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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17)안진경(顔眞卿)의 삼고(三稿)

격분·슬픔·아름다움 '예술적 승화'

顔眞卿 爭座位帖(與郭僕射書), 764년 (desk@jjan.kr)

안진경의 해서가 초당의 서법을 발전시켜 새로운 이채를 발하였다면, 그의 행초서는 그의 감성과 강직한 성품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간다 기이치로는 중국서예사를 일별하여 왕희지와 안진경을 이대조류로 볼 만큼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에는 그의 거침없는 행초서가 크게 작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쟁좌위첩> 을 비롯하여 <제질문고> 와 <제백문고> 가 특히 유명하다. 이들을 일컬어 삼고(三稿)라 칭한다.

 

안진경은 47세 때(755) 경험한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점차 독자성이 발휘된다. 안사의 난이 발발한 후 건원 원년(758, 50세)에 쓰여진 <제질문고> 는 그가 종형 안고경의 막내 아들 계명(季明)의 제문초고이다. 본문에 "아버지는 함락되고 아들은 죽었다"라고 한 것처럼 고경과 계명이 잇달아 안록산 때문에 참살된 후, 진경이 계명의 형 천명(泉明)을 파견하여 아버지와 동생의 시신을 거두어 장안에 합장하고자 한 때이다. 그러나 수습된 고경의 유체는 이미 한 쪽 다리를 잃어버렸고, 계명의 시신도 겨우 머리 하나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서글픈 비애가 담긴 이 초고는 물론 글씨로써 고금의 명필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왔으나 문장 또한 훌륭하다.

 

안진경의 두 제문에는 비애를 넘어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격함이 잘 드러나 있다. 육친의 참살과 육편(肉片)의 수습으로 인한 비분의 격정이 필단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가며 격앙된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 단숨에 쓰여진 한 폭의 제문은 긴박함으로 가득 차 뜻하지 않은 아름다움과 전아함을 연출하였다. 한마디로 비애미의 예술적 승화이다. 이 초고들의 전아함은 역사적으로 왕희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거기에 나타난 격함과 긴박감은 진경에 이르러 처음 개척된 서미(書美)라고 평가한다.

 

그의 또 다른 걸작 <쟁좌위첩(爭座位帖)> 은 우복야 곽영예(郭英)에게 보낸 서간초고이다. 곽영예가 당시 환관으로서 권세를 남용하고 있던 어조은(魚朝恩)에게 아첨하여 백관들의 집회시 좌석서열을 어지럽힌 사실에 항의한 글이다. 마음 속의 격정을 억누르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설파한 글은 물론 그 서예적 표현을 통해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안진경이 강직한 성품을 지녔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특히 그가 이 글에서 질서를 의미하는 '이륜(彛倫)'이라는 말을 세 차례나 반복하여 인용한다. 764년 56세 때 쓰여진 쟁좌위첩은 앞에서 언급했던 격함이 한층 내면적으로 깊어져 고삽한 형태로 나타났다. 동기창은 「화선실수필」에서 송4대가(소식·황정견·미불·채양)가 모두 안진경의 <쟁좌위첩> 을 배웠음을 서술한 뒤, "안로공(안진경)의 첩을 살펴보면 기이하고 빼어나 위·진·수·당 이래의 풍류와 기골을 덮어 가리고 있다. 구양순·우세남·저수량·설직·서호·심전사 등의 제가들을 돌아봄에 모두 법도에 구속되는 바가 있는데, 어찌하여 안로공만이 쓸쓸히 승묵(繩墨)의 밖에 나아가 마침내 그것과 합치되었을까?"라고 평하였다. 송나라 주장문(朱長文)은 「속서단」에서 당 이후의 서예가를 신·묘·능 3품으로 나누었는데 진경을 신품 3인(안진경·장욱·이양빙)의 첫 자리에 배치하였다.

 

스기무라 구니히코(杉村邦彦)의 말처럼, 그의 수많은 비각이 각각 체제를 달리하고 있는 것은 '대개 그가 느낀 일이나 만난 흥취에 따라 하지 않음이 없었다'는 것으로 안서가 상황과 감흥에 따라 이른바 '일비일면모(一碑一面貌)'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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