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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 후백제의 도성과 궁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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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의 궁예 궁성에 있었던 석등의 모습.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우리고장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다. 이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전북일보에서는 그 일환으로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월1회 연재한다.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던 문재인 정부시절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궁예의 궁궐터를 남북이 공동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북공동조사는 실현되지 못했다. 

비무장지대 안 궁예의 궁궐터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905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송악에서 철원의 풍천원으로 도성을 옮기면서 조성했다.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풍천원은 궁예의 도읍지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의 둘레는 1만 4421척이고, 내성의 둘레는 190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풍천원의 석등 2기가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지만 비무장지대 안에는 아직도 궁예의 궁궐터가 옛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후백제 궁성에 대한 기록

전주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후백제의 수도였다. 그렇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후백제의 궁궐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 고적 조에는 후백제 궁궐에 대한 서술 자체가 없다. 다만 고토성(古土城)에 대해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로 왔던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도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이다”는 언급만 있을 뿐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22년(순조 22) 호남을 여행하면서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담헌 이하곤은 “전주는 견훤이 웅거하던 옛 도읍지이다. 속언에 전해오기를 견훤이 서산 봉우리에 별궁을 짓고 남쪽 높은 봉우리에 철교를 가설하여 옛 궁터를 왕래했다고 한다.”고 하여 견훤에 대한 전설만을 적어놓았다. 

이처럼 지리지나 명사들의 전주방문기에서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견훤궁성에 대한 흔적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백제의 흔적을 지운 안남도호부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다. 도호부는 본래 당나라 초기에 광대한 속지(屬地)의 지배를 위하여 설치했던 기관이다. 이 기관은 군사행정조직으로 정복지나 속지의 반발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후백제왕 신검이 고려에 항복해 후백제가 멸망했지만 왕건은 후백제 세력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후백제 부흥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후백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궁성 안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흔적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렇게 전주에서 후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온갖 위력을 행사하다가 951년(광종 2)이 되어서야 안남도호부를 고부로 옮겼다. 고부는 백제의 중방성이 있던 곳으로 후백제 시대에도 오월과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그 후 안남도호부를 995년(성종 14)에 영암으로 다시 옮겼다가 1019년에 폐지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가 후백제의 부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후백제 도성의 흔적

이처럼 왕건은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서 후백제의 궁성을 철저히 파괴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성의 흔적까지는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25년 3월 육당 최남선이 전주를 방문할 때 보았던 후백제 옛 성터에 대한 묘사가 〈심춘순례〉에 적혀있다. 

 

반대산 밑에 높다란 판자로 담장을 두르고 지붕에 창을 낸 집채가 줄줄이 보이는 것은 물을 것도 없이 감옥인데, 그 곁에서부터 철로 쪽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 한다. 대개 마한 이래의 옛터를 그대로 사용해 내려온 듯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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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처럼 멀리 숲정이로 이어지는 후백제 토성-1916년 유리건판 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최남선이 1925년에 경편열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후백제 옛 성의 흔적은 고토성에 있었던 옛 전주형무소에서 숲정이로 이어지는 토성이었다. 이 토성의 흔적을 1916년에 전주 외곽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이 보았던 바로 그 후백제 토성이다, 

숲정이에는 1928년에 가타쿠라(片倉)방적회사 전주제사소(현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가 들어섰다. 당시 제사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엽서에 옛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앞으로 허물어진 토성이 자리해 있는데 높이가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인다. 후백제가 멸망한 지 천년이 흘렀는데도 이 정도 높이의 토성이 남아있다면 본래는 훨씬 높고 견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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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쿠라방적 전주제사소 도로 앞에 자리한 후백제 토성. 출처=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이 토성은 숲정이에서 전주동초등학교 뒤에 있는 옛 여단(厲壇)을 통과해 산등성이를 따라 기린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941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 수록되어 있는 〈전주부경역연혁도〉를 보면 인봉리를 중심으로 옛 성벽을 2중, 3중으로 만들어 방어망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후백제의 궁성은 옛 인봉리, 현 문화촌이나 전주제일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의 궁궐터

〈전주부사〉에서는 전주고등학교 뒤쪽 물왕멀 일대를 후백제의 궁궐터로 추정했다. 왕성의 주초석으로 쓰였을 법한 커다란 들들과 수많은 작은 돌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고, 풍수지리상 사신상응형으로 궁성을 둘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물왕멀 마을을 재개발하면서 지층을 파보니 그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유구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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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경역연혁도에 실린 옛 성벽지(빨간색). 출처=<전주부사>

현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중노송동 기자촌 재개발구역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유의미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은 인봉리 외곽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이다. 문화촌으로 연결되는 하부 구역에서 폭 4미터 길이 40미터쯤 되는 도로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언덕 상층부에서는 후원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건물이 불타면서 쏟아진 불 먹은 통일신라 후기의 기와들이 층을 이뤄 쌓여 있었다.

종광대 재개발구역의 발굴조사에서도 후백제의 토성유구 130여 미터가 발굴되어 현지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종광대는 전주동초등학교 뒷산에 있었던 여단 일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전주부경역연혁도〉에서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했던 옛 성벽지가 지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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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광대재개발구역 후백제 토성 발굴 현장.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오는 2030년까지 낙수정 일원에 후백제역사문화센터가 건립된다. 국비 450억 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다. 후백제역사문화센터에서는 후백제의 역사와 흔적을 조사해 그 성과를 시민들과 공유하게 된다. 이 사업과 더불어 전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후백제의 고도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도 지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후백제의 도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이다. 전주시민이라면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후백제의 유적이나 궁성을 깔고 있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왕건이 아무리 후백제의 역사를 지우려 했어도 그 흔적은 나오기 마련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손상국 프리랜서 PD는 JTV에서 우리고장의 역사문화 프로그램인 '전북의 발견'을 기획해 5년간 방송했다. 저서로 〈최치윈을 추억하다〉 〈전라감영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기록〉이 있고, 현재  〈전북문화살롱〉에 '문화유산의 안과 밖'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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