 소덕동으로 설정되었지만, 실제 그 팽나무가 있는 곳은 창원시 대산면 북부리이다. 수령 500년으로 추정되는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마을과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 있다. 수세가 좋고 수형도 아름다워 2015년 창원시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지만, 문화재청에 공식으로 지정 건의가 없어 그동안 천연기념물 검토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동리 팽나무처럼 마을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당산나무이다. 5월 즈음에 꽃이 피는 느릅나무과의 팽나무는 콩처럼 생긴 작은 열매가 달다. 그래서인지 ‘단맛의 열매가 열리는 나무’라는 라틴어 ‘겔티스(Celtis)’에서 유래된 학명을 쓰고 영문도 ‘슈거베리(Sugar berry)’이다. 열매가 달아 즐겨 먹고 새들도 좋아하지만, 팽나무는 아이들이 열매를 딱총처럼 갖고 놀며 생겨난 이름이다. 대나무 대롱에 팽나무 열매를 넣고 꼬챙이를 꽂아 공기의 압축을 이용해 탁!치면 ‘팽~’하고 날아가며 소리가 나 그 나무총을 ‘팽총’이라 하고, ‘팽나무’라는 이름도 붙었다고 전해진다. 목수과자, 평나무, 포구나무 등 다양하게 불리며 한자어로는 박수(朴樹), 박수(樸樹), 자단수(紫丹樹) 등으로 쓰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 선조들은 5리마다 오리나무를 심어 길의 이정표로 삼았는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심었고 일본에서는 1리마다 팽나무를 심었다. 일본에서는 이정목으로 소나무를 심었으나, 개미 등 병충해로 소나무가 잘 죽자 팽나무로 대신하며 귀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또한, 팽나무는 풍요를 기원하는 신목(神木)으로 이삭이 패고 꽃이 핀다는 의미로 이름 붙었다고도 전해진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에 따라 부족한 기운을 채우기 위해 비보림으로 심거나 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으로 심은 까닭에 붙은 설인 듯하다. 고창 수동리 팽나무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신성시한 당산나무이다. 수동리 마을의 앞바다를 간척하기 전에는 팽나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를 묶어 두었던 나무로도 알려져 있다. 해풍과 습기에도 강한 성질의 나무인지라 오랜 세월 든든하게 마을의 중심 역할을 했다. 매년 팔월 보름인 추석이 되면, 팽나무 앞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며 당산제를 지냈다. 수령이 약 400년으로 추정되는 수동리 팽나무는 수세가 좋고 수형이 늠름하고 아름다운데다 지역의 삶과 오랫동안 함께한 역사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반면, 고현(古縣)의 아래에 있어 하고(下古)라 불리는 마을에는 전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지만, 천연기념물이 되지 못한 마을 숲이 있다. 천변에 자리한 ‘하고리 왕버들나무 숲’은 고지도에도 그 위치가 특정되는데, 왕버들보다는 능수버들 군락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지역의 켜를 오랜 세월 층층이 품고 아로새긴 마을 숲이지만, 몇 해 전 문화재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 건의 후 심의를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선조 때부터 특별한 사연을 지닌 마을 숲에 자긍심이 있던지라 주민들이 상심이 컷다고 한다. 하고리는 여러 성씨가 살며 자리한 고장으로 고려 시기 무송의 삼정승을 지낸 윤(尹)・유(庾)・하(河)씨가 살았다 하여 ‘삼정승의 명당 전설’이 깃든 곳이다. 마을 뒷산은 천문 별자리인 삼태성(三台星)을 빗대어 산 이름을 ‘삼태봉’이라 하고 마을도 ‘삼태’라 불렀다. 삼태성은 왕의 자리인 북극성을 호위하는 별자리로,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 물을 담는 쪽에 길게 비스듬히 늘어선 세 별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 비유해 삼공의 지위를 삼태성이라고 한다. 천하의 태평성대를 주관한다고 여겨 선조들은 삼태성이 밝아지면 태평성대를 누린다하여 중요하게 살핀 별자리이다. 그런 귀한 기운을 지닌 삼태마을이지만, 풍수지리상 학 혹은 떠 있는 배의 형국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마을에서는 우물을 파지 않고 하천의 물을 길어다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을 파게 되면 배의 형국이 가라앉게 되어 마을의 운이 다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운을 보하기 위해 나무를 심어 삼태천 둑도 보호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또한, 수동리처럼 오래전에는 이곳 삼태천까지 배가 들어와서 정박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배를 메어 놓기 위해 나무들을 심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천변에는 200년에서 300년 된 왕버들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 소나무 등 백여 그루의 나무숲이 마을을 호위하며 풍파를 막아 주듯 촘촘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래된 나무는 든든하고 때론 경이롭다. 드라마에서 우영우가 팽나무를 보며 “볼 때마다 이 나무는 참 멋집니다”라고 담백하게 표현했고, 드라마의 선한 나비효과가 천연기념물과 노거수에 대한 관심도 일으켰다. 하지만, 우리 곁에서 너른 품을 내어주는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생멸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랜 세월이 담긴 유산을 후손에게 전해줄 의무 또한 지금의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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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7 13:5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4)숙빈 최씨와 영조의 사모곡

청와대가 개방되었다. 연일 관심이 뜨거운 청와대는 역사성과 장소성이 특별한 곳으로, 고려시대 남쪽 수도인 남경 궁터의 흔적을 품고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굴곡진 일제 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12명의 대통령이 업무를 보고 생활해 대통령궁으로도 불렸다. 중세와 근·현대에 이르러 장장 천여 년의 시간이 중첩된 장소인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그 서편에 자리한 칠궁도 주목받고 있다. 칠궁은 왕을 낳고도 왕비가 되지 못한 7명의 후궁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의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 다음으로 큰 사당이다. 칠궁에 모셔진 후궁들은 살아있을 때 왕비도 못되었고, 죽어서도 왕의 곁에 묻히지 못했지만 낳은 왕자가 왕이 되었으니 외로웠으나 성공한 삶이었을까. 아니면 왕실의 암투에 전전긍긍한 인생을 살았을까. 원래 칠궁은 영조(1694-1776)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로 알려진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인 ‘숙빈묘’였다. 무덤을 지칭하는 묘(墓)가 아닌 사당을 지칭하는 묘(廟)로 숙빈묘는 이후, ‘상서로움을 기른다’란 뜻의 이름을 받고 ‘육상(毓祥)묘’로 고쳤다가 ‘육상궁’으로 격상되었다. 영조는 육상궁에 ‘어머니의 은혜를 온전히 보존하는 사당’이라는 현판을 내리며 자주 들러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기렸다. 영조 재위 시절 200여 번 정도 육상궁을 방문했다 하니 영조의 효심이 대단하다. 그 옛 모습은 현재 칠궁 내 우물 냉천에 남긴 영조의 시구와 영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던 냉천정 등이 남아 있으며,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1739년에 그린 <육상묘도>에서는 육상궁의 초기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데 홍살문과 초가의 건물이 북악산을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자리하고 있고, 육상묘 신위 봉안에 참여한 18명의 관원 명단이 상단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41년 그려진 〈장안연우〉에서는 초가가 기와집 형태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하지만, 영조의 정성이 무심하게도 육상궁은 1878년과 1882년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듬해 다시 지어졌다. 이후 추존 왕인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의 신위를 모신 연호궁이 육상궁에 옮겨와 함께 있다. 점차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덕안궁(순헌 귀비 엄씨)이 옮겨오고 조성되면서 칠궁이 된 것이다. 칠궁이 원래 육상궁이었다고 하나 실제 가보면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 새겨진 현판이 연호궁 현판 뒤에 걸려 있다. 가려진 듯 보이는 위치에 육상묘로 남아 있는 현판을 보자면 괜히 마음이 씁쓸한데 죽어서까지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시고 있는 정빈 이씨가 안쓰럽고 육상궁의 현황을 보면 영조의 억장도 무너질 것 같다. 조선왕조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 자리를 지킨 영조는 왕위에 오른 내내 숙빈 최씨의 지위를 격상시키며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태평성대를 누린 시기지만, 어머니 숙빈 최씨가 궁중 나인출신이어서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한다. 숙빈 최씨는 7세 때 입궁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입궁 전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숙종의 후궁이 된 후 기록은 왕자를 출산한 호산청 일기 등 자세한 사료들이 남아 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궁궐에서 쫓겨난 후 인현왕후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다 알려져 있다. 훗날 영조가 된 둘째 아들 연잉군을 낳고 ‘귀인’이 되었으며, 단종이 복위 되었을 때 ‘숙빈’으로 승급되었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숙빈 최씨는 희빈 장씨가 세상을 뜨자 왕비가 될 수 있었지만, 희빈 장씨의 폐해에 지친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서는 안된다’고 내린 법령에 따라 왕비도 못되었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어머니의 지난날을 안타까워하며 어머니가 궁중 나인으로 일을 할 때 누비를 짓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는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의 손주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서린 한을 풀어냈다면, 영조는 고생하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기리며 사모곡을 불렀을 것이다. 영조는 숙빈묘를 육상궁으로 격상시킨 것처럼, 파주에 있는 숙빈 최씨의 무덤인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높여 고쳐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숙빈 최씨의 아버지인 최효원(1638-1672)을 영의정으로 어머니 남양 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또한, 숙빈 최씨의 생가가 서울 세종로 일대인 여경방 서학동이라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반면,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담양과 장성 일대 그리고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생가가 있는 정읍에 신분상승 꿈을 이룬 최복순 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최복순은 어린 시절 숙빈 최씨 이름인데 어린나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숙빈 최씨가 담양의 용흥사에서 기도를 올려 왕자를 낳는 꿈이 이루어져 용흥사에 은혜를 갚아 번창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는 대각교에서 귀인인 인현왕후의 가족을 만나 훗날 궁에 들어가 소원을 이룬 전설이 기록되어 있고, 정읍에는 그 만남을 기념하는 ‘만남의 광장’도 있다. 하지만, 숙빈 최씨의 어린 시절에 관한 정확한 사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칠궁의 세월을 묵묵히 품고 있는 오래된 나무에 기대니 지나는 바람에 영조의 애절한 사모곡이 실려 오는 듯하다. 가만 눈을 감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 구중궁궐을 지나 삼남대로 옛길의 한 모퉁이도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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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9 15:1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3)버드나무 춘정(春情)

