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을 만나러 떠난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어버린 여자, 돌이 되어서 세세년년 이 땅의 모든 가슴속에 생생한 숨결로 살아있는 백제의 여자...단순히 문학적 공간을 더듬는 기행이 아니라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루어지는 체험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떤 자세로 그 여인을 대할 것인지 설레임이 앞선다.
현관문을 나서자 아내가, 늦지 않게 조심해서 다녀오란다. 늘 듣던 말이라 귓등으로 들어넘기고 나는 출발한다. 보름에 가까워지는 낮달이 하나 내 뒤를 따른다.
산미나리아재비가 노랗게 무더기 꽃을 피운 한적한 지방도로를 택했다. 5월, 산과 들의 초록이 손끝에 옷자락에 묻어날 것만 같다. 저 신록의 아름다움이 결코 꽃보다 못하지는 않으리라 싶다. 들에서 못자리를 만들고 하우스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푸르름에 묻힐 것만 같다.
순창을 지나 해발 347미터 천치재를 넘으니 웬걸, 정읍이 아니라 전남 담양이 나온다. 다시 내장산 쪽으로 길을 잡으니 80년대 내 여자 동기생이 첫 발령을 받고 울었다는 순창 복흥이 나온다. 토끼와 발을 맞출 만큼은 아니어도 꽤 깊숙한 산간오지로 느껴진다. 길은 몇 굽이 힘겹게 몸을 뒤틀어 내장산 고갯마루로 이어진다. 내장사가 가까워졌음을 즐비한 모텔들이 먼저 알려준다.
평일 대낮인데도 선글라스를 낀 젊은 남녀를 태운 승용차가 모텔의 주차장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그들의 여유와 당당함이 참 부러웠다. 립스틱을 짙게 바른 어여쁜 여자에 한참 눈을 빼앗긴다. 온 저자거리를 떠돌며 행상을 하던 그 「정읍사」 여인의 남편도 나처럼 한눈을 팔았을까? 고단함을 핑계로 질펀한 유곽을 꿈꾸기라도 했을까?
'정읍사'노래에, "즌 ?? 드?욜셰라”에서 "즌 ?(진 땅-진흙탕)”는 여성의 성기, 혹은 매음굴을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한껏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행여 행상을 떠돌다가 매음굴에 빠져들 남정네를 노심초사 염려하는 여인의 보편적인 심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중종 때 '동'과 함께 남녀간의 음사(淫辭)라 하여 궁중음악에서 제외시켰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나저나 망부석은 있을까, 있다면 어디에 있을까? 우리 설화에는 참 많은 망부석이 등장한다. 얼마나 기다림이 간절했으면 돌이 되었을까?
내장사를 벗어나 몇 분 차를 몰았을까? 길 오른 쪽에 자그마한 공원이 눈에 띄었다. 여기에 망부상(望夫像)과 함께 '정읍사' 노래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조성되었다는 <정읍사 공원> 의 그 망부석과 노래비는 아니다. 아마 지금의 정읍시 시기동 아양산에 <정읍사 공원> 이 들어서기 이전의 조형물이리라. 그 곁에는 고 박정만 시인의 시비와 함께 생존해 있는 지역 시인의 시비도 서 있었다. 정읍사> 정읍사>
관련 자료들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언급된 망부석의 위치를 두고 논란이 많은 모양이다. 고증에 따라 시(市)는 현재의 위치에 <정읍사 공원> 을 조성하였으며, 「정읍사」를 설화소설로 재탄생시킨 소설가 문순태도 기록에 의존하여 "현의 북쪽 10리 지점”인 현재의 시기 3동 아양고개를 망부석이 있던 자리로 추정하였다고 한다. 정읍사>
그러나 설화 속의 내용 모두를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려는 실증적 태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얼마 전 경주의 '나정'이라는 곳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관련된 유적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크게 보도된 바가 있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의 내용까지를 사실로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기다림에 끝내 죽어 돌이 된 여인, 망부석이 있었다는 말의 그 사실 여부보다 그 것이 함축하고 있는 문학적인 진실과 그것의 현재적 의미가 더 중요하지는 않을까?
어쨌든 바로 그 <정읍사 공원> 에는 망부상이 서 있다. 망부상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사우(祠宇)는 굳게 문이 잠겨 여인의 영정을 볼 수 없어 아쉬웠으나, 소박하고 단아하면서 위엄을 잃지 않은 망부상은 「정읍사」의 그 여인을 마음 속에서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정읍사>
백제 여인의 복색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고구려 벽화 속의 여인의 복색으로 조형했다고 한다. 애초 한 핏줄이었으니 복색이야 크게 달랐으랴.
가슴에 손을 모은 기다림의 자세가 한없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단정하고 야무진 체격에 그니의 표정에는 선 채로 돌이 되어도 그 기다림의 마음을 놓지 않겠다는 단호함까지 어려있다.
순후하고 넉넉한, 그래서 허구헌 날 역사 속에서 빼앗기고만 살았던, 그러나 불의 앞에서는 분연히 떨쳐일어섰던, 그리고 평화의 날들을 기다려 오늘도 묵묵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정읍사람들을 그대로 닮았다.
망부상 뒤편 조형물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설화소설로 다시 태어난 『그 천년의 기다림』의 한 대목이다. 그 일부를 옮겨본다.
"기다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기다림이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꽃과 같다. 어쩌면 인내이고 희생이며 용서이고 그리움이며 사랑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가 있고 사랑 받을 수 있다.”
하늘을 보니 아까 집을 나설 때 따라나섰던 낮달이 여기까지 따라왔다. 문득 겹쳐지는 얼굴들이 있다. 그 옛날 먼 길 떠나는 아버지에게 무사귀환을 빌며 배웅하던 우리 어머니의 얼굴이며, 아침에 현관에서 배웅하던 아내의 얼굴이다. 달에 감정을 이입한 이 땅의 모든 우리의 여인들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 백제의 여인은 만월보살의 얼굴로 떠올라 그 월인(月印)을 천강(千江)에 던져주고 있었다. 스쳐가는 저 모텔들의 창가에도 하나씩 달을 걸어놓고 있으리라. 뒤로 물러나는 내장산 봉우리에 솟은 바위들도 하나 하나가 모두 망부석으로 보였다.
"내 가논 ? 졈그?셰라”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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