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숨결 공유한 지역…생명 공간으로 되살아나
「혼불」에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양상이 나타난다.
문학박사 고은미 씨는 「혼불」에서만, 전북과 관련된 250여 가지의 스토리텔링 소스를 뽑아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혼불」의 역사 관련 서술은 남원을 중심에 놓고 마한→백제→통일신라→후백제→조선에 이르고 있다"며, "철저하게 남원과 전주라는 지역적 관점에서 역사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소설 속 전주고보의 역사 선생 심진학과 동경 유학생 강호를 통해 드러나는 이 역사의식은 철저하게 토착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계보를 찾아 후백제, 백제, 마한으로 역사적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들의 역사인식의 중심에는 자신들이 정주(定住)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이 자리하고 있다. 때문에 심진학은 자신을 '백제의 아들', 자신의 조상을 '백제 유민'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지역 정체성에 뿌리를 둔 심진학의 역사 인식은 조선 건국의 시조 이성계를 '백제의 후손'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은 백제인지도 몰라. 백제를 무너뜨린 나당 연합군의 신라를 고려는 흡수해서 무너뜨렸고, 조선은 또 그 고려를 무너뜨렸으니, 백제를 못 잊어 세운 나라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에서, 백제 사람, 백제의 자손, 이성계는 몸을 일으켜 신라의 핏줄이 섞인 고려를 치고 조선을 세웠다. 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혼불」 8권, 151쪽)
이기채 역시 전주로 시험을 치러 떠나는 아들 강모를 사랑에 불러 앉혀 놓고 풍패지향(豊沛之鄕)의 고사를 들려준다. 이기채가 전주를 설명하면서 풍패지향의 고사를 인용하고, 조선의 발상지이면서 동시에 성씨의 관향이라는 점을 강모에게 강조하는 것은 장소가 갖는 위상을 통해 그 땅에서 자란 자손으로서의 자부심을 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이기채가 아들 강모에게 지역의 역사를 들려주듯 아버지에서부터 이어진 지역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아들에게 이어지고 또 그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지역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의해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가 전해지고 후세대는 그들 조상들의 삶의 자리를 토대로 이어져 내려온 지역의 역사를 조상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지역을 통해 후대와 현대가 이어지고 삶의 현장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공유된 이들의 삶에 그 지역은 '어여쁜 곳'이 되고 선조들의 숨결이 오늘날까지도 자국을 역력히 남기고 있는 살아 숨쉬는 '생명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최기우 문화전문객원기자(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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