꽃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두 빛 연정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버드나무의 다정한 나부낌을 바라보니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리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고향의 봄> 노랫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봄을 상징하는 나무로 버드나무를 손꼽고 봄의 색을 버드나무의 한자어를 사용하여 유색(柳色)이라고도 한다. 버드나무의 옛 정취는 고창의 무장읍성을 그려낸 보물 지도와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다양한 시화와 문헌 등에 주요 소재로 표현되었다. 버드나무를 심은 오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년) 3월(음력) 궁궐 남쪽에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기슭에 버들을 심었다는 등이 남아있다. 오랜 세월 함께한 버드나무는 우리나라에 40여 종이 있는데, 버들강아지인 갯버들과 능수버들, 수양버들 등 종류가 다양하다. 물을 좋아해 주로 물가에 많이 자라는데 하늘거리며 춤추는 버드나무는 대부분 능수버들이다. 수양버들은 중국이 고향으로 수나라의 양제가 양자강에 대운하를 건설할 때 심어 그 이름이 유래된 나무로 우리 주변에서는 흔치 않다. 그 둘의 구분은 어린 가지가 적자색이면 수양버들 녹황색이면 능수버들로 구분한다는데 쉽지 않다. 버드나무의 하늘거리는 모습은 여인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는데, 가지가 가는 버들을 세류(細柳)라 하며 여인의 가는 허리를 유요(柳腰)라 했다. 버들 같은 눈썹을 유미(柳眉)라 하며 “미인의 눈썹은 새로 핀 버들잎 같다”고 표현했다. 버드나무는 여인과 더불어 이별의 징표로도 두루 쓰였는데, 버들의 ‘유(柳)’와 머물게 하는 ‘유(留)’와 음이 같아서 버드나무 가지를 건네는 것은 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뜻이 담겼다 한다. 또한, “버들은 가지를 꺾어 눕혀 심거나 거꾸로 심어도 잘 자란다”란 말이 있다. 하여 버드나무에 새잎이 돋으면 나를 생각해 달라는 의미와 이른 봄에 가장 먼저 싹이 피니 가장 일찍 돌아오라는 당부도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 금세 무성해지는 왕성한 생명력에 빗대어 떠나는 이의 강건함과 안녕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도 담았다 한다. 버드나무의 생명력은 해열과 진통에 효과가 탁월한 천연 약재로 효능이 입증되었는데, 기원전부터 진통제로 히포크라테스가 버들잎을 사용했으며 아스피린의 주성분도 버들잎에서 추출했다. 『동의보감』에도 풍을 없애고 소화에 좋고 충치와 아픔을 줄이는 등 만병통치 격인 약효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버드나무 속껍질을 달인 물로 양치질을 하는 양치도 버드나무 가지인 양지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그네에게 물을 건네는 바가지에 버들잎을 따 넣어 후후 불어 물을 마시라며 건넸던 낭만적인 풍경도, 천천히 숨을 고르라며 마음을 챙겨주고 몸까지 두루 헤아린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버들잎을 띄운 물 한 바가지가 부부의 연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왕건과 신혜왕후 류(柳)씨의 전설로 유명하고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도 유화(柳花)부인으로 버드나무와 인연이 깊다. 여느 가녀린 버드나무와 달리 ‘버들 중의 왕’이라 이름 붙은 왕버들은 아름드리나무이다.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왕버들은 물가의 습한 기운에 둥치가 잘 썩어 대부분 커다란 구멍이 있다. 야사에는 기생집에서 잠자던 수양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친 기둥서방을 피해 도망치다 커다란 버드나무 구멍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한 이야기가 있다. 수양대군의 이름을 따 수양버들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가 몸을 숨길 정도로 구멍이 뚫린 나무는 수양버들이 아니라 왕버들일 것이다. 왕버들에 많이 있는 인의 성분으로 밤에 도깨비불이 번쩍여 귀신이 사는 버들이라 하여 귀류(鬼柳)로도 불렸는데, 반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문간에 달아두면 사악한 귀신을 물릴 칠 수 있다 하였다.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함께한 노거수로 마을의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왕버들 중에는 민속학적 생물학적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그중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청와대에 걸린 그림 속의 주인공이었다. 청와대 본관 1층 회랑의 동쪽 벽에 손장섭 화백의 작품 <김제왕버들>로 2006년 4월 다른 그림에게 자리를 내주기까지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다. 그림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원평천 옆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올해도 새잎을 피워내며 까치를 비롯한 새들에게 가지를 내어주고 몇 년 전부터는 천연기념물인 후루티에게 구멍도 내주고 있다. 수형이 우람하고 아름다운 <김제 종덕리 왕버들>은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대략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나무로 마을의 정자목이자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나무이다. 1980년 중반까지 매년 삼짇날과 칠월칠석에 마을에서 제를 지내던 풍습이 전해졌지만, 지금은 지낼 사람이 없어 서로를 보듬으며 켜켜이 이어온 일들이 마을의 오랜 기억으로만 남았다. 김소월의 시구처럼 실버들을 천 만사 늘여 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 못하겠지만, 조금 숨통 트인 일상을 추스르며 오랜 나무가 아낌없이 건네는 힘을 받고 신록의 계절을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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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27 14:12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2)결사항전의 그곳, 웅치

‘결사항전(決死抗戰).’ 죽을 각오로 맞서서 싸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국민의 결사항전을 바라보며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낸 ‘웅치전투’를 떠올려 본다. 웅치는 지금의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곰티로도 불리는 웅치는 예로부터 금산과 완주 경계의 이치(배티재)와 더불어 전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옛 웅치길인 덕봉길과 또 다른 웅치길인 곰티재길을 품은 곳으로 계곡이 깊다. 지금은 일제가 1910년대 낸 곰티재 신작로가 옛길 인근에서 진안과 완주를 잇고 있으며 익산 포항 간 고속도로가 그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1970년대에 험준한 산길을 우회하는 모래재길도 생기자 옛 웅치길과 곰티재 신작로를 지나는 발길이 뜸해졌지만, 지금도 오롯이 남아 있는 옛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계절 깊은 골짜기가 자아내는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흔적을 담은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음력) 왜군 선발대가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왜군들이 쳐들어오며 마지막 방어선이라 여긴 탄금대마저 함락되자 선조는 4월 30일 피난길에 나섰고, 3일 후인 5월 3일 왜군 1진이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한다. 조선의 수도에 들어왔지만, 선조를 놓친 왜군은 그 뒤를 쫓으며 조선 팔도를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조선의 각 방향으로 쳐들어간다. 전라도 지배를 위해 전주성을 점령하려 이치와 웅치를 지나는 왜군에 대항하며 치러진 지역의 전투에 따라 웅치전투 이치전투라 칭했다. 그 중, 웅치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를 진격하려는 왜군에 대항하여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안덕원에 이르기까지 결사항전으로 저지하며 치열하게 싸운 전투이다. 웅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앞선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된다. 6월 말 왜군이 전라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안을 지나 웅치를 통해 전주 공격을 감행하고자 움직이자,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 화순)현감 황진,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등 관군이 배치되었고 정찰을 나선 황진이 왜군 선봉을 격퇴한다. 관군은 물론이고 3대 독자로 무과에 급제 후 시묘살이를 하다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한 의병장 황박을 비롯하여 진안의 선비 김수·김정 형제와 지역의 민초들이 의병으로 합류한다. 대략 1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왜군에 맞선 당시 조선군은 대략 왜군의 십 분의 일인 천여 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웅치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일대를 3개의 진으로 나누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전선 격인 산 아래의 제1 방어진지는 황박과 관군인 오정달이, 중턱의 제2 방어선은 이복남과 변응정이 맡았고, 정상부의 제3 방어선은 지휘부인 정담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조선군은 왜군에 결사항전으로 맞섰지만, 왜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무기의 열세로 1,2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후의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대부분 전사하였다. 『수정선조실록』에는 7월 7일 왜적의 선봉 수천 명에 대항하여 싸운 이복남과 전투가 본격적으로 치러진 7월 8일의 전투를 소개하며 황박과 백마를 탄 적장을 쏘아 죽인 정담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수세에 몰려 적들에게 포위된 정담에게 부하들이 후퇴를 권유하자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 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 없다”며 동요하지 않고 맞서다 순절한 정담과 조선군의 기록이 전해진다. 