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진 논설위원
"전주는 성문이 4개 있고 성곽 위에는 소포루가 8개 있다. 인가는 성내및 성외 동남면 삼방에 연담하여 호수는 약 2000여 호이다. 감영은 남문내에 있고, 그 동쪽에는 호남포정사라는 관청과 그 동북에는 완산부가 있다. 객사는 '풍패관'이라 칭하고, 관청 건물로는 선화당 내아 관풍각 군관청 포도군관청 등 40여 개가 있다."
1888년에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리지'에 나오는 전주에 관한 기록이다(일제식민시대 구술실록/ 전주문화재단). 당시 동서남북 4개의 문에는 큰 종이 걸려 있었다. 아침 6시와 밤 10시에 종을 울리고 문을 개폐해 교통을 통제했다.
전주에 언제부터 이러한 성곽이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 말엽인 1389년 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훨씬 전에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전주부성은 정유재란때 크게 파괴되어 1734년 관찰사 조현명이 새롭게 수축했다. 1767년 다시 대화재로 남문과 서문을 비롯 관아와 민가 수천호가 소실되자 관찰사 홍낙인이 중건했다. 이때 4대문은 완동문(完東門),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공북문(拱北門)이라 불렀다.
전주부성은 1894년 동학혁명 때도 2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했다. 동학군에 의해 점령된 전주성을 향해 관군은 완산칠봉 등에서 독일제 크루프포 등을 쏘아댔다. 이로 인해 7000-8000호에 이르던 전주는 거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성곽도 일부 파괴되었다.
파괴되기 전, 전주 성곽은 전주우체국 부근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의 다소 원형에 가까운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다(全州府史·1942년). 동문은 현재의 동문사거리, 서문은 다가동파출소 앞, 북문은 현 오거리(북문승강장)에 있었다.
천년고도 전주를 지키던 전주부성은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1907-1908년 남문에서 서문과 북문까지, 1911년 이후 남문에서 동문을 거쳐 북문까지 헐어졌다. 결국 풍남문 하나만 덩그라니 남게된 것이다.
며칠 전 전주출신 정동영 신건 장세환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별 실속없이 끝났다. 정치적 수사보다 유구조사와 예산확보가 먼저일 것이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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