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승지(十勝地) 운봉고을
역사적으로 전쟁,재해,질병이 없고 거주환경이 좋은 조선 정감록에 기록되어 있는 십승지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해발450-550m)이다. 필자가 태어나고 자란곳은 가장리(법정리명은 덕산리)다. 마을뒤엔 큰 저수지가 있다. 용왕님이 있다는 검푸른 저수지는 두려움이 있던 곳으로 나에게는 신성한 경외심으로 다가와 용왕님께 두손모아 간절히 소망을 빌었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봄이 오면 수리조합 직원들이 와서 거대한 수문을 열었다. 한번은 친구와 나는 저수지 아래 작은 방죽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굉음에 놀라 소리난 곳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폭포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수철 튀어 오르듯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은 주변을 삼켜버릴 듯한 포악스러운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친구와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 낚시를 포기하고, 먼 발치에서 수로를 따라 넘실대며 도도하게 흐르는 물살의 위용에 넔을 잃고 한참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리조합 직원들의 안내를 미리받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께서는 큰 축복을 받으신 듯 물길을 내느라 분주히 다들 소란스러웠다. 논에 물이 잠기자 이곳저곳에서 누렁소를 이끌고 논갈이가 시작되었다. 한해의 농사가 물의 공급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수지 물은 벼농사를 위해 겨우내 움크리고 추위를 견디며 봄날을 그리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시절 둑방은 아득한 높이여서 친구들과 자주 선착순 경쟁을 했다. 도착하면 가슴은 터질 듯이 숨이 차오르고 수평선을 바라보면 물결은 우리들을 포근히 품어주던 엄마같은 존재였으며 용왕님이 깊은 곳에 있다는 신비를 동경헀었다. 부드러운 물결은 투박한 우리들 마음을 어루만저 주고 푸른 꿈을 심어 주었다. 둑 정상에서 바라본 운봉은 넓은 들녘을 철갑산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전란에서도 우리를 보호하는 요새였고, 평야는 오곡백과로 풍성해 살기좋은 낙원이었다. 성심으로 땀흘리시며 사셨던 선조님과 부모님 세대의 지혜와 삶이 있었기에 미래를 향한 우리들은 도전할 수 있었고 나래를 펼수 있었다. 좋은 환경의 양분은 오늘날 곳곳에서 소금되고 빛이되는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말할 수 있다. 여름이면 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며 여울목 막아 가물치,쏘가리,피라미,메기,붕어,미꾸라지,모래무지,가재등을 잡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지는 무렵에야 각자 집을 향해 달음박질 하며 짧은 하루를 보내며 지냈다. 가을날엔 오고가며 길목에서 단감,오이,토마토,자두,복숭아,무우,당근등을 살며시 취해 인적드문 곳에서 깔깔대며 철없는 만찬을 즐기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림없는 얘기다. 당시엔 너그러이 용서해 주고 눈감아 주셨다. 때론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크게 혼이 나고 부모님까지 난처하게 한 상황도 있었다. 겨울이면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형들이 발자국 내어 주면 그곳을 밟으며 등교를 하였다. 운봉고원은 고지가 높아 추위가 매섭고, 눈보라 치는 날이면 온몸이 꽁꽁얼어 교실 공탄 난로의 따뜻함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은 두려움의 저수지도 작은 호수에 불과하고 마을, 저수지둑방,학교길,개천,정자나무,뒷동산등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낡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변해있다. 1년에 한두번 방문하면 필자를 알아보시는 고령의 어르신 몇분이 계신다. 힌머리에 굵은 주름과 구부정한 세월의 낙관(落款)을 볼 때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알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낀다. 오동근 재경남원문인협회 기획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