그 흔적은 능선을 넘어오던 백마 탄 적장을 정담이 큰 바위에 매복하여 잡아 명칭이 유래된 ‘왜장바위’와 작은 진천골, 진천골 그리고 적들이 들어온 곳이라 불려진 적래천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유성룡은 『징비록』에 왜군이 힘써 싸운 조선군을 가상히 여겨 조선군의 시체를 묻고 ‘조선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弔朝鮮國 忠肝義膽)’라 쓴 말뚝을 세웠다는 일화와 함께 그들로 인해 “전라도만이 홀로 온전하였다”고 기록했는데, 그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오랫동안 성황당터로 알려진 채 남아 있다. 이후 왜군은 7월 9일 웅치를 넘어 안덕원으로 진출했지만, 사력을 다해 싸운 조선군과의 웅치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본 왜군은 황진에게 패배하고 전주성의 방어태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퇴각한다. 웅치전투는 호남에서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며 왜장까지 전사하여 일본에서도 크게 패한 전투로 여겼다고 하며 조선군에게는 승리의 발판이 되며 전라도를 지켜내게 한 전투였다. 웅치전투 영웅들을 모신 사당 창렬사 앞에는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문구가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그동안 웅치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관과 학계·언론은 물론이고 지역민이 힘을 합치고 있다. 관군과 무명의 선조들이 남겨준 흔적을 올곧이 찾아 호남을 지켜 조선을 구한 웅치전투의 의미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행보가 바람직하다. 지금의 우리는 전염병의 긴 터널을 어렵게 지나고 있지만, 선조들이 지켜내고자 결사항전으로 염원했던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봄이 오는 길목, 깊은 계곡에 아로새겨진 웅숭깊은 흔적을 따라 창렬사와 돌무덤에 봄꽃을 올리며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며 큰절을 드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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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02 15:2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1)고슴도치섬 위도의 원당과 띠배

해마다 음력 정월 초사흘이 되면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는 띠배라 불리는 특별한 배를 바다에 띄워 보낸다. 마을의 평안과 풍어를 기원하며 용왕님께 띄워 보내는 배이다. 위도는 한자어 고슴도치 위(蝟)를 쓰는 섬이다. 고슴도치가 많이 살아 붙은 이름이 아니라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아 유래되었다는데 위도에 관한 오랜 기록은 고려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저술한 고려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뱃길로 개성으로 가다 위도에 들러 식수를 공급받았다는 것과 이곳에 자생하는 소나무의 잎이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나무 솔잎의 특별한 생김 때문에 위도라고 불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주에서 벼슬 살다가 궁으로 보내는 목재 벌목을 감독하기 위해 변산으로 가서 남긴 고려문인 이규보의 기록도 흥미롭다. 궁으로 보내는 특별한 목재를 언급하며 바다를 굽어보니 아침저녁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도가 있다며 순풍을 만나 쏜살같이 달리면 중국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기록을 『남행월일기』에 남겼다. 위도는 예로부터 주요 항로이자 수군의 진영인 위도진의 관아 건물이 설치된 요충지였다. 또한, 둥글게 휘돌아 가는 모양의 거대한 바위인 대월(大月)습곡을 비롯해 아름다운 비경을 품고 흰 상사화가 피어나는 신비로운 섬인데다 위도 앞 칠산바다는 풍요로운 어장이다. 그래서인지 부안에서 『홍길동전』을 저술한 허균이 위도를 바라보며 이상향인 율도국을 상상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칠산바다는 칠산어장으로 불리며 영광굴비가 되는 조기의 대부분이 잡혔다고도 하는데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위도는 조기잡이의 3대 파시로 임금에게 진상하는 조기가 잡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물코마다 조기가 걸렸다는 황금어장이다 보니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의 토속신앙이 발달한 곳에 칠산바다로 돈 벌러 가자며 몰려든 조기잡이 선주들이 비용을 대 큰 굿이 성행했던 곳이었다. 특히 위도 대리마을의 원당제가 유명했다. 대리는 마을의 지형이 큰 돼지목 형국이라 대저항이라 불렸고 큰 마을(돌목)이란 뜻으로 대돌목으로도 칭했던 마을이다. 그곳에 있는 제당 이름이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는 집이란 의미의 원당(願堂)이다. 원당제는 원당굿 풍어제 띠뱃굿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바닷가에서 용왕굿과 함께하여 산신과 용왕신에게 곡물과 띠배를 바치며 바닷사람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한 공동제의(共同祭儀)였다. 그 오랜 역사는 위도 도집강 이인범과 화주 서익겸 신득삼 등이 경자년(1900년)에 원당을 중수한 기록인 『원당중수기』가 남아 증명해 준다. 대저항리의 원당은 큰 바다의 험준한 봉우리 위에 위치하여 신령스럽고 기이한 가운데 특별히 이곳으로 모여들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숭배한다며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응답해주는 원당의 보수가 시급하다 하였다. 이에 위도의 선주뿐 아니라 멀리 황해도 옹진을 비롯하여 완도, 군산, 계화도, 줄포, 비응도 등 각처에서 원당 수리 비용을 대며 이름을 남긴 점이 특별하다. 마을을 넘어서 풍요로운 어장으로 몰려든 뱃사람들의 바람으로 원당제가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풍어를 기원하는 큰 굿뿐만 아니라 만선이 되거나 마을에 정박할 때 풍물을 치며 놀았던 여러 지역의 가락이 스며들어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오며 위도에서 불리는 다양한 노동요나 놀이 문화로 발달했다고 전해진다. 원당제가 널리 알려진 데에는 197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대리마을 당제의 한 과정인 띠배보내기가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고 나서이다. 이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위도 띠뱃놀이로 지정받았다. 띠뱃놀이는 풍물패가 마당굿으로 시작을 알리며 서낭신을 모신 원당에 올라가 제물을 차리고 굿을 한 후 마을의 주산을 돌고 마을 앞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하면서 이어진다. 띠배는 원당에서 굿을 하며 내려오는 사이 바닷가에서 만들어지는데 띠풀, 짚, 억새나 싸리나무 등을 함께 엮어 길이 3m, 폭 2m 정도의 크기로 돛대와 돛을 달아 배 모양을 갖춘다. 띠배 안에는 각종 재물을 넣고 선원을 상징하는 제웅인 허재비(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운다. 띠배가 준비되면 바닷가에 용왕상을 차리고 용왕굿이 시작되는데 용왕굿에서는 여자들이 주가 되어 고깔과 탈을 쓰고 흥겹게 놀며 바다에 떠도는 혼령에게 골고루 음식을 나눠주는 의미로 용왕밥을 만들어 바다에 던진다. 이후 바다에 띄워진 띠배를 오색기를 단 배들로 호위를 받은 모선(母船)이 끌고 바다로 나간다. 모선에 탄 주민들이 풍물놀이와 함께 노동요이기도 한 배치기소리, 에용소리, 술배소리, 가래질소리를 신명나게 부르며 띠뱃놀이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띠배를 바다 가운데에 떼어 놓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띠배가 마을의 모든 액을 싣고 멀리 떠나기를 기원한다. 바라건데 올해는 띠배에 오랜 역병의 시름도 함께 실어 보내며 모두의 안녕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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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2.02 18:5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0)범 내려온 자리에 남은 호랑이 기운

호랑이 기운이 깃든 인검(寅劍)은 의례용 칼이다.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은 양기가 강하며 의(義)를 상징하는데, 양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인년, 인월, 인일, 인시가 네 번 겹쳐지는 시간에 맞추어 제작한 사인검과 삼인에 맞추어 제작한 삼인검이 있다. 조선 시대 인년은 총 43회로 태조 7년(1398) 무인년에 처음 인검이 제작되었다. 전란과 흉년이 심한 해에는 만들지 못하기도 했지만, 특정 시기를 맞추어 선정된 장인이 특별한 장소에서 엄선된 재료로 의미를 담아 제작하였다. 사악한 것을 베고 나라를 지키라는 뜻을 담아 왕실이 만든 인검은 나쁜 기운을 막고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재앙을 물리치며 잡귀를 막아주는 영물(靈物)로 여겼지만, 호환(虎患)이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가축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물어 죽여 호랑이가 먹고 남긴 시신 일부를 모아 장례를 치르는 것을 호식장이라 하였으며, 그 자리에 만든 무덤을 호식총이라 하였다. 호환과 맞서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모습이 고구려 벽화와 조선의 화가 이인문의 그림 등에 남아 있으며, 고려 시기에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이 존재했다. 조선 초부터는 농사를 위한 개간이 늘어 살 곳을 빼앗긴 호랑이가 인가에 출몰하면서 호환이 잦아지자 조정은 호랑이를 잡는 포호정책을 펼쳤다. 태조 1년 성안에 들어온 호랑이를 쏴 죽인 것을 비롯하여 궁에 호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고 태종이 범에게 상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죄를 주겠다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호환에 대응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포호정책에 따라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잡는 최정예 군사인 착호갑사(捉虎甲士)를 선발 운영하였고 세종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되었다. 지방에도 호랑이를 잡는 착호인과 함정을 관리하는 감고등을 설치해 호랑이 가죽을 진상하게 하고 더러는 큰상을 내렸다. 왜란을 거치며 훈련된 조총 포수들이 호랑이 사냥에 투입되었고 산포수라 불린 숫자가 늘어 감에 따라 호랑이의 수는 점차 줄었다. 조선총독부는 피해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구실로 해수구제를 정책으로 삼아 호랑이를 마구 사냥했으며, 부호 야마모토가 조직한 호랑이 사냥단 정호군까지 원정와서 조선 호랑이 사냥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후 1922년 경주 대덕산에 살던 호랑이가 사살되면서 조선의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 호랑이 왕국이라 불리던 조선에 그 많던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는데, 임실 덕치면 약담봉에는 포수바위 전설이 있다.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하는 호랑이를 쫓아 달라고 정성껏 제물을 바치며 산신제를 올리자 감동한 산신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약담봉에 세워준 게 포수바위이다. 이후 마을에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약담봉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 자리한 임실 신평면 호암리에는 특별한 호석(虎石)이 있다. 호랑이를 닮은 범바위가 있어 호암리인데, 그 모습을 두려워해서인지 확실치 않지만 사람들이 범바위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후 범바위를 없애는데 주도한 사람의 집에 불이 나고 우환이 잇따르자, 수호신인 범바위를 없앴기 때문이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호석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이후 마을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는데 만든 호석의 모습이 특이하다. 