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는 북한과의 축구경기가 있었다. 축구는 우리에게는 운동경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축구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 통일의 두 주역이라 할 김유신(金庾信) 과 김춘추(金春秋)는 그 당시 축구 선수였다고 한다.
이들이 젊었을 때 어느 날 김유신의 집 앞뜰에서 축구를 하였는데 김유신이 잘못하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고름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반칙을 한 셈이었다. 김유신은 곧바로 김춘추를 자기집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여동생인 문희(文姬)로 하여금 옷고름을 꿰메게 했다. 이런 인연으로 두 남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여 결국은 결혼으로 골인하게 된다. 당연히 김유신과 김춘추는 문희를 가운데 두고 남매간이 된다.
이 무렵의 축구는 축국(蹴鞠)이라고 했다 하는데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미 우리 삼국시대부터 축국은 인기 스포츠였던것 같다.
또 7세기에 우리의 축국은 일본으로까지 전래된다. 서양의 축구는 중세(中世)시대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축구는 일정한 룰이나 운동장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한마을을 가운데 두고 1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다 골문을 세워놓고 언덕 넘어 또는 강 건너로 공을 차나갔다고 한다. 이런 서양의 축구가 한국에 처음 상륙한 것은 개화기(開花期)때 관립 영어 학교에서 였다.
외국어 학교 출신의 궁내부(宮內府)의 통역들과 외부의 주사(主事)들이 주축이 되어 1897년에 소위 대한척구구락부(大韓擲球俱樂部)를 만들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 무렵의 축구는 한팀에 15명으로 하고 경기장에 입장할 때는 갓을 벗은 망건 차림이었고 저고리가 나풀거리지 못하도록 배자를 입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지자락에 짚신으로 만든 축구화를 신었다고 한다.
골대는 없고 그저 골키퍼의 키만 넘기면 득점으로 간주했으며 일정한 경기시간을 정하지도 않고 어느 한편이 지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항복을 받으면 경기는 끝나는 것이었다. 옛날처럼 멀리 나가는 롱킥보다는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는 하이킥이 더 인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축구는 1천년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셈이다.
/장세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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