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한때 글로벌 자본시장과 기업 전략의 통합된 기준으로 자리매김했지만, 2025년 현재 그 지형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지정학적 갈등과 기후위기의 정치화, 그리고 각국의 산업보호 전략 속에서 ESG는 더 이상 단일한 글로벌 표준이 아닌, 국가별·블록별 해석과 규제가 병존하는 ‘ESG의 블록화(Blockification of ESG)’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럽연합은 CSRD(기업 지속가능성 보고지침), CBAM(탄소국경조정제도), SFDR(지속가능 금융 공시규제) 등 강력한 규제를 통해 ESG를 윤리 기반의 규범으로 제도화하는 반면, 미국은 IRA(인플레이션감축법) 중심의 보조금 정책과 트럼프 대통령의 ESG 규제 완화 기조가 공존하며, 주 정부 차원의 ESG 규제가 기업의 전략을 복잡하게 만든다. 중국은 ESG를 산업 안보와 국가 통제의 도구로 정의하며, 국유기업 중심의 공급망을 ESG 체계로 흡수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한 ESG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각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에 따라 상이한 해석과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기업은 더 이상 단일화된 ESG 보고서나 글로벌 표준만으로 이해관계자의 신뢰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 투자자에게는 CSRD와 GRI(글로벌 보고 이니셔티브)를, 미국 투자자에게는 ISSB(국제 지속가능성 기준 위원회)와 SASB(지속가능성 회계 기준 위원회)를, 중국 사업장에는 지방정부의 ESG 기준을 각각 충족시켜야 하는 다층 공시 대응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동시에, 공급망 전반의 인권·환경 실사 및 지역별 탄소 규제 차이를 관리하는 공급망 ESG 통합 관리가 필수 과제로 부상했다. ESG가 단순히 ‘보고의 문제’가 아니라, 블록별로 요구되는 역량과 데이터 관리의 문제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투자자의 ESG 기대치도 지역마다 달라진다. 유럽 투자자는 기업의 인권 보호와 기후위기 대응 성과를 우선시하지만, 미국 투자자는 ESG가 기업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중시한다. 이에 따라 투자유치 전략의 지역 분산화가 불가피해졌고, 기업은 이해관계자별 맞춤형 ESG 커뮤니케이션을 설계해야 한다.
결국 ESG의 블록화는 단순한 규제의 분열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평가하는 새로운 좌표가 되었다. 기업은 복수의 공시 기준과 지역별 리스크 관리, 그리고 ESG 전략의 현지화까지 병행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ESG’가 아닌, 다극화된 ESG 질서 속에서 진정성과 실행력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가 되었다.
이처럼 ESG 블록화 시대에 기업은 복수의 규제와 이해관계자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다층적이고 지역화된 전략을 갖춰야 한다.첫째, GRI, ISSB, CSRD 등 복수의 국제 기준을 병행해 기업의 ESG 공시를 강화하고, 지역별 이해관계자와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둘째, 각국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공급망 리스크를 반영해, 블록별로 특화된 공급망 ESG 실사·검증 체계를 통합적으로 구축해야 한다.셋째, ESG 전략 자체를 단일화된 글로벌 모델이 아닌, 지역별로 차별화된 전략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기업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
이제 ESG는 윤리적 명분이 아니라, 복수의 질서 속에서 ‘신뢰’와 ‘지속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전략적 시험대이다. ESG의 블록화는 위기이자 기회이며, 기업은 이 복합적 질서를 균형 있게 해석하고 대응할 때만이 다가올 글로벌 지속가능성 경쟁에서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지용승 우석대 경영학부 교수·ESG국가정책연구소 소장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