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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에 두 가지의 창건설화가 전한다. 진흥왕 창건설화와 검단선사 창건설화이다. 그 중 검단선사 창건설화는 검단이 연못에 살고 있는 용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당시 선운사 인근에 도적떼가 많았는데 검단선사가 이들을 불법으로 바르게 이끈 후 소금 굽는 법을 알려주어 생업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검단선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검단(黔丹)이라는 이름에서 얼굴이 검붉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외모에서 인도에서 온 승려로 보기도 한다. △ 검단선사가 알려준 소금 굽는 법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도적떼를 교화해서 소금 굽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꽤 신빙성이 있다. 우리의 전통 소금생산법이 바닷물을 불로 때서 구워 만드는 자염(煮鹽)이기 때문이다. 「도솔산 선운사 창수승적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마두치 아래 개태사가 있으니 검단 선승이 마음을 연마하며 수도하던 도량이다. 그 아래 바닷가에는 검단리(黔丹里)가 있으니 신승(神僧)이 처음 염정(鹽井)을 만들고 여기에서 소금을 구워 절에 돌아가며 바치게 하였다. 그 법이 이어 내려와 아직도 소금을 직접 갖다 바치는 관례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사적기는 1707년의 기록이다. 검단선사가 염정을 만들어 소금 굽는 법을 알려주어 검단리에서 선운사에 보은염을 바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검단리는 어디이며, 염정은 또 무엇인가.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에 선운사 너머 바닷가에 검당포가 있고, 그 앞바다에 염정이라 표시되어 있다. 1872년 무장현지도에는 검당리 앞 바다에 ‘밀물이 들어오면 깊이가 1장이고, 조수가 물러가면 모래사장에 염장이 있는 곳(潮進則水深一丈 潮退則鹽場與沙場處)’이라 적혀있다. 동여도에 검단리는 없지만 검당포(檢堂浦)가 있다. 1872년 무장현지도에도 같은 한자를 쓰는 검당마을이 표기되어 있다. 위치상 동일한 곳이다. 검단이 발음하기 쉬운 검당으로 음이 전이되면서 한자도 읽기 쉬운 글자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염정과 염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925년에 최남선이 호남지방을 여행하면서 썼던 기행문인 『심춘순례』에 이에 대한 힌트가 있다. 부안 유천리에서 소금 굽는 현장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소금 굽는 것을 보기 위해 길을 내놓고 일부러 갯바닥으로 내려섰다. 해변에서 물이 들었다가 잘 빠질 지세를 가려서 흙을 긁어모아 대접 엎어놓은 것처럼 만들고, 속에는 솔가리 같은 것을 넣어서 마치 잿물시루처럼 만들었다. 밀물 짠물이 들어와 위에 고인 것이 개흙에 걸려서 아래로 내려가면, 밑에는 받을 통이 있어 받쳐 나온 물이 거기 가서 담긴다. 그 옆구리에 샘구멍을 만들어 쓰는 대로 퍼내게 한 것이 ‘섯등’이라는 것이다. 섯등이란 것은 요컨대 바닷물을 한 번 걸러내려 하는 잿물시루의 시루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섯등이 다섯씩 열씩 늘어서 있는 곳을 ‘염벗’ ‘염밭’ ‘염벌’이라 하여 그 산업적 지위가 육상의 전답보다 더 귀중함이 있다. 염벗에는 또 몽고인의 장옥(帳屋)처럼 둥그렇게 지은 초막이 여기저기 서있다. 그 안에 커다랗게 부뚜막을 하고 두어 칸통이나 됨직한 함석목판인 소금가마를 그 위에 붙였는데, 아까 그 물을 길러다가 붓고, 한나절 남짓 밑으로 불을 지피면 수분은 증발되고 염질만 결정되어 소금이라는 귀중한 산물이 생기는 것이다.” 이 기록을 조금 보완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다. 최남선이 갯벌에 내려가 소금 굽는 모습을 볼 때는 그 이전단계가 진행된 후였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나면 쟁기로 갈아엎는다. 이렇게 하면 염기를 머금은 개펄 흙이 햇볕과 바람에 잘 마르게 된다. 이 마른 흙을 써레로 모아서 솔가지를 얹어 만든 구조물 위에 올려놓는다. 밀물이 들어오면 햇볕에 말라 소금기를 머금고 있는 개펄 흙이 바닷물에 걸러지면서 짙은 농도의 소금물이 그 옆에 파놓은 웅덩이에 고이게 된다. 이 웅덩이가 ‘섯등’으로 한자어로는 염정(鹽井)이다. 이러한 염정이 여럿 모여 있는 곳이 ‘염밭’ ‘염벌’로 불리는 염장(鹽場)이다. 염정에 고인 짙은 농도의 바닷물을 퍼다 염막에서 불을 때서 소금을 구우면 장작과 시간이 절약된다. 바닷물을 그냥 끊여서 만드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경제적이면서 효율적인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최남선은 유천리의 소금 만드는 곳을 지나며 그 모습이 “야영같이 산재한 염막(鹽幕)”이라 했다. 군대가 야영하기 위해 들판에 쳐놓은 수많은 천막처럼 당시 유천리 해안가에 엄청나게 많은 염막이 있었다. 이는 줄포만의 맞은편에 있는 고창 검당리의 갯벌도 마찬가지였다. △ 사라진 검당마을 1872년에 제작한 무장현지도를 보면 선운산 너머 서쪽 바닷가에 심원면 검당리가 자리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심원면의 마을이름에 ‘검단’이나 ‘검당’이란 이름 의 마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된 일일까. 이는 1899년(고종 36)에 있었던 천재지변과 관련이 있다. 1899년 1월, 엄청난 해일이 서해안을 덮쳤다. 아마 서해바다에서 큰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쓰나미가 밀려왔던 것 같다. 1899년 1월 17일자 황성신문은 ‘서울 지진’이라 하여 “그저께 오후 9시에 땅이 크게 진동하여 집이 흔들리고 집안에 있는 사람이 편히 앉아있지 못하고 강의 얼음이 크게 갈라져,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서해에서 일어난 지진이 서울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때 서해안에 몰아친 해일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남도의 피해가 컸다. 이 해일로 바닷가에서 소금을 구워 생업을 이어가던 심원면의 몇 개 마을이 사라졌다. 검당마을도 폐허로 변해 사라졌다. 포구와 염장이 사라졌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검당마을 뒤쪽 사등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 천일염에 밀려 사라진 자염 자염은 짠맛이 덜하고 미네랄이 풍부해서 영양가가 높은 천연소금이다. 이렇게 품질이 뛰어난 소금임에도 값싼 소금의 등장에 설자리를 잃었다. 천일염이라는 새로운 소금제조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천일염은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바람과 햇볕의 힘만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얻는 소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인천에 만들어진 ‘주안염전’에서 최초로 천일염을 생산했다. 이 염전은 일본인이 조성했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할양받은 대만에 가보니 염전에서 천일염을 생산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천일염 제조법을 습득한 일본이 조선병합을 앞두고 주안염전을 만들었다. 값비싼 자염시장을 잠식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한일병탄 이후 자염의 생산 상황은 해가 갈수록 악화됐다. 조선총독부와 결탁한 일본인들이 서해안 갯벌을 간척해서 대규모로 염전을 조성했다. 간척지에서 쏟아지는 천일염 때문에 자염은 경쟁할 수 없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 자염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맥이 완전히 끊어졌다. 썰물에 갯벌이 드러나고 있는 옛 검당마을 앞바다. 