이빨을 드러내고 익살스럽게 히히 웃는 호랑이는 오금 저리게 하는 두려운 존재이기보다는 민화 속 친근한 호랑이 같기도 하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며 흥정하는 동화 속 호랑이 같다. 공포를 해학으로 풀어 낸 친근한 상징이다. 남원에도 두리뭉실한 귀여운 모습의 호석이 있다. 광한루원을 비롯한 몽심재 고택과 고평마을 세 곳에 자리한 호석인데, 비슷한 형상이 마치 한 사람의 석공 솜씨처럼 보인다. 그 호석이 전해진 데에는 견두산(犬頭山)과 관련 있다. 견두산의 본디 이름은 호랑이 머리를 뜻하는 호두산(虎頭山)이었고, 그 고장은 호랑이가 들끓어 지명과 마을 이름마저도 호곡리(虎谷里)와 호음실이었다. 남원에 호환이 끊이지 않자, 풍수에 능한 전라감사 이서구(1754~1825)가 산 이름을 견두산으로 바꾸면서 호환이 사라졌다. 하지만, 견두산이란 이름을 얻자 성난 개가 남원 땅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고 들개와 늑대가 떼를 지어 나타나 피해를 줬다. 이에 이서구가 세 곳에 호석을 세우도록 하여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자 들개무리의 피해와 호환도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호석이 있어 호석거리로 불렸던 남원의 옛 시장은 광한루원에 편입되어 사라졌지만 오작교 가는 길옆에 호석은 세월을 담고 그대로 서 있다. 그리고 명당으로 알려진 몽심재에서는 호석과 더불어 호랑이 기운을 받을 수 있는 200여 년이 된 특별한 나무도 만날 수 있다. 나무줄기의 밑동이 호랑이 발을 닮아 호족시란 이름을 얻은 귀하고 신비로운 감나무이다. 임인년 호랑이해를 맞으며 두려움을 넘어 벽사의 상징이 된 호랑이의 힘찬 기운을 받아 보자. 조선 왕실의 인검과 호랑이 물상에 기대어 삿된것을 물리치고,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란 노래로 한껏 흥을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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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19 19:4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8)만복사지에 깃든 상상과 바람

조선 문신 양경우가 남긴 시 <만복사>는 이즈음의 만복사지(萬福寺址)와 잘 어우러지는 시이다. 이제 옛 절마저 사라진 넓은 터에는 특별한 모습의 석인상이 두 눈에 깊은 세월을 담고 우뚝 서 있다. 만복사의 창건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원에 창건했다는 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문종 재위(1046-1083) 때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복사는 탁발하고 절로 돌아오는 스님의 행렬 모습이 남원8경 중 하나인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으로 알려질 만큼 번창했던 사찰이었으나 안타깝게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다. 만복사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복을 내려준다는 이름 덕분인지 고려 시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 등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남아있으며, 석인상을 비롯해 오랜 흔적과 수많은 이야기를 만복사지 너른 터가 품고 있다. 만복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석인상의 존재감이 강렬하다.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가 3.7m가량이고 흙에 묻힌 부분까지 포함하면 전체가 5.5m 높이로 육중하다. 또한, 정자세가 아니라 눈을 크게 부라린 모습으로 어깨에 무언가를 걸러 메고는 냅다 고개를 뒤로 돌려 보는 자세로 서 있다. 길 다란 사각형의 돌기둥 3면에는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였고, 한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석인상은 넓적한 얼굴형에 안구가 돌출되고 입을 굳게 다물어 화난 모습으로 보이나, 투박한 미소가 감도는 듯 보이기도 해 소박한 멋도 풍긴다. 몸체를 살펴보면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로 표현되었으며, 오른쪽 팔을 구부려 무언가를 쥐고 어깨에 건 자세로 허리춤에 옷을 묶어 물결무늬 옷자락이 하반신을 가리게 표현했다. 또한, 아래쪽 면은 별개의 대좌를 사용하지 않고 뾰쪽하게 다듬어 땅에 묻게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석인상이라 불리지만, 다듬어진 한 면에 뚫린 두 개 구멍의 기능이 특징되어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당(깃발)을 멘 장대를 지탱하던 당간지주로도 알려져 있다. 얼굴 모습도 인왕상이나 금강역사 등 불교의 수호신으로도 보이니 위엄함을 갖춘 채 투박한 미소까지 머금은 어디에도 없는 당간지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확실하지 않다. 또한, 석인상은 홀로 있던 게 아니라 한 구멍을 이을 자리에 한 쌍으로 2기가 함께 있었고, 게다가 석인상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었다. 만복사지 도로 옆에 파묻힌 채 얼굴과 어깨를 땅위로 빼꼼하게 숨 쉬듯 내민 것을 2009년에 발굴해 본래 자리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 세웠다. 그래서인지 자세히 살펴보면 땅속에 묻혀있던 몸체와 땅 위에 노출되었던 부분이 차이가 나고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차에 치여 깨지고 뭉개졌던 모습이 보인다. 석인상의 옛 모습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이 실린 <조선고적도보>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 등에 남아 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석인상은 남원 만복사지 유물과 함께 만복사지 이왕석상(二王石像)으로 등록되어 있다. 수록된 유리 건판 사진을 살펴보면 당간지주 앞에 서 있는 석상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다른 석인상은 땅에 상당 부분이 묻힌 채 이미 파손된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도로를 내면서 더 묻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두 기 중, 비교적 온전하게 몸체까지 발굴된 석인상은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졌고, 뭉개진 얼굴의 석인상은 남원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만복사지 내 석인상과 사뭇 다르게 풍화와 훼손도 심해 보인다. 아직도 도로 아래 땅속에 묻힌 조각난 몸체와 합체되기를 바라며 세월을 묵묵하게 응시하는 것 같은데, 만복사가 복을 내려주는 절이다 보니 석인상의 돌을 갈아 마시면 아들을 점지해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저리 뭉개졌다는 설도 전해지니 더 애잔하다. 만복사에서 복을 기원한 것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배필을 얻기 위해 기도하다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한 것과 고전소설 『최척전』에서 자식을 얻고자 최척과 옥영이 기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만복사의 사천왕을 싣고 와 성 밖을 돌며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자 했다는 가슴 아픈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사천왕도 석인상과 연결해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스쳐 지나가면 그저 비어있는 터겠지만, 많은 이들이 그 위에 이야기를 더해 만복사지는 새로운 상상으로 덧입혀지고 있다. 최근 고인이 된 신문수 화백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 그림을 그려 유작으로 남겨 놓았다. 누구나 만 가지 복을 받는다는 의미에 많은 이들의 바람과 상상이 그 빈터를 채우고 있으니 만복사지는 비어있으나 가득 찬 곳이다.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생긴 메타버스 속 온전한 만복사를 상상해 본다. 외전처럼 이어진 이야기 속으로 우리도 들어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없이 짝과 해로하는 양생을 축복해주고, 만복을 받고 코로나 걱정 없이 유람하며 함께 같은 시간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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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08 15:3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7)신선의 호리병, 명승 고창 병바위

층층의 바위가 시내 가에 불쑥 솟아 있는데 그 곁에 기암이 우뚝 서 있고 병이 거꾸로 서 있는 모양이 높이 수십 길이다. 따라서 호(壺)라고 이름하였다. 19세기 『고창현읍지』에 기록된 병바위의 소개이다. 그보다 앞선 17세기 <해동지도>를 비롯한 고지도에는 아예 바위 모양 위에 병을 그려 놓기도 했고 호암(壺巖)으로 표기했다. 그 특별한 생김이 예로부터 유명한 고창 병바위 일원은최근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곳으로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자리하고 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위 윗부분이 크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잘록해 호리병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모양에 따라붙은 이야기도 흥미롭다. 신선의 음주가 빚어놓은 바위라고 칭해지는데, 선인봉의 신선이 반암 잔칫집에서 술에 취해 자다가 잠결에 술상을 발로 걷어차 그 술을 담은 호리병이 거꾸로 꽂혀 병바위가 되었고, 술상인 소반이 굴러 소반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병바위와 소반바위는 생김새가 곡식을 되는 말(斗 두)처럼 생겼다고 해서 두락암(斗落巖)으로도 불리는 전좌바위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인근의 바위 이름에도 신선이 말을 타고 내려와 술을 마시기 위해 안장과 탕건을 벗어 두었다는 안장바위와 탕건바위, 술에 취한 신선을 말이 울며 깨웠다는 마명바위와 그 소리가 시끄러워 말에게 재갈을 물린 재갈바위 등 술과 신선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멀리서 어우러진 모습을 살펴보면 그럴만한 이야기가 생겨날 만도 하다. 또한, 이 지역은 풍수지리상 금 소반에 옥 술병을 차려놓고 신선이 술에 취해 누워있는 금반옥호(金盤玉壺) 선인취와(仙人醉臥)의 형상으로 호남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병바위 일대가 특이한 모습인 것은, 백악기에 분출한 용암이 굳어서 만들어진 유문암질과 응회암이 오랜 시간 풍화 침식되면서 하나의 화산암체에서 분리된 소반바위, 전좌바위와 함께 독특한 지형 경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병바위 표면에 서식하고 있는 덩굴식물인 담쟁이와 백화등이 군락을 이루며 어우러져 계절 따라 다채롭게 변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 주변을 휘감고 서해로 흐르는 물길인 주진천도 병바위를 돋보이게 한다. 고창의 명물인 풍천장어가 나오는 주진천은 인천강으로도 불리는 하천이다. 인천강이라는 명칭은 호암 변성온(1530-1614)과 인천 변성진(1549-1623) 형제가 근처에 호암초당을 짓고 머물렀는데, 강물이 자주 범람하자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변성진이 호를 인천(仁川)으로 하면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병바위 일대가 호남의 명승지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데에는, 두 형제가 이곳을 세거지로 삼고 유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연마하여 그 이름을 알린 영향이 크다. 훗날 세월의 풍파에 호암초당이 유실되자, 마을 사람들이 전좌바위 중턱에 있는 바위굴에 초당을 지어 그들을 기렸다고 하며, 1815년에 5대손 변동빈이 그 자리에 두암초당(斗巖草堂)을 중건하였다. 두암초당의 명칭은 바위의 생김에 따른 것도 있겠지만, 변성온의 인품이 곡식을 되는 말(斗)이나, 저울추같이 매사에 치우침이 없고 반듯했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으로 전해진다. 