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최일남씨도 1950년 본보 형상문예 당선…신춘문예 출신들 2007년 '전북일보 문우회' 발족
전북일보 역사는 1950년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박용상(1910∼1980)이 같은 해 10월 10일 전북시보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판권을 인수받으면서 시작됐다. 창간 60년. 전북일보의 오랜 역사 속에서 신춘문예의 역사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전북일보 역사의 시작점인 1950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신춘문예는 중간에 한 번 중단됐다가 1989년 다시 시작됐다. 문제는 초창기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신춘문예가 언제 시작돼 언제까지 계속됐으며, 왜 중단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나 이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없었다. 1961년 본보 신춘문예 아동문학 당선자로, 전북문단사를 정리하며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대해 언급했던 김순영씨는 "아마 중단됐다면 군사정권 시절 1도 1사 방침에 따라 신문사 통폐합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중단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50년 전북일보 현상문예에는 소설가 최일남씨가 당선됐다. '현상문예' 대신 '신춘문예'로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최씨의 약력에는 '현상문예'로 기록돼 있다.
1956년에는 배인기 이봉섭 박래철씨가 당선됐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본보 논설위원으로도 재직했던 이봉섭씨는 전북예총 회장을 지냈으며, 작품활동도 소설과 평론, 영화 시나리오까지 그 폭이 넓었다.
1959년에는 전북일보 지령 3000호 기념 문예작품 현상공모가 개최됐었다. 허소라 전북문학연구원장은 이 때 희곡이 당선됐었다. 당시 상금은 5만원이었는데, 신문사 사정상 현금으로 받지 못하고 고급 시계로 대신했다고 한다. 시상식은 1959년 12월 25일 신문사에서 진행됐으며, 수상작 '응혈'은 1960년 1월 5일부터 11일까지 7회에 걸쳐 연재됐다. 허소라 원장은 "군대에서 막 제대해 그 무렵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고 떠올렸다.
당시 시는 현재 서울소바를 운영하고 있는 김현섭씨와 국민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신찬균씨, 그리고 이광섭씨가 당선됐으며, 소설은 배병윤 김용춘씨가 당선됐었다.
1961년에는 정병렬(시) 김정희(소설) 김순영씨(동화)가 당선됐다. 김순영씨는 "은수저 한 벌을 상품으로 받았었다"며 "당선됐을 때의 기분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시상식이 실린 신문기사를 아직도 스크랩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병렬씨는 "당시 김해강 시인과 신석정 시인이 심사위원이었다"며 "고등고시를 준비하다 방황하던 시절 신춘문예로 새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허소라 원장과 김순영 정병렬씨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50년대에는 '현상문예'였지만 60년대 들어 '신춘문예'로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1973년 신문이 통폐합되면서 신춘문예가 중단됐으며, 1989년에 부활됐다.
현재 전북일보 사장인 김남곤씨가 1988년 편집국장으로 임명된 후 고 서정상 회장에게 신춘문예 부활을 정식으로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남곤 사장은 "당시 각 도마다 신춘문예가 하나씩 있었다"며 "문단 등단 통로로서 문예지가 있기는 했었지만, 전북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신춘문예를 개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198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는 부활됐다. 전북일보는 사고를 일곱차례 이상 게재하면서 대대적으로 신춘문예 부활을 알렸다. 그 해 김유석(시) 박만득(소설) 신경자씨(동화)가 당선됐는데,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서정인, 한국 PEN클럽 회장을 역임한 문덕수, 이기반 전 전주대 교수, 엄기원 한국아동문학연구회장 등 심사위원의 면면도 화려했다. 이 때 상금이 소설은 100만원, 시와 동화는 50만원이었다.
90년대 들어 변화가 있다면 동화 부문이 없어지고 수필 부문이 신설됐다는 것. 수필이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문학으로 주목받으면서 수필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전북일보는 1998년 신춘문예부터 동화 대신 수필을 공모했다. 이로부터 딱 10년 뒤인 2008년에는 동화 부문을 부활, 시와 소설, 수필과 동화 4개 부문에서 작품을 공모하고 있다.
2008년 심사를 맡았던 아동문학가 서재균 김자연씨는 심사평을 통해 "그동안 전북일보가 동화 공모를 중단해 섭섭했는데, 이번에 다시 부활하고 보니 그간 분출구를 찾지 못한 예비 동화 작가들이 한꺼번에 모여 든 것 같다"고 말했다.
2007년에는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문인들의 모임인 '전북일보 문우회'가 만들어졌다. 전북일보 신춘문예 출신들이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이들의 모임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제기돼 왔지만, 2006년 연말 '2007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예비심사를 맡으면서 공식적으로 논의됐다.
1995년 당선자인 박태건씨는 "문단에 많은 모임들이 있지만 신춘문예 출신 문인들의 모임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출신들이 모임을 결성, 건강하고 바른 문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의미있을 것 같아 모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유석(89년 시) 이세재(93년 시) 이준호(93년 소설) 김종필(94년 동화) 박태건(95년 시) 김형미(2000년 시) 최기우(2000년 소설) 장창영(2003년 시) 문신(2004년 시) 경종호(2005년 시) 기명숙(2006년 시) 이현수씨(2007년 시) 등이 창립을 주도했다.
전북일보 신춘문예가 부활된 1989년부터 2010년까지 본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문인은 66명. 김유석 전북문우회장은 "전북일보 신춘문예 출신 문인들의 문학적 역량을 모아내는 통로이자 문단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회원들의 열망이 커 올해는 기필코 창간호를 발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북일보 문우회는 창립 이래 전북작가회의, 최명희문학관, 미래문화포럼 등과 다양한 문화사업을 펼쳐 왔으며, 해마다 본보 신춘문예의 예심을 맡아 보는 의미있는 전통도 만들어냈다.
'임용이 없는 고시'라고 말하는 신춘문예. 전북일보와 전북일보 문우회는 외로운 문학의 길에서 서로에게 의지해도 좋을 든든한 버팀목인 셈이다. 다가오는 새해 아침, 또 어떤 문청이 새 봄을 맞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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