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존 더 그라프 외 2人 지음, 박웅희 옮김, 한숲, 2002> 돈이 민주주의다
"커피 문화의 원조는 유럽이다. 하지만 세계 인스턴트 커피 트렌드와 기술을 주도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 한국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드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세계 각국에 지사를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아니라, 한국 지사가 글로벌 시장 전체에 적용되는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거나 최초로 시작하는 것이다. (…) 박영렬 연세대 교수(경영학)는 '한국 소비자들은 트렌드에 민감하고 까다롭기로 세계 시장에서 정평이 나 있다'며 '그런 점 때문에 한국은 그들에게 중요한 성공의 시험장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한국이 소비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한다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최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소비유통 분야에서의 대기업과 지역 영세상인들의 충돌도 그런 부작용에 속한다.
이 충돌은 '2자 게임'이 아니다. 소비자도 참여하는 '3자 게임'이다. 소비자들은 말이 없지만, 사실 이들이 모든 걸 결정한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은 상인들이 '국적'과 '지역'을 뛰어넘어 오직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와 '가격'으로 승부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소비자들이 대기업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의미한다. 그래서 지역 영세 상인들은 그걸 전제로 해 주로 관(官)을 상대로 한 힘겨운 투쟁에 임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의 그런 의식은 건강하며 바람직한 것인가? 한번쯤 자문자답(自問自答)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997년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 TV에서 방영돼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어플루엔자> 라는 다큐멘터리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 병의 이름은 바로 어플루엔자(Affluenza)다. 이 다큐를 보강해 낸 책이 존 더 그라프(John de Graaf), 데이비드 왠(David Wann), 토머스 네일러(Thomas Naylor), 박웅희 옮김, 「어플루엔자 : 풍요의 시대, 소비중독 바이러스」(한숲, 2002)다. 어플루엔자>
어플루엔자란 무엇인가? "고통스럽고 전염성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병으로,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과중한 업무, 빚, 근심, 낭비 등의 중상을 수반한다." 이 책에 따르면, "역사상 최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시대, 우리 사회는 탐욕에 감염되고 있다. 인간은 더 많은, 더 좋은 그리고 특히 새로운 것들을 살 수 있는 가능성에 모든 넋을 빼앗겼다.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소비중독 바이러스, 어플루엔자에 감염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마저 소비되고 있다. 어플루엔자는 최악의 전염병이다."
이 전염병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 원리가 된 경제적 팽창에 대한 강박적인, 거의 맹신에 가까운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어플루엔자의 구체적 증상은 쇼핑 중독으로 나타난다. 소비상품을 만드는 기업들은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이윤 총액의 25%를 올린다. 1986년만 해도 미국에는 고등학교가 쇼핑센터보다 많았지만, 불과 15년이 채 안되어 쇼핑센터가 고등학교의 2배를 넘어섰다. 10대 소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로 쇼핑은 꼽은 사람은 전체의 93%에 이르렀다. 그들의 쇼핑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신용카드다.
미국인은 1인당 평균 5장이 넘는 카드를 소지하고 있는데, 소지 연령이 점점 낮아져 일부이겠지만 12살 짜리 아이들까지 신용카드를 갖기에 이르렀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소비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되도록 가입자들이 가급적 빚을 많이 지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마케팅 기법을 구사한다. 대부분의 상점들도 별개의 고객 카드를 발행하고 있다. 단골 구매자를 대상으로 구매 물품을 항목별로 추적하기 위해 약간의 할인 혜택을 주면서 그 거래정보를 마케팅에 이용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는 한국에서도 많은 업종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어플루엔자라는 전염병은 주로 미디어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홈쇼핑 방송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 책에 따르면, "비판론자들은 그런 방송을 멍청이들에게 끊임없이 싸구려 물건들을 보여주는 채널이라고 조롱하지만 그런 방송을 케이블 TV에서 아주 볼 만 하고 대단히 유익한 채널로 꼽는 미국인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과거에 누군가 텔레비전을 '광대한 쓰레기장'이라고 불렀는데, 쇼핑 채널이 등장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통신판매 카탈로그와 쇼핑 채널은 단순히 상품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대단히 효과적으로 어플루엔자를 확산하는 매개체인 것이다."
어플루엔자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간 10만 달러를 벌면서도 자신이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모두 최정상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 것이다. 과거엔 자신이 부자라는 걸 감추려 했지만 이젠 뽐내는 세상이 되었다. 대중매체가 그걸 미화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젠 "돈은 민주주의를 지배하지 않는다. 돈이 민주주의다."라는 말까지 나오는 세상이 되었다. 해결책은 없는가? 없다!
지미 카터라고 하면, 한국인들조차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그가 여러모로 무능했던 건 분명하지만, 그가 어플루엔자에 도전한 거의 유일한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는 1979년에 행한 '국민병(national malaise)' 연설에서 "너무 많은 미국인들이 현재 방종과 소비를 숭배하고 있습니다."라고 개탄했다. 어플루엔자를 대하는 그의 이런 자세가 재선 패배의 한 이유가 되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샤이는 "카터가 패배하는 데는 그가 경제성장과 자본개발이라는 높고, 넓고, 멋진 개념이 현대 미국의 정신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았는지 알아채지 못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어플루엔자에 영합하는 정치인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어플루엔자는 대통령 권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병도 아니다. 이미 구조화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소비(consumption)라는 영어 단어는 낭비, 약탈, 탕진, 고갈 등을 의미했다. 폐병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언제부터 바뀌었던가?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 이후다. 국민이 소비를 자제하면 경제가 돌아가질 않는다. 소비는 미덕을 넘어 애국이 된 세상이다. 그럼에도, 무력하게 들릴망정 저자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을 한번쯤 음미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이 책의 핵심적인 논지는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을 넘어 욕구와 필요를 줄이는 차원에 이른다. 우리는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의 생활방식을 좇는 태도를 버리고 만족할 줄 알고 건강한 사람의 생활방식을 따를 수 있다. 풍요로운 생활방식에서 야기되거나 심화되는 각종 질병과 싸우기 위해 우리가 지출하는 그 모든 돈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어플루엔자는 돈을 더 많이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적게 씀으로써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질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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