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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대중가수론 처음 예술의전당 무대 오른다

'40년 만의 귀향' 8월 1일 개최

"2005년 '친일 논란 발언' 때가 제 생애 첫번째파장이었고 이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이 두번째 파장이에요." 가수 겸 화가 조영남(63)이 8월1일 오후 8시 대중가수로는 처음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2008 조영남 독창회-40년 만의 귀향'을 개최한다. '귀향'은 1960년대 음대 성악과 재학 시절로 돌아가 클래식 레퍼토리를 선사한다는 의미. 최근 인순이, 이소라 등의 가수들이 예술의전당 대관 심사 탈락으로 문제 제기를 한 상황에서 결정한 공연이어서인지 조영남은 마음이 무거운 듯 보였다. "사실 '나도 안하겠다'고 하는게 맞아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자체가 '오버' 같아서….

 

선배답지 못해 미안하지만 그 친구들이 저를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음대 출신인데다, 대중 가수도 콘서트홀에 설 수 있다는 걸 보이고 싶거든요. 만약 제가 그 무대에 어울리지 않으면 또 한참 장벽이 쳐지겠죠. 고정관념을 바꾸고 싶어요."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하게 말하던 그는 갑자기 화제를 바꿔 "지금 음대 출신이라고 말한 건 1968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를 중퇴했는데 3년 전 명예졸업장을 받았기때문"이라며 "늘 중퇴라고 서류에 기재한 덕택에 일파만파 퍼진 학력 위조 파문에 안 걸렸다"고 '껄껄' 웃었다. 11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바퀴 달린 신발에 뿔테 안경을 쓴 조영남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1969년 '딜라일라'로 데뷔해 대중가수로 살아왔는데 왜 지금 클래식 공연인가,뿌리를 찾는 작업인가.

 

▲내 속에는 클래식, 팝의 구분이 없다. 국내서 가장 음향이 좋은 장소에서 노래하는 만큼 공간에 맞추려 한 것이다. 10년 전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는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향이 더 좋은 것 같다.

 

--공연 레퍼토리는.

 

▲클래식, 대중가요, 가스펠을 부를 것이다. 오페라 아리아는 10~20년 만에 부르는 것 같다. '모란동백', '지금', '사랑없인 못 살아요' 등 평소 무대에서 부르지않았던 내 노래도 뽑아놨다. 1974년 복음회 특송가수로 미국으로가 5년간 머무르며 플로리다주 트리니티 신학대학을 졸업했는데 가스펠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연주는 정명훈 씨의 형 정명근 씨가 만든 70인조 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한다. 정명근 씨는 문화계에서 앙드레 김과 함께 나의 광적인 지지자다. 내게 모스틀리 오케스트라의 단장을 맡아달라고 정식 제의를 한 적도 있다. 난 경영을 못한다고 거절했는데, 이때부터 인연이 있었다. 모교인 서울 용문고등학교 남성합창단이화음을 넣어준다.

 

--친동생이자 테너인 부산대 조영수 교수와의 협연은 왜 무산됐나.

 

▲예술의전당 측에서 가족음악회 분위기가 날 것 같다고 조언해 친분있는 바리톤 김동규 씨로 교체됐다. 아홉 형제 중 이제 넷 남았는데 나와 영수에게만 음악과 미술인의 피가 흐른다. 윗대 선조를 보면 음악과 미술의 재능이 지그재그로 엇갈려 있는데 내겐 음악과 미술이 한꺼번에 떨어지고, 동생에게는 음악이 조금 떨어졌다. 하하. 목소리라는 악기는 타고 났지만 형제 중 내가 가장 '포장'이 안됐다. 한 관객은 내게 '신은 공평하다'더라.

 

--대학 시절은 어땠나.

 

▲한양대학교 음대 성악과 62학번으로 입학했다. 고교 시절 한양대 전국 성악 콩쿠르 예선에서 탈락했는데 노래를 잘할 가능성이 보인다며 한양대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고3 때 전국 콩쿠르에서 1등한 후 한양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 초 약혼자가 있는 여자 후배와 연애를 했는데 스캔들이 너무 커졌다. 그랬더니 장학생이 스캔들 냈다고 학교에서 야단치더라. 그래서 그만 다녔다. 다시 시험쳐 서울대 음대성악과 64학번으로 입학했다. 가보니까 예쁜 여자들이 더 많더라. 학과에서 공연하는 오페라의 주역을 주로 맡았다.

 

--40년간 활동한 가수지만 '화개장터' 외에 히트곡이 적은데.

 

▲'화개장터'도 궁여지책이지 사실 난 대표곡이 없다. '화개장터'를 불러서 동서화합이란 꿈을 이룬데 만족한다. 과거 전라도, 경상도 알레르기는 실감 못할 것이다. 우리 때는 굉장했다. 지역 감정이 엷어진 것은 결정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 다음으론 내가 '화개장터'를 부른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하하. 냉전에서 화해 무드로 바꾼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난 화투 그림을 그려서 성공했는데 일본의 잔재인 화투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더라. 내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할 수 있겠다는 탄력을 거기서 받았다.

 

--음악과 미술의 접점을 찾으라면.

 

▲좋아하는게 많은 게 나의 결점이다. 젊었을 때는 노래, 똑같은 감도로 그림과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음악이 본업이 되다보니 나머지가 취미로 몰렸다. 다른 사람과 다른 건 취미에 집요하게 매달린다는 점이다. 재미있게 살려고.

 

--마음 고생을 하면서도 거침없이 발언하고 책을 쓰는 이유는.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발언은, 당시 지식인도 교수도 뻥긋 안하고 아무도 일본과의 문제를 언급 안하니 광대인 내가 한 것이다. 나는 해학적으로 말했는데 사람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결국 오해를 샀다.

 

--때로는 대중의 비난이란 시련도 있었는데, 어떻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나.

 

▲정직하게 얘기하면 난 영악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싶다. 내 딴에는 영악하지 않은 모습까지 연출한다. 영악하게 살려면 모험이 필요한데, 때론 가정을 깨게 될 수도 있다. 또 나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사람이다. 밑천 안 들이고 돈을 번다. 히트곡 없이 가수 생활하고, 재료비가 싼 화투로 그림을 그려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판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 온갖 재주를 부린다.

 

--음반 발매, 책 출간, 전시회 등 올해 계획은.

 

▲음반은 안 낸다. 팔리지도 않으니까. 그간 10여권의 책을 썼는데 '예수의 샅바를 잡다'가 9월 일본에서 번역되고 국내서 재출간 된다. 새 책 '이상의 시 나는 읽었다'(가제)를 쓰고 있다. 보통 이상의 시를 보기만 하지 제대로 읽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에 대한 논문은 많지만 해설서, 안내서는 없다. 20대 때부터 난 이상에 빠져있었다. 평생에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꿈을 이번에 이루는 것이다.

 

원래 제목은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다. 그런데 이번엔 시만 얘기하고 다음에는 소설까지 넣어 쓰면서 이 제목을 붙이려 한다. 이상은 술집 가 여자들 앞에서 노래부르기 좋아하고, 건축을 했으니 미술에 대한 재능까지 나와 비슷하더라. 껄껄. 관람료 5만~12만원. ☎ 02-74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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