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2023년 10월 4일자 10면에 김정일씨의 글 “전봉준 공초록(심문기록)에 무장은 동학농민군의 ‘기포지’가 아닌 ‘경유지’였다.”라는 글을 보고도 나의 농사일 등이 바빠서 반론의 글을 쓰지 못했었다. 늦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반론을 쓰고자 한다. 첫째, 이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나온 이야기인데, 공부는 하지도 않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런 엉터리 논리가 나와도 우리가 아무런 반론을 안 하는 것을 보면 이 글에 동의하는 것으로 인식될 것 같아서다.
먼저 사발통문부터 시작해야겠다. 1985년 신용하 교수께서 「고부민란의 사발통문」이란 글에서 “현재의 ‘사발통문’은 ‘사발통문원본’도 아니고 ‘어떤 분이 고부민란에 관한 훨씬 뒤의 회로록의 극히 일부를 필사한 것’이라고 본다”하였다. 그렇다고 이 문서가 후대에 만들어진 ‘위문서(僞文書)’라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어떤 동학도가 자기도 참가한 계사년(1893) 등장(等狀)과 갑오년 고부민란 및 농민전쟁(1894)을 회고하여 기록한 ‘진짜’ 회고록을 일부 필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여기까지이다. 만일 이 이상 무슨 말을 자꾸 붙인다면 이는 사족(蛇足)일 뿐이다.
둘째는 ‘특히 주목할 점은 3월 20일 무장이 기포지가 아니라 고부에서 기포해 전주를 향했고 경유지는 무장, 태인, 금구를 거처 전주까지 진출했다고.’ 진술했단다. 그러면서 공초록에는 ‘동학혁명군의 행진 경유지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견강부회로 1894년 3월 무장이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로 둔갑했단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공초록에 ‘供. 所經邑則由茂長·古阜經泰仁,’ 여기에서 由茂長의 由자는 말미암다, 부터, 원인, 까닭 이유, 움, 새싹 등으로 원인이나 시작점을 의미하거늘, 마치 경유지인 양 해석하는 것은, 한문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런 경우가 견강부회가 아니겠는가? 이 부분 ‘전봉준판결선고서원본’ 세 번째 장에도 나오니 살펴보시기 바라고, 또한 무장은 전주의 반대방향으로 왕복 이백리 길도 넘는데, 왜 갔다와야 되는가? 또 하나 ‘고부에서 기포해 전주를 향했고’라고 했는데 김덕명포, 김개남포, 손화중포인가? 아니면 또 다른 포(包)가 있는가?
무장기포는 고부봉기를 훨씬 뛰어넘는 김덕명 김개남 손화중 대접주와 전봉준, 그리고 이들의 스승 격으로 배후 역할을 하는 서연주까지도 함께 모의(1965년 11월 5일자 중앙일보, 이치백 기자, 동학란과 전봉준 장군)하였고, 이어서 무장포고문과 4대명의 12조 군율을 발표하고 지역의 경계도 무시한 채, 무장, 고창, 흥덕 3현의 농민군 3,000여 명이 3일째 되는 3월 23일 밤, 고부성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머물면서 고부군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았던가? 이 부분에 대하여 정읍 시민 그 누구도 이야기 한 사람을 보지 못했고 오로지 동학의 모든 것을 정읍에서 소유하고자 일부 시민들과 정치인들은 지금도 판을 벌리고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동학농민혁명에 애착을 가지고 선양사업을 비롯한 명예회복에 관하여 애쓰고 노력한 부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고 함께 가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본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더라도 처절한 죽음이나 고통 없는 곳이 몇 곳이나 되던가?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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