두암초당에는 1935년의 상량문이 남아있고 현재의 모습으로 되기까지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탁 트여 마을 전경을 조망하기에 좋은 곳으로 고창 출신의 김소희(1917-1995) 명창이 15세 때 득음한 곳으로도 알려졌으며 바위와 어우러진 경관이 빼어나다. 두암초당에는 1928년 <호암실경도>를 그린 교육자이자 서예가인 송태희가 쓴 두암초당의 현판을 비롯해 퇴계 이황 등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류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중, 스승 김인후가 제자인 변성온에게 써준 것으로 술이란 항아리 비우면 취하기 마련이지만 / 시는 얕은 흥으로 읊을 수 없네 / 등불 아래 처마 밖 빗소리를 들으며 / 그대와 함께 이 한때의 회포나 풀어보세란 시가 제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채 걸려 있다. 1931년 쓰인 두암초당 중건기도 함께 있는데 호남의 명승지에 일찍이 양 선생이 사셨는데 형은 호암이요 동생은 인천으로 우리 동방에 은덕 군자이자 아울러 유림의 으뜸이었다. 바위 곁에 금반 모양의 땅이 있었는데 호암 인천 양선생의 옛날 여묘살이(무덤 근처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를 했던 곳이다. 여묘가 헐어서 집이 되었는데 집의 이름은 영모였다. 이는 양 선생의 부모에 대한 효를 생각하는 집이다라며 재실 영모당의 유래도 함께 증명해 주고 있다. 두암초당이 보이는 마을에는 신화순(1943년생) 어르신이 살면서 두암초당과 영모당을 관리하고 있다. 내가 변씨 가문에 시집온 지 이제 54년이 되었소. 종손 며느리는 아니지만, 이곳에 살면서 가문의 제사를 모신지도 그만큼 된 셈이지. 초등학교 뒤꼍 고추밭에 집이 있었고 시아버지는 두암초당에 올라가 주무시곤 했어요. 여그 일대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놀러 와 장구 치며 놀던 곳이요. 영모 앞은 사람들이 많이 댕겨 반질반질하고 병바우도 아주 유명했지라 하였다. 두암초당의 앞면에는 변씨 형제의 덕이 뛰어남을 비유하여 산은 높이 솟고 강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서설 같은 눈이 내리는 날 그곳으로 가 신선계의 풍류를 살펴보고 선조들이 남겨 둔 정취를 찾아보며 그 의미를 새겨보고 싶다. 옛것과 지금이 중첩된 모습을 따라 선조들의 눈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고창 복분자를 호리병에 담아 풍천장어를 함께 즐겨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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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24 17:3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6)칠광도에 담긴 칠보의 유산

칠광(七狂)이라 불린 일곱 선비가 있다. 1613년 인목대비를 폐위한 광해군에 반발하여 상소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정읍 칠보에 은거한 김대립,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상형, 이탁 일곱 명의 선비를 칭하는 말이다. 시대를 걱정하며 스스로 미치광이가 된 그들의 모습은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칠광도(七狂圖)」속의 주인공으로 남아있다. 그림 속의 장소는 옛 고을의 관청이 있던 마을을 뜻해 고현동이라고도 불린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와 시산리 일대이다. 최치원을 대표하는 역사성으로 정통성을 지니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그 맥을 지켜 전라도 서원의 수원 역할을 수행한 무성서원과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1401-1481)이 제창한 향약과 향음주례에 유래를 둔 태인 고현동 향약으로 500여 년이 넘도록 향촌 사회의 약속이 시행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칠광도」는 고종의 어진을 그린 어진화사로 유명한 채용신이 1910년 칠보면에 있는 김직술의 집에 머물며 칠광 중의 한 명인 송민고의 그림을 토대로 「송정십현도」와 함께 그린 그림이다. 「칠광도」는 비단 위에 채색한 가로 83.4cm, 세로 127.7cm의 크기로 고을의 경관이 그림지도처럼 상세히 표현되어 당대의 지형과 건물의 특징 그리고 칠광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지역의 귀한 자산도 담은 특별한 그림이다. 아름다운 산수화처럼 묘사된 산은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을 모신 산이라 하여 주민들이 성황산이라 부르는 산이다. 그 아래 지금의 무성리 무성서원과 주변 건물을 포함한 원촌마을 그리고 향약을 실시하고 문서를 보관하는 동각이 있는 남전마을과 시산 아래 지금의 시산리인 송산마을이 그려져 있다. 짐을 실은 나귀와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싸리나무로 보이는 나무로 얼기설기 담을 이룬 모습이 정겹다. 하지만, 마을을 지나는 물길은 1735년 대홍수를 비롯한 홍수와 섬진강댐을 만든 이후에 달라졌다. 서유구(1764-1845)가 『계원필경집』에 언급한 석귀와 유상대의 모습은 「칠광도」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최치원이 성황산의 기를 보하기 위해 인공으로 만들었다 전해지는 흰 거북 바위와 자연 바위인푸른 거북 바위 그리고 냇가에 놓인 징검다리는 현재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최치원이 유상곡수(流觴曲水)하며 풍류를 즐긴 것으로 알려진 유상대의 모습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유상곡수는 물길을 만들어 술잔을 물에 띄워놓고 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던 것으로 곡수연이라고도 불렸던 선비들의 놀이였다. 유상대는 태인 고현내에 있는데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창건하였다란 묵재정언충의 시구와 시산 아래는 유상대가 있는데 대의 위쪽에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대의 아래에는 굽이 도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라는 오백여 년 전에 쓰여진 정지유의 『유서석산기(무등산기)』에 기행문으로 남아있다. 그림에는 양 물길 사이 버드나무와 느티나무가 우거진 중심에 큰 바위를 빙 둘러 석축을 쌓은 것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신라의 포석정 등 정원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모습과 달리 작은 돌산과도 같은 바위 주위에 자연스레 냇물을 들인 것으로도 추정된다. 유상대는 훗날 태인 현감을 지낸 조상우와 그의 후손인 조항진이 복구했지만, 여러 차례의 홍수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는 감운정이 세워져 있다. 이렇듯 한 고을을 다채롭게 표현한 아름다운 지도이자 풍경화인 「칠광도」인데, 의외로 그림의 제목이 된 주인공인 일곱 선비는 송정 아래 소나무 사이에 비밀스러운 듯이 작게 묘사되어있다. 세상을 등진 은둔자로 지조를 지키며 음풍영월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채용신의 의도가 돋보인다. 선비들이 담소를 나누고 사색하는 장소이자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의 절개에 비유하여 송정으로 이름 지어진 아담한 정자는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송정 위에 자리한 영모당에는 「칠광도」와 칠광의 김응빈, 김감, 송치중, 송민고, 이탁를 포함한 김관, 김정, 김급, 김우직, 양몽우를 열명의 어진사람으로 표현해 그린 「송정십현도」의 모사본이 모셔져 있다. 아래쪽에 후송정은 그 흔적을 살펴볼 수 있지만, 지금은 물이 말라 있고 민가가 들어서 그림과 옛 사진에 담겨진 정취를 느낄 수 없어 아쉽다. 어린 시절 이 근방을 놀이터 삼아 놀던 추억이 있는 향토연구가 오원근(1964년생)은 칠보면지와 「칠광도」를 접하고는 발굴하는 일에 몰두했다며 물길이 달라졌지만 마을에서 백구라 불린 흰 거북바위는 원천마을 입구 쪽과 푸른 거북바위인 청구는 태산선비문화관과 한옥민박촌 인근 땅에 묻힌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안성열(1961년생)관장은 무성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전해준 데에는 옛 모습을 보여준 「칠광도」의 역할이 컸다 하였다. 「칠광도」속에 담긴 면면과 무성서원의 모습이 지속 가능한 지역의 가치를 증명해준 셈으로, 이를 전승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칠광도」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추진에 힘쓰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내장산의 단풍나무를 비롯한 정읍의 산천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향연을 보고, 「칠광도」의 흔적을 따라 옛고을의 정취를 느끼며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고요한 가운데 사물이 변화하는 것을 바라본다는 정중관물화(靜中觀物化)란 편액이 걸린 송정을 찾아 계절의 변화를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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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1.03 16:59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5)완주 동상에서 홍시 먹고 뱉은 말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 가을날 정취가 듬뿍 담긴 시집의 제목이다. 이 멋진 제목의 시집은 오지나 다름없어 산속의 섬마을이라 불리는 완주군 동상면 주민들의 시를 엮은 것으로, 그들이 시인이 된 사연은 특별하다. 삶이 녹록지 않았던 산골 마을에서 별다른 존재감 없이 살아온 동상면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시집은 탈속한 듯 깨끗한 심성과 꾸밀 줄 모르는 감성과 도저한 애향심 위에 우리에게 친숙한 농경 언어나 토착 정서의 때때옷을 입혀놓은 시편 하나하나가 사뭇 감동적인 독후감을 안겨 준다.는 윤흥길 작가의 추천사를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 시심이 든 동상면은 척박한 산골이지만, 고종 임금에게 진상한 감으로 고종시라 불리는 씨 없는 감과 동상곶감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즈음의 마을 어귀는 고운 감이 나무에 꽃처럼 달려있고, 곶감 말리는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동상면은 완주군 3읍 10면의 하나이다. 본래 고산군 지역으로 고산 읍내 동쪽에 자리하여 동상이라 이름 붙었고, 1914년 대아리, 수만리, 사봉리, 신월리 4개 리로 개편되었다. 마을의 자리가 초승달 모양과 같다 하여 이름 붙은 신월리는 옛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가 있어 이름 붙은 용연과 장군대좌혈의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검태가 있다. 사봉리는 마을 뒷산의 이름 사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봉은 이 산이 옆 마을 검태 뒷산의 장군대좌혈 명당자리 장군의 말이 먹이를 먹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 위에는 옛날 먹을 만들던 곳이 있어 마을 앞 시내가 먹물과 같아 유래된 묵계가 있다. 수만리는 조선 중엽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이 마을을 지나가다 이곳은 장차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 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대아리는 일제강점기에 저수지를 막기 위하여 마을을 옮겨 새로 붙인 이름이다. 원래 큰 골짜기라큰골이라는 이름의 대실이었으나 대실마을은 대아 저수지 속에 잠겨 있다. 옛 지명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설화 속에는 그 땅에서 희노애락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상면은 만경강의 첫물을 내는 밤샘을 품은 곳으로, 샘물이 땅을 적시며 굽이굽이 흘러 평야 지대의 젖줄이 되어 풍요로움을 건넸지만, 물을 대는 농수로를 내기 위해 대아저수지를 만들면서 큰 물골이 정든 고향을 수장시켜 버린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을 겪고 게다가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의 거점이 되면서 산골 마을 동상면은 여러 굴곡을 겪었다. 그렇다 보니 척박한 마을에서 모든 일을 겪은 어르신들은 홍시같이 말간 웃음을 지으며 추억에 잠기지만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응어리를 달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산골 마을 오지사람이라 불리던 동상면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다니 윤흥길 작가가 감탄하며 시집의 서평을 써 줄만 하다. 