필자 촬영 △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검당 앞바다 2010년 2월 1일, 람사르협회에서는 고창․부안 갯벌을 람사르습지로 지정했다. 심원 사등마을 앞 바다도 람사르습지에 포함되어 있다. 옛날 자염을 생산하던 곳이 이제는 다양한 생명체를 품는 건강한 습지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 갯벌이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곳에서 전통소금인 자염을 다시 생산할 묘안은 없을까. 미네랄이 풍부하고, 천일염에 비해 짠 맛이 덜하면서 감칠맛이 나는 자염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급 식재료이다. 검단선사의 훈훈한 이야기가 서려 있어 더 맛깔날 이곳의 자염이 우리 식탁에 오를 날을 기대해 본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태조어진은 지난 2012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태조어진이 국보로 승격되자 전주시민은 환호했지만 한편에선 이 초상화가 과연 국보로서 가치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있었다. 그것은 이 어진이 경기전에 1410년 처음 봉안되었던 초상화가 아니라 1872년에 이모되어 그 역사가 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조어진의 국보 지정 이유 서양의 초상화가 감상용으로 제작되었다면 우리의 초상화는 대부분 의례용으로 제작되었다. 경모하고 숭배하는 대상으로서 일단 그림이 완성된 후에는 보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당이나 영당의 감실에 족자형태로 걸어놓아 영정(影幀)이라 불렀다. 이 영정이 오래 되어 석채물감의 박락이 이루어지거나 비단이 해지게 되면 이모를 하게 된다. 원본과 똑같이 그려 다시 봉안하고, 원본은 세초하여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이러한 관습 때문에 오래된 초상화의 원본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조선 태조어진. /출처-「왕의 초상」도록 1410년 경기전에 처음 봉안되었던 태조어진도 1763년에 한차례 수리된 후, 1872년 서울 영희전본 태조어진을 범본으로 이모하여 경기전에 다시 봉안했다. 그렇다면 이 이모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원본이 아니기에 모조품이라 해야 할까. 그런데 이 이모본은 범본의 도상을 충실히 반영한 초상이었다. 이모에 동원된 화원들이 조선 최고의 실력을 갖춘 화사들이었고, 조선 초상화의 전통에 일호불사 편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의 정신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었다. ‘털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는 초상화 제작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어진이모도감을 설치해 조정대신들의 감수를 받으며 어진을 이모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범본의 초상이 충실히 구현되었다. 이를 입증해주는 증거가 어진의 오른쪽 눈썹 위에 보이는 물사마귀이다. 보기 싫은 사마귀마저 그대로 수용해 범본 그대로의 얼굴을 그렸다. 이를 통해 경기전의 태조어진이 이모는 했지만 태조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이모본이긴 하지만 처음 봉안되었던 어진과 진배없는 작품이다. 태조어진을 국보로 승격한 데에는 이러한 작품성과 역사성, 그리고 조선의 왕을 그린 어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희소성도 작용했다. △그 많던 조선왕들의 초상은 다 어디로 갔을까 조선의 왕들은 태조로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진을 그렸다. 태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기록상으로 26축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이렇게 많은 조선왕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현재 남아있는 어진은 경기전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의 전신상 한 점과 고궁박물관 소장 영조의 반신상 한 점, 그리고 초상의 절반이 불에 탄 철종의 전신상 한 점뿐이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도 남아 있지만 이 초상화는 진전 봉안용 어진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조선왕들의 초상은 다 어디로 갔을까. 영흥 준원전의 태조어진(1913년 촬영). 경기전 어진이 노년의 모습인데 비해 중년의 모습이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서는 세종 26년(1444) 경복궁 안에 선원전을 건립해 태조와 태종, 그리고 왕후의 초상을 봉안했다. 이후 역대 왕과 왕후의 초상들이 이곳에 봉안되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어진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몽진 길에 올랐다. 이때 선조는 겨우 종묘의 신주만을 챙겨 자신의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왜군에 점령된 서울은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이 불에 탔다.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로부터 명종까지의 어진도 재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외방에 태조 진전을 세워둔 것이었다. 태조의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을 비롯해 경주의 집경전과 평양의 영숭전, 그리고 전주 경기전과 개성의 목청전이다. 외방에 있던 다섯 곳의 진전 중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기전과 준원전의 태조 어진이 보전되었다. 이 밖에 세조의 어진 한 점이 임진왜란의 전란을 피해 온전할 수 있었다. 세조가 묻힌 광릉의 능침사찰인 남양주 봉선사의 진전에 세조의 어진이 별도로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임진왜란으로 태조와 세조를 제외한 조선 전반기 왕들의 어진이 모두 사라졌다. 조선후기 창덕궁에 다시 선원전을 건립해서 숙종․영조·정조·순조·헌종의 어진을 차례로 봉안했다. 궁궐 밖 남산 아래에 영희전을 건립해 이곳에도 어진을 이모해 봉안했다. 조선이 망한 후, 1921년 이왕직에서 창덕궁 내에 신선원전을 12실로 건립해 남아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을 한데 모아 봉안하고 향사를 지속했다. △전쟁보다 무서운 화마 창덕궁 신선원전에는 추존왕을 제외하고 조선의 27대 임금 중 10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이 어진들에 다시 시련의 날이 왔다. 6.25전쟁이었다. 어진은 창덕궁 신선원전에서 부산국악원의 창고건물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1954년 12월 10일 새벽, 어진이 보관된 용두산 일대의 피난민촌에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불어온 강풍으로 불길은 판자촌을 전소시키고 순식간에 어진이 보관된 창고로 번졌다. 이 화재로 영조의 반신상 한 점, 초상의 절반이 불에 탄 철종을 비롯한 추존왕인 익종․원종의 어진, 연잉군의 초상 한 점 등 겨우 5점만이 살아남았다.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부산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부산국악원 창고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어진들은 모두 부산으로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그러지 않았던 걸까. 1907년 7월 23일 순종은 제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을 반포했다. 이 칙령은 왕실과 국가의 제사를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어진도 포함되었다. 어진에 대한 제례를 줄이기 위해 외방에 있는 어진 모두를 선원전으로 이안하도록 규정했다. 