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천리, 명품상감청자의 메카…고려청자 대중화 기여 의미도
누군가 고려청자의 신비로운 색깔은 가을하늘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부안으로 취재하러 가는 길, 길가에 가득한 코스모스를 저리도 흔드는 건 바람이 아니라 가슴 저리게 맑은 비취빛 하늘이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청자의 비취빛, 즉 비색(翡色)은 옥색(玉色)을 모방한 것이다. 고대 중국인에게 옥은 군자를 상징하는 귀중한 보석이었지만,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청자다. 도자기에 옥색을 입혀 대리만족을 얻으려 했던 것.
그러나 일찍이 도자기술이 발달되었던 중국조차 비색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도자기의 원료 흙인 태토(胎土)와 유약의 질이 일정한 수준에 오른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형태로 완성될 수 있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월(越)이라 불렸던, 중국 대륙의 동남부 저장성(浙江省)지방에서 생산된 청자는 '월주청자'라 불리며 명품 도자기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렇지만 중국청자는 진정한 비색을 완성하지 못했다. 중국청자가 비록 중후한 맛은 있으나, 유약이 투명하지 않아 태토의 색감과 문양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청자기술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되, 고려 도공들은 그 기술을 창조적으로 적용했다. 중국처럼 벽돌가마를 쓰지 않고 흙가마를 썼으며, 가마의 크기도 줄였다. 그리고 불과 흙, 공기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철분이 함유된 백토에 투명한 유약을 바른 뒤 천천히 불을 때면 유약이 녹으면서 철분이 산화된다. 이윽고 유약이 충분히 녹게 되면, 공기의 유입을 완전히 차단한 채 더욱 센 불을 지핀다. 그러면 흙과 섞였던 산소까지 모두 타게 되는데, 이때 비색이 탄생한다. 이처럼 산화와 환원이라는 복잡한 화학공정을 정확하게 거쳐야만 투명한 비색을 머금은 도자기, 중국 북송의 화가 서긍(徐兢)이 극찬했던 그 고려청자가 완성된다. 남송의 시인 태평노인은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을 신비로운 색, 비색(秘色)이라 칭하며 어떤 청자도 견줄 수 없는 천하제일이라고 했다.
투명한 비색과 더불어 고려청자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이다. 파도와 물고기, 앵무새, 연꽃, 학 등 자연에서 따온 소재를 음각과 양각, 인화와 상감 등 다양한 수법으로 문양을 새겼다. 특히 상감청자는 고려청자의 백미다. 먼저 반(半)건조된 그릇 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초벌구이를 한다. 그리고 무늬에 따라 흙으로 메우고 유약을 칠한 뒤 다시 구우면, 문양이 유약을 통해 은은하게 드러나는 상감청자가 된다.
청자가마터는 주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가마터가 발견되는 곳은 전남 해남과 강진, 그리고 전북 부안이다. 해남에서 발굴된 청자가 대부분 품질이 떨어지는데 비해, 강진과 부안에서는 왕실이나 귀족에만 공급되던 질 높은 청자가 많이 발굴되었다. 부안과 강진은 모두 좋은 흙과 물이 풍부하고, 청자를 개성으로 운반하기 쉬운 물길을 가지고 있다. 이런 지리적 여건이 고려시대 최대 도요지를 형성케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수목이 울창하고 좋은 목재가 생산되어, 궁궐이나 사찰의 기둥나무를 제공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풍부한 땔감 역시 도요지로서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일 터. 부안은 청자생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고, 그에 걸맞게 최고의 청자를 생산했다.
부안의 가장 큰 특징은 상·중·하급의 청자가 모두 발견되면서도 상감청자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청자가 대중화되면서 수요계층에 따라 맞춤형으로 생산·보급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더 이상 부안청자요가 관요인지 지방요인지 논쟁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안의 가마터는 줄포만을 중심으로 유촌리와 진서리 등지에 밀집되어 있는데, 특히 유촌리에서 발굴된 최상급 청자들은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게 많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상감인물문매병 복원품, 청자상감용파문대매병 복원품 등이 예다. 청자상감인물문매병은 새겨진 문양이 다른 어떤 청자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것이며, 청자상감용파문대매병은 크기도 크기거니와 왕의 상징인 용과 파도가 상감되어 있어서 권위와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왕실용 청자매병이다. 고려청자의 정점인 상감청자,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이 만들어진 곳이 바로 부안이다.
이처럼 가치가 높은 부안청자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은 강진청자가 대규모로 먼저 발굴되었고, 이에 맞춰 강진군이 청자박물관을 지으며 장소 마케팅을 선점한 이유가 무엇보다도 크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에 많은 청자가 도굴된 것도 한 몫을 했다. 앞서 언급한 명품청자가 이화여대박물관에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후카다 야수토시라는 일본인이 도굴한 청자의 일부를 이화여대에서 매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강진군이 매너리즘에 빠져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관한 지 10년이 막 지난 강진청자박물관은 관리가 부실해 벌써 낡았다. 때마침 총공사비 250억원을 들인 부안청자전시관이 내년 중에 개관된다. 전시관을 근거지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유천리 일대가 명품 청자의 메카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오히려 진짜 선진지이며 무서운 경쟁자는 일본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도자기기술을 강제로 수입한 일본은 4세기만에 세계 최고의 도자기강국이 되었다. 부안이, 아니 한국이 따라 잡아야 할 대상은 바로 일본이다.
/이경진 문화전문객원기자(시인·문화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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