시집이 나오기까지에는 박병윤(전 동상면장, 1969년생)의 역할이 중요했다. 동상면 수만리 단지마을 출신의 박병윤은 고향에서 유년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가뭄이 들어 대아저수지에 잠겨 있던 마을이 모습을 나타내면 신바람 나게 달려가 비밀장소에서 개구지게 놀던 그였다. 그 시절의 추억은 훗날 면장이 되어 찾아온 박병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엮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과 마을에서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집을 내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일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시를 쓰기는 힘들었다. 글로 옮기지 못해 구술 형식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어르신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작년 8월부터 7개월 동안의 휴일에는 이야기를 찾아 17개의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고 채록해야 했다. 5살 어린이에서 100세 어르신까지 함께 울다 웃으며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어 둔 보석 같은 사연을 캐내 132편의 시로 엮어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는 감물 촉촉이 들인 시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슨 시를 낸다 혀~라며 손사래를 쳤던 동네 어르신들은 면장이라는 직책보다는 같은 마을 최순덕(1933년생)의 살가운 넷째 아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백성례 할머니와 박병윤 전 동상면장. 다섯 살의 박채언 어린이는 안아달라고 월월거리는 강아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내가 백 살잉께...라며 시어를 튼 백성례(1921년생) 할머니는 도려낸 땡감 자국같이 닳고 닳은 구구절절한 한평생의 사연을 풀어냈다. 아들 유경태는 체기처럼 얹힌 한 / 삭히고 또 삭이면서 살아오신 어머니. 언제나 맑고 고운 마음만 / 홍시감 씨처럼 / 톡톡 뱉어내시는 울어머니라는 시를 썼다. 암것도 바랄 게 없고 / 그냥그냥 웃고 살지 / 아들딸 걱정할까 아플 것도 걱정이여라는 말이 시가 된 시집을 받아든 백성례 할머니는 속에 쌓아놓은 응어리가 동장군 풀리듯 풀려나간 것 같소. 살아온 이야기 다 풀어내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홍시같이 말갛게 웃었다. 전국 8대 오지로 꼽혔던 산골 마을은 이야기 구슬이 꿰어지며 시인마을로 거듭났다. 가을이 무르익는 시기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는 시집을 들고 홍시가 어우러진 시인마을 언저리에서 정겨운 미소를 건네는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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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20 16:48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4)의암 주논개는 기녀였을까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조선의 재담꾼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논개를 소개한 첫 구절이다. 이 때문인지 논개는 왜장을 유혹하여 끌어안고는 물속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은 의로운 기생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논개는 장수 주촌마을의 선비인 신안 주씨 주달문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양반가의 자손이며 의병장이자 장수현감을 지낸 최경회의 부인이다. 주논개(朱論介, 1574-1593)란 특이한 이름은 개해인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인 4갑술생으로 태어난 사주에 따라 개해에 낳은 개 놓은 개란 뜻으로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다. 아들을 잃고 얻은 외동딸의 특이한 사주에 고민하다가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을 함부로 짓게 되면 귀신이 샘을 내지 않아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논개는 당시 훈장을 하던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다가 부친이 일찍 세상을 뜨자 모친과 함께 숙부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그러다 숙부가 장수의 부호 집에 민며느리로 팔아넘기려 하자 논개의 모친 고향인 경상도 함양으로 도주하여 지냈지만, 곧 발각되어 장수현감인 최경회(1532-1593)에게 불려가 횡령죄로 재판을 받으며 훗날 지아비가 될 그를 처음 만나게 된다. 논개 모녀의 억울한 사정을 접한 최경회는 무죄를 내리고는 오갈 곳이 없는 그들을 자신의 관저에서 일하며 기거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후, 부인과 사별한 뒤 담양부사로 재직할 당시 논개를 부인으로 맞아들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해주최씨의 족보(1975년 개정판)에 김씨와 민씨 두 정경부인과 더불어 최경회의 부실 의암부인 신안주씨로 논개 일화가 함께 올라가 있으며, 최경회의 일대기를 엮은 문헌에도 그 내용이 실려 있다. 화순 출신인 최경회는 1567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구, 장수, 무장현감과 영암군수와 담양부사 등 주요 관직을 거치다 임진왜란이 나자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간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 나자 상중임에도 의병을 모집하고 훈련시켜 의병활동하고, 고경명이 금산에서 순절한 이후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금산과 무주에서 남원과 전주 그리고 진주로 향하는 왜군을 격파한 뒤, 그 공을 인정받아 1593년 4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면서 진주로 부임한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전투인 6월 29일 진주성이 왜적에 함락되자 최경회는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다. 이 소식을 접한 논개는 나라와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한다. 기회를 엿보던 논개는 왜군의 승전 기념 연회에 관아 소속의 기녀들만 연회장인 촉석루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런 까닭에 기녀로 가장한 논개는 왜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남강의 바위 쪽으로 유인했다. 그리고는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양손으로 왜장을 풀리지 않게 껴안고는 남강에 몸을 던져 스무 살의 나이로 순절했다고 전해진다. 논개의 충절 이야기가 널리 구전되다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이다. 유몽인을 필두로 정약용 등이 논개에 관한 문장을 남겼고, 투신한 바위를 논개와 동일시하여 의로운 바위 의암(義巖)의 글자를 1722년 정대융이 새기고 충절을 기린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논개를 추모하는 백성들의 정서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시기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관기로 알려진 논개는 실리지 못한 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1739년에 이르러서야 진주 촉석루 곁에 사당인 의기사(義妓祠)를 건립하였고, 1846년에는 장수현감 정주석이 논개가 장수 태생임을 기리고 충절을 선양하기 위하여 논개 <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名碑)>를 장수에 세웠다. 장수에는 비가 세워진 곳을 기준으로 가운데를 준비(중비)마을, 비석 위쪽을 상비마을 아래쪽은 하비마을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 그 존재를 접한 일본인 순사부장이 비석을 깨버리라는 것을 장수 청년들이 비석을 밭에 몰래 묻어 보존한 뒤 광복이 되자, 논개 비를 캐러 가자!며 달려가 비석을 캐내 바로 세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54년 장수군민의 성금으로 논개 초상화를 모시고 사당을 창건하여 1974년 현 위치로 논개사당을 옮겨 <생장향수명비>도 함께 조성했다. 논개 초상화도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김은호의 그림을 윤여환의 그림으로 교체하여 표준영정으로 지정했으며, 저수지에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 생가터를 기리며 저수지 이름을 의암호라 개칭하고 주변에 논개 생가를 조성해 놓았다. 생가 정자의 단아정이라는 한자현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필이었으나 지금은 철거하고 한글현판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일본에는 논개에게 죽임을 당한 왜장을 영웅시한 일본인이 장수와 진주의 흙을 가져다 논개를 일본으로 따라간 첩으로 둔갑시켜 가묘를 만든 곳도 있다. 천인공노할 만행의 흔적이 기막히지만, 최경회와 논개의 묘는 진주에서 장수로시신을 옮기던 중 십이령 고개를 넘지 못한 채 장수를 지척에 둔 함양에 자리하여 전해지고 있다. 옛 관아 터인 장수군청 앞에는 천연기념물인 우람하고 아름다운 소나무 <장수 장수리 의암송>이 있다. 400여 년을 넘게 온갖 풍상을 함께 겪은 노거수를 주민들은 의암송이라 하고는 정성껏 보살피고 때론 나무가 건네는 힘을 받으며 논개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기녀로 기억되며 올곧게 평가 받지 못하는 의암 주논개의 위상 정립이 아쉽다. 돌아오는 10월 8일(음력 9월 3일)은 논개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가을빛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논개사당을 찾아 가을 단풍보다도 붉은 그 충절의 흔적을 새기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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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6 16:37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3)기억해야 할 코무덤