궁궐 밖에 봉안된 어진 중에서 경기전과 준원전의 태조어진만이 이 칙령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만약 이러한 예외를 두지 않았더라면 경기전의 태조어진도 다른 왕들의 어진처럼 부산화재 때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호남사람들이 지켜낸 태조어진 태조어진이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부산화재와 같은 재난을 피해갔던 행운도 있었지만 호남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기전이 창건되었을 때부터 전주사람들은 어진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경기전 인근에 있던 향교에서 나는 아이들 글 읽는 소리와 회초리 맞는 소리가 성령의 휴식을 방해한다하여 향교를 화산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감사 이광과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의 도움으로 경기전에 있던 태조어진과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 깊은 곳으로 옮겼다. 이때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조선왕조실록과 태조어진을 옮겼을 뿐 아니라 37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곁을 지키며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냈다. 이처럼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조선왕조의 본향에 봉안되어 임진왜란과 6.25전쟁 등 온갖 전란과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그 과정 속에서 호남사람들이 조선왕실의 본향이라는 자부심으로 어진을 지켜낸 이야기는 초상화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어진이 봉안되었던 본래의 자리에 안치되어 있어 유산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를 제대로 발하는 법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1815년 가을, 전주 한벽당에서 시회가 열렸다.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과 전주의 선비들, 그리고 초의선사가 이 시회에 참여했다. 초의는 승려신분이었지만 강진에 유배 와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워 시에 능했다. 이 시회에 참석한 전주의 선비 중에 김기종(金箕鍾, 1783〜1850)이 있었다. 김기종과 초의선사는 이 시회에서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이 만남이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오늘날 우리 고장이 추사 금석문의 보고로 자리매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효에는 유자와 불자가 따로 없다 김기종의 가문은 효자집안으로 유명했다. 부친 김복규는 효심이 지극하여 순조 23년(1823)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김기종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효자였다. 이렇게 효심이 강한 김기종이 한 인물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다. 그 인물은 진묵(震默, 1562~1633)이라는 승려였다. 진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의 승려로 민초들의 아픈 삶을 보듬어 생불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출가한 승려신분이었지만 자신이 거처하던 아랫마을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정성을 다해 봉양했다. 외아들로 출가해서 대를 이을 후손이 없어 자신의 제사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천년 동안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모친이 타계하자 손수 제문을 지어 애끊는 정을 표현하고, 유양산 ‘천년향화지지(千年香火之地)’에 장사지냈다. 이곳에서 향을 밝히면 풍년이 들고 가정이 평온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진묵의 어머니 묘 앞에는 향불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진묵대사의 효성에 감동한 김기종은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했다. 당시 민초들 사이에서는 진묵의 수많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설화들을 수집해 한벽당 시회에서 만났던 초의에게 집필을 부탁했다. 초의는 진묵의 행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대사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한사코 거절하다 결국 불가에서 출가한 후 부모자식 간에 인연을 끊는 세태의 잘못을 알려주기 위해 진묵의 소전을 쓰기로 했다. 초의는 초고의 집필을 마치고 제주도에 유배 가있는 절친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내 검토해달라고 부탁했다. 추사는 원고를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다. 진묵대사의 행록은 바로 남아있는 옛사람의 은혜와 향기로운 흔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디마디가 다 향이어서 오직 이것만으로 진묵대사의 행록을 다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겨자씨가 수미산을 받아들인다고 했으니 진묵대사도 기껍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전후의 기서(記敍)는 매우 좋아서 다시 정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렇게 김기종과 초의선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초의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는 김기종 생전에 발간되지 못했다. 사후 7년이 흐른 1857년(철종 8)이 되어서야 완주의 봉서사에서 간행되었다. 봉서사는 진묵이 일곱 살 때 출가했던 절이자 만년을 보낸 곳으로 이곳에는 진묵의 영당과 부도가 남아있다. △김복규 김기종 정려각 1850년 김기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853년(철종 4)에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부자지간에 효자정려를 하사받은 가문의 경사를 맞아 1855년 김기종의 장남 영곤이 추사를 방문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추사에게 비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유배와 2년간의 북청 유배를 끝내고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고 있었다. 영곤은 정려비를 세울 커다란 빗돌을 마련해 두고 여기에 맞추어 가지고 온 한지를 추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추사는 정려비는 크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며 한지를 작게 잘라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때 추사는 비각에 걸 수 있도록 현판의 글씨도 함께 써주었다. 효행의 덕으로 경사스러움이 넘치는 집이라는 ‘효덕연경지각(孝德衍慶之閣)’과 2세에 걸친 효자각이라는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이다, 이외에도 추사는 편액 글씨 한 점과 비문 한 점을 더 써주었다. 편액은 ‘귀로재(歸老齋)’라는 힘이 넘치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난 현판 글씨이다. 귀로재는 임실 관촌에 있는 김기종의 재실이다. 그리고 김기종의 부인 전주 유씨의 묘비 또한 이때 글씨를 미리 받아 놓았다가 사후에 세웠다. 귀로재 현판 탁본. 전라금석문연구회 제공 △추사가 써준 묘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 정부인 광산 김씨의 묘비가 있다. 