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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증언으로 듣는 '전북의 5·18과 여성'

"5월 민주화투쟁 남녀가 따로 없었죠" 전북대 시위 현장, 여학생 적었지만 자발적 참여

전북대 이세종열사 추모비 앞에선 조혜경·김성숙, 문희선씨.(왼쪽부터) (desk@jjan.kr)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 93명 회원 중 여성 회원은 극소수.

 

전북대 출신의 김성숙 문희선 조혜경(전주 거주) 송혜경(광주 거주) 김혜숙 이유숙 서성길(경기도)씨와 구속부상자 회원 양윤신(전주대, 진안청소년집 관장) 김은경(익산중앙교회 목사)씨 등이 고작.

 

1980년 전주의 5월. 전주 전북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나?

 

그 때 여학생은 여성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었을까?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사명감에 현실로 뛰어들었던 이들. 암울한 탄압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민주화의 그날을 위해 수배, 투옥을 감수했던 학생운동의 고민과 투쟁들. 이들에게 5·18은 28년이 지난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80년대 초중반까지 민주화운동의 파편을 기록하여 보관하고 전파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을뿐 아니라, 그 당시 사건의 당사자들은 모든 기록을 소각하고, 심지어는 본인의 기억 속에서조차 지워버리는 가혹한 삶을 강요당했기에 기억조차 희미한 그날들. 지난 17일 민중항쟁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열사 제28주기 추모식에서 전북대 출신으로 5·18새벽 학생회관 집회에 참여했던 김성숙, 문희선, 조혜경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전북의 5·18과 여성'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여성만 구별해서 말하는 것이 어줍잖다는 이들. 그러나 '그때 그당시' 여성들의 활동이 조망되지 않은데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79년 전북지역에서 대학이 가장 빨리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80년 4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각 대학들의 투쟁들이 본격화된다. 5월2일 전북대가 전국 최초의 가두진출을 시도했다. 구 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대규모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5월15일 시민을 포함한 약 2만명이 전주역 광장에 모였다. 이때 전북대는 이미 4월부터 계엄법 위반으로 수배된 박종훈, 최인규 등의 복적생들과 시위의 조직자인 이광철 김형근 김중길 이승희 배현식 등 수십명이 학생회관에 농성을 하면서 생활하게 된다. 이 농성장은 민주캠프였다. 이곳서 시위를 조직할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시민들에게 국내의 정치상황과 민주화 참여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직접 배포 역할도 담당했다. 식사는 학생들이 모은 쌀과 반찬으로 해결했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공동체였다. 17일 철야농성이 진행되고 있던 1층 학생회관과 2층 교수회의실, 현재 대학방송국 자리인 이곳에서 40여명의 학생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농성을 진행하고 있었다. 18일 새벽 0시 계엄포고령이 확대, 제7공수 31연대 공수부대원이 4대의 트럭에 나뉘어 타고 학생회관을 포위하고 전원을 차단한 가운데 1층부터 토끼몰이 하듯 뒤지기 시작했다. 착검을 한 상태로 총을 등뒤에 메고 진압봉을 들고 닥치는대로 학생들을 후려치며 쓰러뜨리고 군화발로 짓밟으며 수색, 포승줄에 묶여져 트럭으로 던져졌다. 일부는 훈방됐고 학년이 높거나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35사단을 거쳐 광주 상무대로 이첩됐다.(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가 발간준비 중인 '기록, 1980년 5월 그 뜨거운 날들의 투쟁' 기록에서)

 

"여성, 남성의 역할 구분이 없었어요. 전북대학생의 여학생 비율이 3분의 1, 4분의 1 정도였어요. 여학생회가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학생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한다는 것이 분위기상 보편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집이 전북대 근처여서 마음 편하게 늦게까지 시위에 참여했던 김성숙(국어국문학과 79학번, 논술학원 운영) 씨는 학생회관에서 지냈던 날들의 한끼 한끼가 우여곡절 끝에 넘어갔다고 기억했다. 김 씨와 5·18의 인연은 어느날 학생회관 주방을 들여다본 것이 탈(?). 농성하면서 밥을 먹어야 했는데 취사 인원이 적고 특별히 당번을 정해서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덜컥 밥담당을 자처한 것. 김치도 인근 교회에서 담아다 준 것으로 기억한 그는, 5월17일 밤과 18일 아침밥 걱정을 하던 차에 '군인이 온다'는 말 한마디만 생생하게 기억날 뿐 13일 이전의 장면은 몇 컷만 떠오릅니다.

 

같이 밤을 새웠던 애와 얼굴을 마주쳐도 모른척, 엄마한테도 두려워서 5·18에 대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그는, 20년 뒤 보상문제로 그때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됐다.

 

"잡혔을 때는 너무 두렵고 긴장해서 맞아도 아프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 그리고 총에 칼을 꽂고 들어온 계엄군 눈에 비친 방의 모습이 오합지졸일 것이라는 생각, 순간 '민주주의 회복' 등 나라살리는 거창한 구호 외치는 것이 초라하게 생각됐다는 것 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같이 있었던 여학생 7명(조혜경 송혜경 김혜숙 이유숙 문희선 서성길)은 35사단으로 끌려갔고 다음 경찰서에서 10일, 헌병대 감방에서 2주정도 머물다 안기부에서 각서를 쓴 다음에야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조직범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했다고 들었다.

 

당시 맨앞에 앉아있던 문희선(사학과 78학번)씨는 계엄군이 내리치는 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는 바람에 다른 여학생보다 육체적, 정신적 피해가 컸다. 피가 얼굴을 타고 끝없이 흘러내려도 두려움에 떨기만 했던 문 씨. 상처를 더러운 수건으로 묶는 것이 다였으며, 경찰서에 옮겨져서야 치료를 받았던 그는, 후유증은 문 씨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그 때 상처가 워낙 커서 5월만 되면 답답하고 숨이 막힙니다. 많이 우울합니다."

 

수업 끝나면 학생회관을 찾아 시위에 참여했던 조혜경(수학과 79학번)씨는 계엄군이 들어오던 현장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이세종과 같이 35사단에 갔다는 것 때문에 이세종 열사 사망에 관한 최후 진술서를 써야 했다. 자발적으로 참여했기에 적은 수의 여학생들끼리도 농성장에서 얼굴만 익혔다가 나중에 최후진술서 쓰면서 이름을 알았을 정도로, 아는 것이 두려운 시절이었다. 누가 농성장에 오라고 한 사람도 없는데도 개인적으로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해서 참여했던 그는, 그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삶의 근거가 흔들렸지만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허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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