에비! 에비야! 위험한 것이나 더러운 것 등을 아이가 만지려고 할 때 사용한 경계의 말이다. 엄한 아버지나 무서운 대상을 지칭하는 말로 짐작할 수도 있지만, 귀와 코의 한자인 이비(耳鼻)와 귀와 코를 베어 가는 사람인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순사를 에비라 칭하기도 했다는데 그 말에는 무섭고도 애통한 선조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코를 벤다는 무시무시한 말. 상상하기도 싫지만, 중국 고대부터 죄인의 코를 베는 형벌인 비형(鼻刑)이 존재했다. 얼굴의 기둥으로 자리한 코의 의미를 크게 두는 것으로 한자인 스스로 자(自)는 사람 코의 상형이며, 코가 비뚤면 생각도 바르지 못한다는 중국속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형벌 중에 코를 자르는 것은 얼굴 정중앙의 코를 훼손하여 그 사람의 형상을 말소시키고 심리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형벌이었다. 그런데, 조선에는 형벌로 코가 베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죽은 병사는 물론이고 살아 있는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임환(1561-1608년)의 『습정유고』에는 무비자(無鼻者) 즉 코 없는 사람이란 시구가 전해지는데 코 없는 자 뉘 집 자식 인가 / 산기슭에 홀로 앉아 얼굴을 가리고 우네 / 적병이 날카로운 칼 휘둘러 바람이 이니 / 하나 베이고 둘 베이어 천 백인의 코가 달아났구나라는 애달픈 구절이 남겨져 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 남원을 비롯한 조선에서 왜군이 전리품이자 증거로 베어 간 코를 묻어 1597년 9월 조성한 무덤이다. 가로 폭이 약 49m 높이 약 7.2m인 봉분 위에는 불교에서 만물을 구성하는 지수화풍공을 상징해서 쌓아 올린 석탑인 오륜탑(五輪塔, 고린토)이 세워져 있다. 놀이터가 있는 귀무덤 공원이 옆에 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받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큰길 건너에 있다. 코무덤인 것을 귀무덤이라 한 것에는, 코를 자른 것은 야만적이니 귀무덤으로 바꾸었다는 기록과 코가 꽃의 일본어와 같은 하나라 발음되니 꽃무덤이라 칭하는 것을 피하려 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를 벤 수량에 따라 포상을 준다며 코영수증과 감사장까지 발행했다. 왜군은 코의 수를 늘리려 코를 잘라 담은 피투성이 대바구니를 허리춤에 차고 살아있는 조선인 코까지 베어 가져갔으며 더러는 코 베인 이를 인질로 데려갔다. 소금에 절여 온 코는 일본 각지에 묻혔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조선학자 강항(1567-1618년)은 교토 코무덤을 보고는 코를 쌓아 놓은 것이 하나의 구릉을 이뤘다 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사람들이 코무덤에 제사 지내려 제문을 강항에게 부탁하자 코와 귀는 서쪽에 묻혀 언덕을 이루었고, 큰 뱀은 동쪽에 묻혀 있다하고는 히데요시의 죽음을 숨기려고 부하들이 그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한 달간이나 앉혀 둔 것을 빗대어 소금에 절여 감추었지만 향기롭지 못하다라고 써준 제문이 『간양록』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은 코무덤을 적병의 신체를 잘 묻어주어 자비를 베푼 것으로 미화하고 힘을 과시하는 선전 장소로 활용했다. 코무덤 비석에는 조선군의 코를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그는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여워하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도 코무덤에 들르게 하였으며, 1799년 간행된 책 속 교토명소를 그린 그림에는 코무덤을 구경하는 서양인과 일본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개선했으며 태평성대에 공헌했다고 적었다. 19세기 그림과 다양한 교토명소 엽서에도 코무덤이 등장한다. 히데요시의 대표 유적 중 하나가 된 코무덤 석탑은 1969년에 호코지 절 석축과 함께 일본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고 문화재가 되었다. 이후 2003년 교토시에서는 귀무덤과 코무덤을 함께 표기해 놓고 다음과 같은 안내판을 세웠다.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목 대신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중략)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왜곡된 내용이 일부 수정되었지만, 코무덤 안에는 선조들의 원한이 그대로 봉인되어 있다. 남원에는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만여 명을 합장하여 모신 무덤으로 국가 사적인 만인의 총이 있다. 대부분 코가 잘린 채 수습되었을 것이다. 근처에는 왜군에게 끌려가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망향의 그리움으로 불렀던 조선가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원광대학교 양은용(1947년생) 명예교수는 코무덤을 찾아가 참배하고 남원 만인의 총으로 선조들의 코무덤과 넋을 봉안해 오고자 결심 한지가 벌써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바람을 못 이루고 있지만, 모시도록 노력해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해요라고 하였다. 최근 엄숙하게 진행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귀환을 가슴 벅차게 보면서 모시지 못한 선조들의 넋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흔적으로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침략자의 사당 근처에 있는 선조들의 코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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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8 16:56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2)이완용 둑과 불이 간척지

평생 배운 바를 가지고 어떤 일을 했는지 후세 사람이 이 마음을 알겠지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에 소장된 을사오적 이완용(1858-1926년)의 글이다. 이완용은 자신이 한 행적에 관하여 이처럼 스스로 위안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 최고 역적으로 여겨질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 내면에는 일말의 두려움이 있었던지 본인이 직접 묻힐 묫자리를 지정하고 묻혔던 익산 낭산 외에도 묘의 훼손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여러 장소에 가묘를 썼다.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현 성남시) 출신인 이완용이 서울에서 숨을 거두고 시신이 용산역에서 실려 와 익산에 묻힌 데에는, 1898년(고종 35년)부터 전라도 관찰사로 일했고 천재지변이 있을 때 백성을 위로하는 관직인 위유사도 지내면서 지역 사정에 밝았던 데에 있다. 하지만, 이완용이 천하의 명당이라 찾아놓은 낭산의 묘는 여러 사람에 의해 훼손되다 결국 그의 자손에 의해 폐묘가 되었고 그가 어명을 받들고 행한 일들은 지역의 통탄으로 남았다. 그 흔적으로 부안군 줄포와 군산시 옥구에는 이완용과 관련 있는 둑이 있다. 부안의 줄포면에는 오래전 원둑(언뚝)이라고 불렸던 곳이 있는데, 이곳은 1898년 이완용이 줄포 바닷가 땅이 해일로 침수했을 때 현지를 시찰하면서 바닷물을 막을 수 있는 둑을 쌓도록 군수한테 지시하여 생겨난 둑에서 유래했다. 당시 둑을 쌓고 난민을 구제한 이완용의 공덕을 기념한 이완용 휼민선정비가 현재 줄포면사무소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관직에 의해 백성을 보살피는 당연한 일이었으니 이완용의 공덕으로 보기엔 어설픈 흔적이다. 또한, 군산 옥구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이완용 둑이라 부르는 장소가 있는데, 지금의 오봉마을에 이어지는 길이다. 만경강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강변이나 갯벌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잦은 수해와 가뭄 그리고 염기 많은 토양은 안정적으로 농사짓기 어려웠다. 자신 소유의 땅이 없던 가난한 농민들은 부평초처럼 만경강 일대를 떠돌며 근근이 먹고 살았다. 이들의 노동력과 간척하기 수월한 만경강 일대를 나라에서 눈여겨보고는, 가난한 농민들을 모아 농지를 개간하도록 지원하고 나눠준 농지의 규모에 따라 세를 받고 관리하기 위해 균전사를 1890년에 옥구에 파견했다. 당시 일대가 이완용이 관장했던 곳이어서 이완용 둑으로 불린 것이다. 왕실 자금으로 확보된 척박한 땅을 농지로 개간하면 당분간 세금을 면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농부들은 피땀을 흘려 땅을 일구었다. 둑을 만들고 개간 과정을 거쳐 간척지로 전환된 땅은 염기를 제거하면 농지로 활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지만, 그 땅을 일구고 바닷물이 스며든 땅의 토질을 바꾸고 물을 원활하게 대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약속을 믿고 땅을 일구었지만, 균전사는 약속과 달리 소작료와 당분간 면제해준다는 세금까지 징수했다. 이에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왕실은 소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을 이어갔다. 길어지는 분쟁으로 불리한 입장에 놓인 농민들 앞에 외세의 자본이 손을 뻗는다. 이곳에 러일전쟁 시기 조선 땅으로 진출하여 훗날 조선의 간척왕이자 수리왕이라 불린 오사카 출신의 후지이 간타로가 등장한다. 일본의 생활필수품을 들여오고 미곡 등을 일본으로 반출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그는 턱없이 싼 조선의 황무지와 미개간 땅에 눈독을 들였다. 후지이 간타로는 개항장인 군산을 거점으로 내륙으로 뻗어가며 대규모의 땅을 헐값에 사들인 후, 소작 농업경영으로 높은 수익을 내고자 1906년 옥구와 익산 일대에 농장을 설립한다. 그리고 1914년 불이흥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옥구농장 이외에 강원도 철원과 평안북도까지 농장을 확장해 회사 이름을 딴 대규모의 불이농장을 운영하고 일본인 거주지인 불이농촌을 조성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불이흥업주식회사의 목적은 분명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3년에 걸쳐 만든 옥구의 불이 간척지와 1923년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옥구저수지는 일제가 당면한 과제인 인구증가와 식량부족의 문제를 조선에서 해결하려는 시범 모델이 되었다. 생계가 절박한 조선의 농민에게서 땅을 헐값에 사들이고, 대한제국 투자권유서에도 등장하는 고리대금업 수법으로 농민이 돈을 못 갚으면 땅을 강탈해 토지를 확보했다. 그렇게 확보된 600만여 평을 간척하여 농지로 일구고 물을 대기 위한 100만여 평 규모의 옥구저수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영구소작권 보장, 소작료 3년 면제, 간척 공사 임금 지급이라는 모집 광고를 내고 몰려든 가난한 농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불이 간척지를 일궈 일제의 대표적인 신천지 사업의 선전대상이 되었다. 후지이 간타로는 신천지 사업 즉 이상적인 일본농촌의 건설을 목표로 이민사업을 추진해, 출신지에 따라 불이농촌 안에 나라촌, 히로시마촌 등 일본 지명의 마을과 학교를 만들었지만 농민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이후 무리한 확장과 농업 공황기를 겪고 분쟁에 의한 재판을 받으며 경영난에 봉착하자 1934년 조선식산은행으로 회사가 넘어갔다. 하지만 그 만행은 지속되었고, 당시 저항한 농민들의 소작쟁의는 조직적으로 저항한 독립운동의 항쟁사로 남았다. 광복절을 앞둔 시기, 선조들의 뼈아픈 노역의 역사를 왜곡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일본의 군함도가 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고창 갯벌을 비롯한 한국의 갯벌은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완용의 둑에서 일제 수탈의 흔적과 희망을 품고 새만금으로 이어지는 간척의 역사는 생명을 품은 갯벌과 함께 이 땅에 깊이 새겨진 어제의 상처와 오늘의 역사를 새기며 훗날의 시간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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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04 17:0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1)한여름 유둣날의 물맞이