전면의 비문은 추사가 예서체로, 후면은 창암이 해서로 썼다. 1833년에 건립된 이 비는 전면과 후면을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나누어 썼다는 점에서 아주 보기 드문 비석이다. 이 가문은 김기종가와 마찬가지로 효자 집안이었다. 광산 김씨의 장남 최성철과 차남 성전, 그리고 손자인 한중까지 효자정려를 받았다. 추사와 창암이 전면과 후면을 나눠 쓴 또 다른 묘비가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김양성과 정부인 수원 백씨의 묘비이다. 그리고 2019년 임실군 신덕면 수천리에서 추사가 쓴 또 한 기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성간과 정부인 김해 김씨의 묘비이다. 최성간은 정부인 광산 김씨의 셋째 아들이다. 이 세 기의 비석 주인공들은 모두 김기종가와 인척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비문들은 김기종의 알선으로 추사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추사체의 백미 백파선사비 고창 선운사 입구 부도전에 백파선사비가 서있다. 우리 고장에 남아있는 또 다른 추사의 금석문이다. 1858년(철종 9)에 세운 이 비의 비문은 김정희가 타계하기 1년 전에 짓고 썼다. 백파(白坡, 1767∼1852)는 법명이 긍선(亘璇)으로 18세 때 선운사로 출가해 순창 구암사에 주석했던 대강백이자 선승이었다. 그는 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저술했다. 이 책은 초의선사와 선에 대한 논쟁을 촉발했다. 이때 김정희는 초의의 편을 들어 백파의 저서에 반박하는 서신을 수없이 보내며 선논쟁에 가세했다. 그러다가 추사보다 열아홉 살 연상인 백파가 1852년에 입적했다. 백파의 제자들이 3년 후 추사를 방문해서 스승의 비문을 청하자 추사는 기꺼운 마음으로 비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전면에는 해서체의 힘찬 필치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라 쓰고, 뒷면은 백파의 삶을 기리는 글을 행서로 썼다. 이 행서는 ‘울림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 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적었다. 추사체의 백미로 평가받는 백파선사비까지 전북특별자치도에는 7점의 추사 금석문이 자리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추사 금석문은 전국적으로 20여 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우리 전북이 가히 추사 금석문의 보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고장에서 발견된 추사 금석문의 대부분은 전라금석문연구회에서 발로 뛴 노력의 결실이다. 연구회의 노고에 격려와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취재차 군산 동국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불상의 문화유산 지정여부를 묻자 스님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양식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불상인데 근거가 없어 문화유산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국사의 전신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금강사였다. 군산에 진출해있는 일본인들을 위해 1913년에 창건되어 당시 역사가 백년도 되지 않았다. 역사는 짧은데 법당 안에 봉안된 불상의 양식은 몇 백 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해방 이후 불상을 금산사로부터 이안해왔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사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금산사 대장전의 불상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스캔해서 보내드리자 스님은 이를 근거로 불상의 이안과정을 밝혀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석가불을 협시하는 가섭과 아난존자의 복장에서 유물이 발견되었다. 복장에는 발원문과 함께 많은 불경이 들어있었다. 발원문에 따르면 이 삼존상은 효종 1년(1650)에 조성해 금산사에 봉안했다. 이 발원문의 발견으로 불상의 정확한 조성년도가 밝혀지고,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일체가 보물로 승격되었다.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 복장유물에는 사용하지 않은 한지 수십 장도 함께 들어 있었다. 제작한 지 350여년이 지났지만 한지는 이제 막 만든 것처럼 하얀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을 살펴보다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쇄에 사용된 종이가 너무나도 얇았던 것이다. 얇다란 종이에 먹이 골고루 먹혀 글자가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불빛에 비춰보니 뒷장이 뚜렷하게 보였다. 요즘 용어로 시스루(see-through)라고나 할까. 이 종이는 말로만 듣던 선익지(蟬翼紙)라는 종이였다. 선익지는 매미의 날개처럼 얇은 종이를 이르는 말이다. 책의 간기에는 ‘만력 14년(선조 19, 1586) 전라도 김제군 승가산 흥복사 개판’이라 적혀있었다. 흥복사는 『묘법연화경』뿐 아니라 『불설대보부모은중경언해』『불설대목연경』등을 간행했던 사찰이다. 흥복사에서 이러한 불서들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판각을 하는 각수와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 곧 장인 승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국사 불상의 복장에서 나온 『묘법연화경』에 사용된 종이도 이 절의 승려들이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흥복사가 조선시대 전주부 관내는 아니지만 전주부 바로 옆 김제군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 종이를 전주한지의 사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전주한지는 완산지라 하여 한지의 대명사였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전주한지는 고려지를 대표하는 종이였다. 고종 21년(1884)에 전라감영을 방문했던 미국공사관의 해군무관 조지 포크(George C. Foulk)가 지니고 온 지도에도 전주한지에 대한 메모가 지도 상단에 붙어 있다. 이 메모에는 “전라도에 함열·군산창과 법성창이 있고, 전주에서 완산지라는 최상급의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이렇게 유명한 전주한지였지만 남아있는 유물 중 어떤 것이 전주한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조선시대 전라감영과 전주부에서 간행한 서책의 간기를 통해 여기에 사용된 종이가 전주한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주에서 서책용 한지만을 생산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주에서 생산되는 종이로 표전 주본 부본 자문 서계 등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종이와 표지 도련지 백주지 유둔 세화 안지 등 각종 종이가 생산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대적 한지제조 기술의 도입 이렇게 종류도 다양하고 명성이 자자했던 전주한지가 조선의 멸망과 함께 서서히 명성을 잃어갔다. 전라감영에 소속된 한지장인들이 우수한 품질의 완산지를 생산하던 감영의 지소는 폐지되었다. 일제는 전주에 제지모범장과 전라북도은사제지견습소를 설치했다. 여기에서 근대적인 시설과 약품을 사용해 손쉽게 종이 만드는 법을 보급했다. 한지생산과정 중 노동력이 가장 많이 드는, 닥을 두드려 섬유질이 물에 잘 풀어지게 하는 고해(叩解) 과정을 비터(beater)라는 기계로 대신했다. 비터는 닥을 잘게 갈아버리는 기계였다. 이렇게 하면 닥을 쉽게 풀어서 사용할 수 있지만 닥섬유가 서로 얽히면서 오랜 세월 견디는 내구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여기에 닥섬유를 부드럽게 해서 섬유질을 추출하기 위해 볏짚이나 콩대, 혹은 메밀대의 재를 내려 만드는 천연잿물을 사용하지 않고 화학약품인 양잿물을 사용했다. 