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을 둘러보는 내내 시선을 무심히 돌릴 수 없게 하는 미학의 근원이 궁금했다. 거친 듯 화폭위를 종횡무진하는 필선의 흔적들, 그러다가 잦아지듯 철저하게 절제하는 응축된 필선의 언어가 주는 오묘한 세계의 정체.
한지의 작가 임효는 그렇게 관객들의 시선과 조우했다.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전시는 처음이다. 세월로 치자면 낯설 수 밖에 없지만 작가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전시를 '가슴 떨리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5월 5일 어린이날, 전시가 열리고 있는 국립전주박물관 뜨락의 나무와 꽃들은 아이들의 웃음으로 더 환하게 피어났다.
지난 4일부터 28일까지 열리고 있는 국립전주박물관의 기획전에 초대된 임효씨(49). 그는 자연과 신화의 절묘한 조화를 화폭으로 실현해온 작가다. 그의 작가적 관심은 '자연'이다. 그것은 '시간'으로 만나는 '신화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화폭으로 드러난 '시간'은 과거나 현재에 멈추어 있지 않다. 그것은 미래를 예견하는 작가의 철저한 의식과 작품관에 의해 형성된 독창적인 언어다. 시간의 근원은 살아 있으나 공간속에서 '흐름'으로 존재하는 추상의 세계. 그것은 전통을 딛고 서있으나 과거로 회귀하는 언어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탐색해내는 미래 지향적인 언어로서의 힘을 발휘한다. 작가는 그것을 '생성(生成)'과 '상생(相生)'으로 소개했다.
"자연과 신화는 시간의 순환속에서 이루어지고 존재합니다. 마치 역사의 고리와도 갖지요. 시간의 영속성이란 거대한 우주의 진리와 같습니다. 신화적 요소를 단순한 소재로만 해석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존재의 의미는 시간의 흐름속에서 가능해진다는 것이죠."
선사시대의 암각화나 강원도 철원의 옛 노동당사 벽에 흩어져있는 낙서, 인도여행길에서 만났던 허물어진 옛 성벽위의 숱한 흔적들로부터 작가가 발견한 시간의 흐름은 화폭위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자연과 신화에 대한 관심은 형식의 탐색에서도 철저하게 실현된다. 시작부터 끝까지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을 벗어나지 않는 작업 과정은 그야말로 고된 노동과 의지를 동반한 치열한 탐색전이라 할만하다. 소재는 한지. 그는 닥나무를 재료로 직접 한지를 제작한다. 그 한지는 다시 천연염색으로 물들여져 새로운 화폭으로 태어난다. 그위에 수묵으로 그림을 그린 뒤, 다시 한지를 올려 수묵의 필선을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하는 작업의 반복. 들기름을 칠하는 장판기법과 보존을 위한 옻칠 마무리를 거쳐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옛 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법이지요. 선조들이 남긴 삶의 지혜는 참으로 가치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미 단절된 전통으로부터 가치를 발견해내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모색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림수묵'과 '드림수묵'. 그가 발견해낸 '우려내고', '물 들이는' 옛 기법의 가치는 새롭고 의미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그림은 소품과 대작을 포함한 58점이다. 사유나 명상, 침묵, 인연 등 철학적 무게를 지닌 화두가 적지 않지만 모두가 우리 일상의 삶으로부터 생성된 언어들이다. 그것은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기호로 드러나기도 하고, 더러는 신화의 한편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1983년 실경산수의 첫 개인전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그가 처절한 자기 고뇌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얻었다는 미학의 관점은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한지와 전통기법, 자연과 신화의 조화라는 새로운 언어로 맞닿아 있다. 이례적으로 40대 현대작가를 주목한 박물관의 기획전의 의도도 이 대목쯤에서 이해 될법 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가는 22일 오후 2시 30분 '작가와의 대화'를 갖는다. 진정한 우리 미술의 길을 찾아 나선 그의 여정이 궁금한 관객들이라면 이 시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임효는 정읍 출신으로 홍익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제13회 선 미술상과 제 7회 동아미술상을 수상했다. 13회의 개인전과 국내외의 주목받는 기획전·그룹전을 통해 한국화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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