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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전주국제영화제 - 가이드] 한국단편경쟁

짧다고 얕보지 말라.

 

'운명적 사랑'은 서로의 눈이 마주친 '몇 초' 안에 이루어지는 법. 18분에서 43분 사이의 러닝타임 중 아무거나 골라도 '그까짓 거' 1시간도 안 된다. 18분도 아깝다면? 당신은 십중팔구 전설(?)의 'A반 18번 조까치'임에 틀림없다.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 정신은 영화에서도 계속 돼야 한다. Keep going, baby!

 

전주국제영화제는 한국단편영화 신작을 발굴하기 위해 2008년까지 운영해 온 '한국단편의 선택: 비평가주간' 섹션을 폐지하고 한국단편 부문을 경쟁프로그램으로 전환했다. '최우수 작품상'에는 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되며, 'KT&G 상상마당 감독상'에는 300만원, 'KT&G 상상마당 심사위원 특별상'에는 2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 김선, 김곡 감독의 <자가당착> 은 언어를 거세당한 마네킹이 주인공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수단은 아지트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인쇄물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 영상과 음향, 그리고 아지트를 급습한 인간들의 목소리들이다. 힘 있고 박진감 넘치는 편집과 사운드는 김곡, 김선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하나 이 작품을 통해 사회를 향해 던지는 그들의 메시지는 보다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지점으로 나아간다.

 

기이하게 이어지는 영상과 기존의 관습을 뒤트는 독특한 서사구조는 이 영화의 백미(白尾).

 

윤성현 감독의 <여행극> 은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하지만, 현실에 머무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단면을 담아낸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현준과 요환은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나오지 않자 기분이 상한다. 두 사람은 틀어진 계획을 아쉬워하며 동네를 서성이다 유부녀가 된 현준의 옛 여자친구를 만난다. 반가워하는 그와 달리 그녀의 반응은 냉담하다.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와 사실감 넘치는 미장센은 감독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한 가족이 여행을 떠난다.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여행길에서 생긴 사소한 사건들로 인해 가족 간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한다. 김혜지 감독의 <기후변화> 는 봉합될 듯 봉합되지 않는 감정의 골을 드러내기 위해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예상치 않게 등장하는 플래시백 장면들은 아내가 잊으려고 했던 기억과 분노를 지속적으로 각인시켜 준다. 이 영화는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 안에서 얽히고 설킨 애증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가족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과 문제의식이 돋보인다.

 

산동네는 한국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자본의 척도로 보면 타자화된 도시공간이지만 정서의 자로 재보면 잃어버린 공동체의 정서를 복원시켜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정욱 감독의 <잠복근무> 는 후자의 정서를 프레임에 잘 포착해냈다. 경찰이 된 하태주는 강간 미수범 지도진을 체포하기 위해 산동네에서 잠복근무를 한다. 지도진의 체포는 일계급 특진뿐 아니라 강력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태주와 동료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번데기 장사로 위장한다. 위장하려던 태주는 중학교 동창생에게 틀키고 지도진은 경찰을 따돌렸지만 태주의 친구에게 잡히는 희극적 반전이 영화적 리듬과 재미를 만들어낸다.

 

◆ 이정욱 감독의 <경북문경으로 시작하는 짧은 주소> 라는 요상한 제목의 이 영화는 쇠락해 가는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아직까지 가족적 혈연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이 소도시에는 할머니, 아버지, 딸 그리고 그들 옆에 살고 있는 고모, 고모부, 고종사촌이 있다. 크게 보면 이들은 한 가족이다. 고모가 집안의 모든 일을 두루 돌보는 대모(大母) 역할을 맡으면서 가족이 확대된 형태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서울로 떠나려 하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서울로 일을 보러 간 사이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혈연의 유대에 의거한 가족도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매우 단순해 보이는 생활을 너무도 덤덤하게 담아낸다는 점이다.

 

동양인의 위는 나이가 들수록 '레닌'이라는 효소가 분배되지 않아 점점 우유를 소화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본주의적 질서에 순응하려고 한다. 최형락 감독의 <우유와 자장면> 은 두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묘하게 음성적으로 오버랩되는(원어는 전혀 다르지만) '레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우리가 나이를 먹으며 잃어버리게 되거나 잊게 되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

 

◆ 강선영의 <연착> 은 죽음에 대한 영화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의 마음을 신화적 이미지와 종교적 이미지를 섬세하게 화면에 수놓아, 마치 화가가 혼을 담아 섬세한 붓질을 통해 그림을 완성하듯이 그려낸다. 한적한 시골의 골목에 한 여인이 등장한다. 사랑하던 이로 여겨지는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은 시골의 집에서 너무도 한적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들마루에서 간단하게 상을 마친 그녀는 그의 방의 유품을 보며 망자에 대해 생각한다. 영화는 이미지만으로 엔딩까지 이어진다.

 

◆ 김은경 감독의 <뉴스페이퍼맨-어느 신문지국장의 죽음> 은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문사의 압력 때문에 자살한 어느 지국장의 죽음을 통해 왜곡된 현재의 신문 시장에 대해 메스를 가하는 다큐멘터리다. 인터뷰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거대 족벌신문사와 재벌신문사의 지국을 운영하다가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 이들이다. 대부분 20년 이상 지국을 운영한 이들을 통해 신문사가 얼마나 악덕 기업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헌법에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언론 권력의 힘에 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정밀하게 보여주면서 정론지라고 말하는 신문사가 그들의 기사와는 얼마나 가증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비판한다.

 

정창과 재희는 재개발 지역이라는 불안한 공간에서 위태롭게 동거한다. 정창의 친구 형기는 재개발에 편승하여 보상받기 위해 탁구장 운영을 계속한다. 김보라 감독의 <유랑시대> 는 시간을 붙잡거나, 과거를 소환하거나,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 불가능함을 설득하지 않고 보여준다. 시간의 가변성과 그에 저항코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재개발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시화된다.

 

◆ 임경동 감독의 <경적> 은 새터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을 잘 포착해낸 수작이다. 탈북자로 명명되는 '새터민'은 전화도 미안해하면서 받고, 감시하는 형사에게 고분고분하다. 고 형사는 강변에 버려진 차량의 주인을 찾고 있다. 철민은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달려간다. 보험회사 영업사원 영림은 차 안의 백미러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며 사건 현장에 도착한다. 탈북자 신분인 영림과 철민은 고 형사의 시선으로, 경계와 관심 사이에서 흔들린다. 고 형사의 의혹의 시선에 구속된 탈북자의 감정은 고장난 경적 소리로 폭발한다.

 

◆ 이종필 감독의 <달세계여행> 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한 두 남녀가 현재를 넘어 자신들이 직접 만든 우주선을 타고 달로 향한다. 실험적인 영상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신비한 분위기의 음악, 다양한 영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대사와 주인공들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 움직이는 듯한 카메라 워킹 역시 눈여겨 볼 만하다.

 

◆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 은 스스로 고립된 인간의 의식과 그 안의 도덕적 신념이 얼마나 볼품없는지를 우화적으로 표현한다. 비좁고 초라한 반지하에 부모 없는 오누이가 스스로 갇혀 지낸다.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그들의 집에 어느 날 누군가가 침입한다. 5분만 있다가 나간다던 그는 일행인 듯 보이는 괴한 둘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잘 짜인 드라마나 사회비판적 주제의식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밑도 끝도 없는 부조리함에 눈과 귀를 맡기는 것이 <남매의 집> 을 방문하는 가장 적절한 자세가 아닐까.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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