게다가 값싼 펄프까지 섞어 종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생산된 종이는 값이 싸서 전통한지는 경쟁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전주태지의 건조모습. 출처=『일본지리풍속대계』 △잠자고 있는 전주한지라는 브랜드 일제강점기에 전통 전주한지는 거의 사라졌지만 그나마 전주태지(苔紙)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지는 가는 이끼의 문양을 넣은 고급스런 종이로 전주 시내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던 한지상이 개발해 상용화했다. 오목대 아래에서 태지를 생산하다가 1930년대 후반 한옥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하자 공장을 완주군 구이면으로 이전했다. 이 외에도 전주 인근에서 근대식 한지제조법으로 종이를 만드는 영세한 한지업체가 몇 군데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한지공장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전주한지의 유명세를 타고 중국과 만주, 북한 등지로 수출되던 종이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하루아침에 해외시장을 잃었다. 수요부족으로 경영난을 겪던 한지업체에 숨통을 트게 해준 것은 6·25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집을 복구하면서 종이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전주 흑석골에 한지공장이 들어섰다. 구이로 생산거점을 옮겼던 태지공장이 1955년에 제일 먼저 흑석골에 자리를 잡고 전주제지공업사란 상호로 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후 문산제지, 호남제지, 문성제지, 평화제지, 우림제지 등이 들어서 1970년대 초까지 호황을 누렸다. 현재는 전주제지공업사를 이어 받은 고궁한지만이 흑석골에 남아 있다. 2022년에는 이곳에 전주천년한지관이 문을 열었다. 이 한지관에서는 전통한지교육을 비롯해 전주한지에 대한 복원을 연구한다고 한다. 흑석골에 문을 연 전주천년한지관. 필자 촬영 이상 살펴본 것처럼 전통 전주한지는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후 근대적인 제조시설을 갖추고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한지공장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던 전주한지가 근대화에 발목을 잡힌 것이다. 전통한지는 내구성에 있어서 세계 제일의 종이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이란 말이 있듯 한지는 천년이 넘도록 보존이 가능한 종이이다. 그 한지 중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종이가 조선시대 완산지로 불리던 전주한지이다. 흔히 얘기하는 브랜드 가치로 치면 완산지라는 브랜드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자산이다. 이렇게 엄청난 자산이 잠자고 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이 없을까.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변산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愚磻洞)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 1656년에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에 서술되어 있는 우반동에 대한 묘사이다. 우반동은 오늘날 부안군 보안면의 서남쪽에 있는 우신리와 우동리의 옛 이름이다. 이 지리지는 유형원(1622~1673)이 한양에서 우반동으로 거주지를 옮겨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직후에 썼다. 따라서 이 글은 유형원 당시의 우반동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풍광이 수려했던 우반동 이 기록보다 몇 십 년 전에 이곳을 묘사한 기록도 있다. 1608년 교산 허균(1569~1618)이 이곳에 있었던 정사암에 머물며 썼던 「중수정사암기」이다. 포구에 있는 꼬불꼬불한 작은 길을 따라 우반동으로 들어가자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가 날아오른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와 회나무들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리었다. 우반동은 이렇게 경치가 빼어나 비경으로 꼽히는 우반십경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선계의 맑은 폭포, ‘선계청폭’이다. 선계폭포 위쪽에는 변산의 4대사찰이었던 선계사와 허균이 묵었던 정사암이 위치해 있었다. 폭포 위의 암반에 커다란 말발굽이 새겨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야인시절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면서 말을 달려 뛰어내릴 때 생긴 자국이다. 뛰어내리면서 칼로 암반을 내리쳐 이곳의 절벽과 폭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폭포의 이름을 성계폭포라 했는데 임금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 없어 선계폭포라 했다한다. 재미있는 전설이다. △변산도적 녹림당 선계폭포 맞은편 산에는 바위굴이 자리해 있다. 조선시대 유명했던 변산도적의 소굴 중 하나로 추정되는 곳이다. 변산도적은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지은 소설 『허생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한양 남산골에 살고 있던 가난한 선비 허생이 장안의 부자 변 씨에게 돈을 빌려 과일과 말총을 독점한 장사로 엄청난 이문을 얻었다. 그는 이렇게 번 돈을 변산의 도적들에게 주면서 무인도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기본구조는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흡사하다. 홍길동의 의적행위가 『허생전』에서는 체제순응적인 장사로 치환되었다. 소설의 마무리도 비슷하다. 홍길동이 의적들을 데리고 율도국으로 떠난다는 마지막 설정은 허생이 도둑들에게 소를 사주고 처자와 함께 무인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도록 했다는 결말과 거의 같다. 가혹한 세상에서 목숨을 버릴 수 없어 도둑이 된 사람들이 살길이 만들어지면 선량한 백성이 된다는 일치된 결말이다. 변산도적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영조 때 처음 나타난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던 영조 4년(1728), 반란에 동조해 태인에서 거병했던 태인현감 박필현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명화적을 끌어들이려했다는 진술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명화적은 당시 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도적의 무리로 녹림당이라고도 불렀다. 녹림당은 본래 전한의 마지막 황제를 독살하고 집권했던 왕망에 반대해 녹림산을 근거지로 하여 대항했던 집단의 이름이다. 이후 녹림당은 반란집단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녹림당이라는 이름을 변산도적들이 내세웠다는 것은 이들이 단순한 도둑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실학의 효시 『반계수록』 조선사회는 중기 이후로 사회제도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다. 신분제의 모순으로 반상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토지의 과점현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부자는 끝없이 땅을 확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급기야는 땅을 잃은 사람들이 유리걸식하다가 도둑의 무리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제도의 모순을 직시한 사람이 있었다. 