덥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선조들은 삼복더위를 지나는 날 중, 음력 유월 보름을 물의 날로 삼아 유두절(流頭節)의 풍속을 즐겼다. 유둣날이 되면 물맞이하러 가자!며 시원한 물줄기로 더위를 식히고 물로 액운을 씻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유두는 머리를 감거나 빗는다는 소두(梳頭), 폭포에서 물을 머리에 맞는 의미인 타두(打頭), 물머리 수두(水頭), 머리의 옛말인 마리를 물과 합하여 물마리, 물맞이라고도 불렀다. 유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 감고 목욕을 한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에서 유래하여 청(靑)을 상징하고 양기가 왕성한 방향인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최고의 유두수로 쳤지만, 지역마다 색다른 유둣날 물맞이 장소가 있었다. 유두는 신라의 이두(吏讀)식 표기라는 말이 전해지며 천 오백여 년을 이어온 우리 고유 명절로 알려져 있다. 음력 유월 보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고, 계음(?飮, 목욕재계하고 삿된 기운을 씻으며 즐기는 잔치)하는 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는 내용이 고려 문인 김극기의 문집인 『김거사집』에 남아있으며, 유두날 술을 마시는 유두음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 등 고려와 조선 시대의 다양한 문헌과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그 중,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음력 6월령에는 삼복은 속절(俗節)이요 유두는 가일(佳日, 좋은 날)이라 /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 사당에 올린 다음 모두 모여 즐겨 보세라는 대목과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 육자 한자 들고 보니 / 유월이라 유둣날 탁주 놀이가 좋을씨고라는 각설이 타령의 한 구절에도 유둣날의 풍습이 묻어난다. 유둣날에는 여름철 과일과 유두음식을 사당에 올리며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유두제사를 지내고 물가를 찾아 더위를 식히며 하루를 즐겼다. 『동국세시기』에 밀가루를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유두면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대표적인 유두음식인 유두면과 국물에 경단을 넣어서 만든 수단(水團)을 먹으면 액운을 막아주고 유둣날 국수를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장수한다고 믿었다. 또한, 농사를 중시 한 선조들은 유둣날에 논과 밭에서 농신제를 지냈다. 삼복더위를 거칠 때마다 벼가 빨리 자란다는 옛말이 있듯이, 장마가 지나고 더워지면서 여름 햇볕 아래에 각종 작물이 잘 자란다. 이때는 보리나 밀 그리고 참외를 비롯한 밭작물을 수확하는 때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수확을 하고 마지막 모내기와 김매기도 하며 농작물 관리에 더욱 힘써야 하는 음력 유월 보름 즈음은 농부들이 바쁜 농번기이다. 게다가, 병과 해충이 생기고 수확을 앞둔 농작물에 새나 짐승들이 꼬이기 쉬우니 병충해 관리를 잘하고 밭의 농작물에 짐승들의 피해를 잘 막아야 한다. 또한, 논에 물을 잘 대어 논물관리에 힘을 써야 할 때다. 하여, 병충해가 없고 논물이 마르지 않으며 논둑이 터지지 않고 풍년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논고사, 논고시, 밭꼬시, 논꼬, 논멕이기, 유두제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 농신제를 지낸 것이다. 유둣날 논과 밭에서 부침개를 부쳐 냄새를 풍기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은 벼와 밭의 농작물이 병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에 따라 유두음식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고사의 재물로는 팥시루떡을 찌고 간혹 팥죽을 쑤기도 했다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찰떡이나 밀떡과 송편 그리고 여의치 않으면 감자를 쪄 으깨어 떡 모양으로 만들어 논 물꼬와 논둑 밑에 놓았으며 떡을 꼬챙이에 꽂은 논꼬시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 유두제사와 농신제를 지낸 뒤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산이나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가에서 물맞이하며 유두놀이를 즐겼다. 또한, 선비들은 아예 탁족(濯足)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심신을 정화하며 풍류를 즐겼다 하니 피서의 원조가 유두인 셈이다. 지역마다 물맞이 명소가 있었는데 부안의 직소폭포와 완주의 위봉폭포 아래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 물을 맞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더위가 가신다. 또한, 유둣날 이름난 약수를 찾아가서 머리를 감고 여의치 않을 시 그 물이라도 적시면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고 했는데, 순창에는 물맞이 명소로 약수가 나는 샘물이 있다. 지금도 맑은 물을 내어주고 있는 구림면의 물통골 약수와 샘의 물이 구불구불 용의 모양으로 흘러가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은 인계면의 두룡정(頭龍井)이 유명했다. 두룡정은 단오 때부터 인산인해를 이루던 곳으로 약수가 효험이 크다고 소문난 유둣날 물맞이 명소였으나 이제는 그 흔적만 남아 아쉽기만 하다. 유둣날 목욕재계하고 제를 지내던 것은 지금까지도 몸가짐을 바로 잡기 위한 경건한 준비로 남아있지만, 유두절이라 불렸던 오늘날 유두는 명절의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작년 장마로 힘든 시절을 지내고 무더운 여름을 지내다 보니, 물맞이하던 선조들의 풍속도 논꼬시를 몰래 빼먹던 개구쟁이들의 모습도, 어머니를 따라 샘가에서 머리에 물을 축이던 어린 시절의 오랜 기억들도 아련하다. 더위와 오랜 유행병에 지치다 보니 옛 풍속에 남겨진 의미와 흔적들이 더욱 소중하다. 돌아오는 유둣날에는 집에서 유두국수를 해 먹고 흔히 말하는 랜선여행으로 물맞이 명소를 다니며 그 시원함에 마음을 싣고 모두의 안녕을 기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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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21 16:44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0)백제인의 취향과 솜씨

7.7cm 높이의 작은 <유리제 사리병>. 긴 목에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이 흐르는 몸체의 녹색 유리가 뿜어내는 빛이 영롱하다. <유리제 사리병>에는 여덟 잎의 연꽃 봉오리 모양의 금제 마개가 꽂혀 있고 <유리제 사리병>이 안전하게 놓이도록 네모난 받침을 붙여 놓은 <금제사리병받침>은 연꽃이 피어난 모양의 <금제연화대좌>와 함께 어우러져 더욱 기품있고 조화롭다. 천상(天上)의 아름다움이라 칭해지는 녹색 <유리제 사리병>은 백제 무왕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유리제 사리병>은 찬연한 금빛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제사리함>에 모셔져 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가장 성스러운 대상으로 숭상되는 사리를 유리병에 직접 담은 이유로는 당시 유리가 금보다 더 귀했기 때문이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기들은 당대 최고급의 재료와 최고의 기법을 이용해서 만들었으며, 불탑에 사리를 봉안할 때 사용하는 용기, 공물, 부장품과 함께 귀중한 사리를 담아 보관하고 장엄(莊嚴)하던 사리장치를 사리장엄구로 칭한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1965년 왕궁리유적에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듬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사진 자료를 통해 오래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도 석탑 기단부가 토단에 매몰된 상태로 기울어진 모습이 마치 피사의 사탑 같은 느낌이다. 조속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일어 1965년 10월부터 해체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석탑의 해체 작업 중 1층 옥개석 상면과 기단부 심초석에서 사리장엄구가 확인되었다. 옥개석 상면 동쪽 사리공에는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한 <금제사리내함>이 < 금동사리외함> 내에 있었고, 서쪽 사리공에는 금강경판이 봉안된 <금동경판내함>이 자리했다. 그리고 사리공 바닥에는 실로 꿴 오색영롱한 유리구슬이 발견되었다. 기단 내부의 심초석에는 品자 형의 방형 사리공 3개가 확인되었는데, 동편의 사리공에서는 광배와 대좌를 갖춘 <금동여래입상>과 불교 의식 때 흔들어 소리를 내는 <청동요령>이 발견되었고, 북편의 사리공에는 향류로 보이는 흑색 유편과 철편이 수습되었으나 서편의 사리공은 비어 있어 아쉽게도 도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는 <익산 미륵사지 사리장엄구> 그리고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가 전해진다. 577년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왕흥사지 사리병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백제의 사리장엄구로 민무늬이다. 반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639년에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백제 왕후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사리봉영기와 함께 나온 금제사리병은 뚜껑부터 몸체 전체에 연꽃무늬와 넝쿨무늬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의 제작 시기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금제사리내함> 표면은 미륵사지 금제사리병과 비슷한 연꽃무늬 등이 같은 백제 장인의 솜씨로 착각할 정도로 흡사하다. 특히, 불경을 새긴 <금강경판>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희귀한 유물로, 금강경의 내용을 19판에 새겨 한 첩으로 만들었다. 각각의 판에는 17행 17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경체의 문자로 금강경을 눌러 찍은 것이 뚜렷하며, 은판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경판의 글씨체를 분석한 결과 백제 무왕대로 제작 시기를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왕궁리 오층 석탑이 자리한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일대로 예로부터 왕검이, 왕금성, 왕궁평이라 불렸다. 왕궁의 흔적과 관련된 지명이 연상되지만, 여러 문헌에서 이미 폐사된 터에 탑만 남아있는 왕궁리사지로 기록이 되어 있고 고지도에서도 석탑으로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는 왕궁리유적이 궁성으로 사용되다가 사찰로 바뀐 것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 시기의 궁성 유구와 백제 말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사찰 유구로 구분이 되고 있다. 궁성 내부에는 건물지 등과 정원유적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서북편에서는 대규모의 공방 시설과 함께 화장실 유구가 확인되었다. 공방 시설은 왕궁에서 필요한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으로, 공방지에서는 금, 유리, 동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련과 용해 작업을 하면서 불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소토와 노지, 폐기장과 석벽시설과 관련 유물 등이 확인되었다. 이는 아름다운 공예품을 비롯한 <유리제 사리병>도 백제인의 뛰어난 솜씨로 직접 제작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품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를 일컬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는 호사스럽고 다양해야만 정성이 들었다거나 또 아름답다는 속된 솜씨가 아니라 목욕제계하고 기도하면서 만든 청순한 아름다움이 이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솜씨를 극찬한 것이다. 석탑에 갇혀있다 나타난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타임캡슐처럼 많은 이야기를 건네주며 우리를 백제의 시간으로 안내해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했던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는 2020년 국립익산박물관이 생기면서 55년 만에 고향 익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행방이 궁금한 <유리제 사리병>에 담겨 있던 16립의 사리는 보수를 마친 1966년 왕궁리 오층석탑 안에 봉안되었고 그 중 5립은 부석사 삼층석탑에 분안(分安)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땅히 어디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는 금강경의 구절이 울림을 전해온다. 천년이 넘는 시간이 잠겨있는 왕궁리유적에서는 켜켜이 쌓인 백제의 흔적을 오롯이 찾아내는 연구와 발굴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수고로운 모든 손길에 감사를 보내며 국립익산박물관을 찾아 백제인들의 세련된 취향과 솜씨를 만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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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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