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을 알아야 삶의 무늬도 아름답고 윤택해진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삶의 본질을 적확하게 묘파(描破)하는, 굵직한 소설을 읽으며 찬 서리를 경험하는 밤. 이윽고 희푸른 여명이 밝아오면 몸 어딘가에 나이테가 남는다. 소설가 한수영씨(37)의 '공허의 1/4'(민음사 펴냄). 일상과 일상 같지 않은 일상의 감성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꼼꼼한 글쓰기는 작가의 내공이 꽤 높을 것임을 짐작케한다.
'공허의 1/4'은 김주희씨의 '피터팬 죽이기'와 함께 제28회 '오늘의 작가상'(민음사·세계의문학 주관)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씨가 습작을 시작한 것은 불과 3년 전. 1년후인 지난 2002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 '나비' 가 당선돼 등단했다. 약사인 그는 "일기 쓰기와 메모하던 습관을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작품은 "안정된 문장과 잘 짜여진 서사구조를 갖췄으며, 생의 고통과 그것을 응시하는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이 엿보인 완성도 높은 소설”이란 평을 얻었다.
소설은 '우리는 모두 삶의 습기에 약한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서울 강북의 한 아파트단지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30대 여자. '누군가가 이미 써놓은 따분하고 지루한 소설 같은 하루하루'를 사는 여성은 '지는 꽃이 심란'하고 '관절염 때문에 하이힐 한 번 못 신어보고 보낸 청춘이 불쌍해서' 줄곧 '구역질나는 봄'을 내뱉는다. 무릎에 가득 찬 물 때문에 '관절 마디마디에 물 풍선을 매달아 놓은 듯' 몸이 무겁다. 그래서 여자는 '몸 안의 습기를 모두 말리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룹알할리 사막(Rub'al-Khali)의 뜨거운 햇볕을 꿈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이쪽저쪽으로 몸을 돌려가며 바싹 몸을 굽고' 싶은 것이다.
"여자는 습기를 말릴 수 있는 사막을 이상향으로 꿈꾸지만 닿지 못해요. 꿈을 꾸는 그들을 '우주선이라도 태워 보내야 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유토피아는 삶과 멀리 있지요. 현재도 막막하구요.”
주인공의 따분하고 고통스러운 현실과 그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낸 작가의 원숙한 시선은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주인공이 만나는 인간 군상도 한결같이 쓸쓸하다. 수레를 쓰다듬으며 "잘 잤어? 낙타야”하고 말하는 아파트 청소부 남자, 사슴벌레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아이, '죽은 개의 목을 내려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에 의해 '허리가 주저앉아 오 년을 앓다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일그러진 기억에서 사는 사람들…. 한씨는 이 작품을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려는 꿈을 꾸지만, 결국 추락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작가의 고향은 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전주 근영여고를 졸업했다. 작품에서 그는 고향을 언급하지 않지만, 고향의 정취는 어김없이 묻어난다. '요강에 새똥 빠진 소리 허고 자빠졌다. 시방!'이나 '월매나 재미진디. 딸년이 곰살맞어서 살맛이 나겄냐∼'처럼 수려한 토속어 구사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녹록치 않은 삶의 연륜과 신산(辛酸)한 삶의 이해를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현실에 철저하되 치밀한 상상으로 그 현실을 입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에 가까운 언어감각.
"또래들에 비하면 고향에서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앞으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을 생각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거든요.”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야기. 작가의 시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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