반계 유형원이다. 그는 한양에서 살다가 서른두 살 때인 1653년(효종 4)에 우반동에 내려와 정착했다. 이곳에는 그의 조부가 개간해 조성한 농장이 있었다. 풍광이 수려한 아름다운 변산에 아이러니하게도 도적이 존재하고 있었다. 태평성대가 아니었다. 유형원은 그 원인을 사회제도의 모순에서 찾았다. 그 중에서도 토지문제가 제일 심각했다. 토지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토지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양민이 유리걸식하다가 도적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유형원은 이에 대한 처방으로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균전제(均田制)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토지제도의 개혁에서부터 국가의 통치제도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우반동에 칩거하며 22년 동안 저술했다. 실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반계수록(磻溪隨錄)』이다. 이 저서에서 반계가 주장했던 이론들은 일종의 국부론이다. 균전제로 얻은 부와 사회 안정을 기반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사회제도의 변혁을 이루고자했다. 반계의 이러한 주장과 사상은 조선시대 실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반계의 개혁의지와 사상은 이익과 안정복, 정상기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1769년(영조 45)에는 영조의 명으로『반계수록』이 간행되었다. 유형원이 문을 연 실학이라는 학문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 이후 실학은 다산 정약용(1762~1836)에 이르러 집대성되게 된다.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우반동 우반동 들녘 한가운데 길쭉한 선돌이 서있다. 이 선돌 옆에는 배메산 돌방무덤이란 안내판이 서있다. 그런데 혹 이 선돌은 유형원이 자주국방을 꿈꾸며 말을 달릴 때 목표로 삼고 달렸던 돌이 아닐는지. 유형원은 어린 나이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 이때 전쟁의 참화를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며 외침에 대비해 튼튼한 국방력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우반들녘에서 말을 달리며 스스로를 단련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반계의 실천적 면목을 엿볼 수 있다. 달봉대산 중턱에 복원된 반계서원은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하던 곳이다. 이곳에 올라 앞을 보면 우반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계의 개혁론이 실현되었더라면 우리에게 어떤 세상이 와 있을까하고 서당마루에 걸터앉아 생각하다가 건너편 우동마을에 눈길이 머문다. 우동마을은 부안 김씨의 집성촌이다. 유형원의 조부 유성민이 1636년에 우반의 동쪽들녘을 김홍원에게 매각했다. 그 이후 우동리는 부안 김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후손에게 재산을 분배했던 분재기를 비롯한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당산제로 유명한 마을이다. 삼백년 이상 이어오는 이 마을 당산제는 주민화합의 한마당이다. 당산제로 하나가 되는 우동마을 사람들을 보면 유형원이 꿈꾸던 세상이 조금은 실현된 것 같다. 경자유전의 균전제가 실시되지는 못했지만 해방 이후 농지개혁이 시행되어 농민들 대부분은 자신의 농토에서 농사를 짓는다. 변산에 이제 도적은 없다. 반계 같은 위대한 선각자가 있어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 허균이 이곳 정사암에 머물 때 『홍길동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변산에 도적이 있어 반계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나올 수 있었다. 이래저래 부안 우반동은 개혁을 꿈꾸던 땅이자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 만해 한용운의 안심사 방문기 1931년 근대의 고승 만해 한용운이 완주군 운주면에 있는 안심사를 방문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는 한글경판을 친견하고 인출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산사를 자주 방문했던 사람으로부터 안심사에 상당수의 언해본 경판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남아있던 한글로 된 불교서적은 산질된〈월인천강지곡〉몇 권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던 터라 만해의 놀라움을 컸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급히 서둘러 경성발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들떠서 며칠 밤잠을 설친 뒤라 기차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기차가 추풍령역에 정차해 있었다. 호남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대전역을 한참 지나쳤다. 급하게 하차해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상행선을 타고 대전역까지 다시 올라가 호남선으로 바꿔 타고 연산역에 내렸다. 여기서 자동차로 두 시간 반을 더 달려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 안심사에 도착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틀 걸러 도착한 안심사의 모습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찾아오는 신도가 없어 주지 혼자 농사를 지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퇴락한 2층 건물의 대웅전 안으로 들어서자 불상 뒤쪽 마루에 경판이 쌓여있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판전이 있었는데 판전이 무너지면서 대웅전 안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수많은 경판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 한글경판이 보였다. 벅찬 감흥에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만해는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경판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경판을 종류 별로 분류하고, 다시 판본 순서대로 맞추어갔다. 다음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판본의 정리를 마쳤는데 결과는 엄청났다. 낙질이 거의 없는 판본이 5종이나 남아있었다. 〈원각경〉〈금강경〉〈은중경〉 등 경전이 3종, 여기에 〈천자문〉과 〈유합〉의 판본까지 있었다. 남아있는 언해본 판본의 수는 무려 655판에 이르렀다. 이를 인출하게 되면 1,365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만해는 이러한 자초지종을 적어 ‘국보 잠긴 안심사’란 제호로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실었다. △ 한 줌 재로 변한 안심사 언해본 목판 만해는 글을 마무리하면서 향후 판본이 어찌 될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안심사의 형편으로 판본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판본을 지킬 수 있는 방안 세 가지를 제시했다. 안심사에 이를 수호할 만한 보조를 해주거나 이를 수호할 수 있는 다른 사찰로 이안하는 방안, 경성에 판각을 신축한 후에 매입해서 이안하는 방안이다. 만해는 이 중에서 경성에 이안하는 방안을 실행하려한다고 밝혔으나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현되지 못했다. 경성에 판본을 이안하고자 했던 만해의 생각이 실현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3일, 만해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 벌어졌다. 안심사가 적군의 월북경로에 있다는 이유로 국군이 사찰을 징발해 소각해버린 것이다. 이때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있던 판본도 함께 재가 되었다. ‘국보 잠긴 안심사’가 국보와 함께 사라졌다. △ 조선 초부터 불경을 간행했던 안심사 그런데 대둔산 깊은 산속 오지 중의 오지인 안심사에 어떻게 해서 이렇게 엄청난 보물인 언해본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던 걸까. 안심사는 조선 초부터 불경간행이 활발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선 초에 발간한 한문본〈묘법연화경〉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국공신이었던 양촌 권근이 쓴 발문에 발간경위가 적혀있다. 조계종의 대선인 신희 등이 노인들이 보기 편하도록 중간 크기의 글자로 불경을 간행하기를 원했다. 이에 성달생 성개 형제가 상중에 이를 듣고 선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글씨를 썼다. 이를 도승 신문이 전라도 도솔산 안심사로 가지고 가서 1405년(태종 5)에 이 경전을 간행했다. 이 발문을 통해 당시 안심사의 명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경 간행을 위해 그 먼 길을 마다 않고 신문이라는 승려가 대둔산 안심사까지 성달생 형제가 정성을 다해 쓴 사경을 가지고 갔던 것은 이곳이 당시 가장 뛰어난 불경간행처였기 때문이다. 이는 안심사의 승려 중에 숙련된 각수와 지장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인프라가 튼튼하게 갖춰진 절이 안심사였다. 이러한 사찰이었기에 세조 때 간경도감을 설치하면서 지방분사를 이곳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초가 영조 35년(1759)에 건립된 안심사사적비에 적혀있다. 이 비는 우의정 김석주가 비명을 짓고, 한성부 판윤 유최기가 기문을 서술했다. 이조판서 홍계희의 글씨에 영의정 유척기가 두전을 썼다. 이처럼 조정의 쟁쟁한 실세들이 참여해 비를 세운 것으로 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안심사의 사세가 상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안심사 주지 처능이 김석주에게 했던 말이 적혀있다. 우리 혜장왕조(惠莊王朝:세조)에 이르러 일찍이 친필로 유지(遺旨)를 내리시어 절의 중으로 관에 부역하는 자들에 대해 모두 역을 면해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글이 있습니다. 사적비에 의하면 세조가 승려들의 잡역을 면해주라는 친필 유지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유지를 내렸을까. △ 안심사는 간경도감 전주분사 이는 안심사가 일찍이 명성을 쌓아온 불경간행사업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추정하는 까닭은 불경간행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치해 많은 불경을 간행한 왕이 세조였기 때문이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불교를 좋아하여 부왕인 세종의 불서편찬을 적극 도왔다. 세종의 명으로 모친인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석보상절〉을 쓰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위 찬탈을 속죄하기 위해 더욱 불교에 심취했다. 세조 7년(1461)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했다. 중앙에 간경도감 본사를 두고, 지방에 분사를 두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지방분사로는 개성 안동 상주 진주 전주 남원이 있다. 이 중 전주의 분사 역할을 안심사에서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역할을 하면서 불경 간행이라는 국책사업을 수행했기에 세조가 안심사의 승려들에게 잡역을 면해 주라는 어필을 내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만해가 와서 보았던 언해본 목판도 세조 때 새긴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간경도감의 역할을 보면 한문 불경은 본사와 지방분사에서 간행했지만 언해 불경은 서울 본사에서 단독으로 간행했다. 안심사에 있었던 언해본 목판은 선조의 지시로 1575년(선조 8)에 판각해서 안심사에 보관했다. 그런데 실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간경도감에서 언해한 불경을 다시 복각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 한글로 번역해서 판각한 것인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용운이 1932년에 보수하여 인출한 〈원각경언해〉와 〈금강경언해〉는 간경도감의 원간본을 복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안심사 이처럼 안심사의 언해본 목판에 대해서는 풀어야할 숙제가 많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실만으로도 안심사는 우리 출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곳이다. 조선 초부터 많은 불경을 간행했고, 세조 8년(1462)에는 한자본 불경 〈대승기신론필삭기〉와 〈대방광불화엄경합론〉을 간행했다. 여기에 선조의 명으로 판각한 언해본 판본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단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때 안심사가 조선시대 불경간행의 중심 사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우리고장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자 자존심이다. 이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일은 우리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전북일보에서는 그 일환으로 〈우리 땅에 새겨있는 역사의 흔적〉을 월1회 연재한다. 남북화해 무드가 무르익던 문재인 정부시절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궁예의 궁궐터를 남북이 공동조사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남북공동조사는 실현되지 못했다. 비무장지대 안 궁예의 궁궐터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905년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송악에서 철원의 풍천원으로 도성을 옮기면서 조성했다. 1530년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풍천원은 궁예의 도읍지로 철원도호부의 북쪽 27리에 있다. 외성의 둘레는 1만 4421척이고, 내성의 둘레는 1905척으로 모두 흙으로 쌓았다. 지금은 절반이 퇴락하였다. 궁전의 옛터가 뚜렷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풍천원의 석등 2기가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석등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라졌지만 비무장지대 안에는 아직도 궁예의 궁궐터가 옛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후백제 궁성에 대한 기록 전주는 900년부터 936년까지 후백제의 수도였다. 그렇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후백제의 궁궐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전주부 고적 조에는 후백제 궁궐에 대한 서술 자체가 없다. 다만 고토성(古土城)에 대해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터가 남아 있는데 견훤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전주목의 사록 겸 장서기로 왔던 이규보의 〈남행월일기〉에도 “전주는 완산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이다”는 언급만 있을 뿐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은 없다. 1822년(순조 22) 호남을 여행하면서 〈남유록〉이라는 기행문을 남긴 담헌 이하곤은 “전주는 견훤이 웅거하던 옛 도읍지이다. 속언에 전해오기를 견훤이 서산 봉우리에 별궁을 짓고 남쪽 높은 봉우리에 철교를 가설하여 옛 궁터를 왕래했다고 한다.”고 하여 견훤에 대한 전설만을 적어놓았다. 이처럼 지리지나 명사들의 전주방문기에서 견훤궁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견훤궁성에 대한 흔적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백제의 흔적을 지운 안남도호부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다. 도호부는 본래 당나라 초기에 광대한 속지(屬地)의 지배를 위하여 설치했던 기관이다. 이 기관은 군사행정조직으로 정복지나 속지의 반발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후백제왕 신검이 고려에 항복해 후백제가 멸망했지만 왕건은 후백제 세력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 후백제 부흥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후백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궁성 안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흔적마저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렇게 전주에서 후백제가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온갖 위력을 행사하다가 951년(광종 2)이 되어서야 안남도호부를 고부로 옮겼다. 고부는 백제의 중방성이 있던 곳으로 후백제 시대에도 오월과의 중요한 교역 거점이었다. 그 후 안남도호부를 995년(성종 14)에 영암으로 다시 옮겼다가 1019년에 폐지했다. 이를 통해 후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려가 후백제의 부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다. △후백제 도성의 흔적 이처럼 왕건은 전주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해서 후백제의 궁성을 철저히 파괴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도성의 흔적까지는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1925년 3월 육당 최남선이 전주를 방문할 때 보았던 후백제 옛 성터에 대한 묘사가 〈심춘순례〉에 적혀있다. 반대산 밑에 높다란 판자로 담장을 두르고 지붕에 창을 낸 집채가 줄줄이 보이는 것은 물을 것도 없이 감옥인데, 그 곁에서부터 철로 쪽으로 논두렁처럼 울묵줄묵하게 약간 일자로 남아있는 것이 후백제의 성터라 한다. 대개 마한 이래의 옛터를 그대로 사용해 내려온 듯하여, 거의 없어지고 겨우 남은 몇 줌 흙이 몹시 남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논두렁처럼 멀리 숲정이로 이어지는 후백제 토성-1916년 유리건판 사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최남선이 1925년에 경편열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후백제 옛 성의 흔적은 고토성에 있었던 옛 전주형무소에서 숲정이로 이어지는 토성이었다. 이 토성의 흔적을 1916년에 전주 외곽을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이 보았던 바로 그 후백제 토성이다, 숲정이에는 1928년에 가타쿠라(片倉)방적회사 전주제사소(현 진북동 동국아파트 자리)가 들어섰다. 당시 제사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엽서에 옛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로 앞으로 허물어진 토성이 자리해 있는데 높이가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인다. 후백제가 멸망한 지 천년이 흘렀는데도 이 정도 높이의 토성이 남아있다면 본래는 훨씬 높고 견고했을 것이다. 이 토성은 숲정이에서 전주동초등학교 뒤에 있는 옛 여단(厲壇)을 통과해 산등성이를 따라 기린봉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1941년에 발간된 〈전주부사〉에 수록되어 있는 〈전주부경역연혁도〉를 보면 인봉리를 중심으로 옛 성벽을 2중, 3중으로 만들어 방어망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추정해 보면 후백제의 궁성은 옛 인봉리, 현 문화촌이나 전주제일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백제의 궁궐터 〈전주부사〉에서는 전주고등학교 뒤쪽 물왕멀 일대를 후백제의 궁궐터로 추정했다. 왕성의 주초석으로 쓰였을 법한 커다란 들들과 수많은 작은 돌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고, 풍수지리상 사신상응형으로 궁성을 둘만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물왕멀 마을을 재개발하면서 지층을 파보니 그곳에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유구를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중노송동 기자촌 재개발구역에서는 발굴조사 결과 유의미한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은 인봉리 외곽으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한 곳이다. 문화촌으로 연결되는 하부 구역에서 폭 4미터 길이 40미터쯤 되는 도로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언덕 상층부에서는 후원유적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유구가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건물이 불타면서 쏟아진 불 먹은 통일신라 후기의 기와들이 층을 이뤄 쌓여 있었다. 종광대 재개발구역의 발굴조사에서도 후백제의 토성유구 130여 미터가 발굴되어 현지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종광대는 전주동초등학교 뒷산에 있었던 여단 일대를 아우르는 곳으로 〈전주부경역연혁도〉에서 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했던 옛 성벽지가 지나는 곳이다. 오는 2030년까지 낙수정 일원에 후백제역사문화센터가 건립된다. 국비 450억 원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이다. 후백제역사문화센터에서는 후백제의 역사와 흔적을 조사해 그 성과를 시민들과 공유하게 된다. 이 사업과 더불어 전주시에서는 국가유산청으로부터 후백제의 고도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도 지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후백제의 도성임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이다. 전주시민이라면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집이 후백제의 유적이나 궁성을 깔고 있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왕건이 아무리 후백제의 역사를 지우려 했어도 그 흔적은 나오기 마련이다. 손상국 프리랜서 PD △손상국 프리랜서 PD는 JTV에서 우리고장의 역사문화 프로그램인 '전북의 발견'을 기획해 5년간 방송했다. 저서로 〈최치윈을 추억하다〉 〈전라감영 이야기〉 〈사진으로 보는 전라감영 복원기록〉이 있고, 현재 〈전북문화살롱〉에 '문화유산의 안과 밖'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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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62)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기록물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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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인물] 더불어민주당 최초 당원 최고위원 된 박지원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