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오전 영국 스코틀랜드의 중심도시인 에든버러 시내 뉴윙턴 묘지.
묘지 한쪽에 자리 잡은 소박한 비석 앞에서 한국인 30여명이 헌화하고 예배를 올렸다. 묘비명은 '만주와 중국에서 40여 년간 사역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ㆍ1842-1915)'.
존 로스는 묘비명대로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다. 스코틀랜드가 배출한 숱한 선교사 중 한 명이지만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그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어를 배웠고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나 다시 한국어를 수학했다.
1882년 로스 선교사가 한글로 펴낸 누가복음 번역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성경이다. 그는 1887년에는 신약을 한글로 완역한 '예수셩교젼셔'를 발간한다. 그가 누가복음 번역서를 내면서부터 'God'를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존 로스 선교사의 묘비를 찾은 한국인들은 한경직 목사가 개척한 한국의 대형 장로교회인 영락교회 교인들이었다.
교인들은 뉴윙턴 묘지를 참배하고 나서 역시 에든버러 시내에 있는 메이필드 살리스버리 교회로 이동했다. 이 교회는 서른살 때부터 40여년간 중국과 만주에서 선교한 로스 선교사가 귀국해 은퇴한 후 장로로 지내던 교회다.
영락교회 교인들은 지난 2-6일 에든버러에서 열린 2010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데 이어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일대에 흩어진 로스 선교사의 발자취를 밟는 '존 로스 루트' 성지순례를 지난 9일까지 진행했다.
영락교회가 만들고 있는 존 로스 루트는 가톨릭(구교)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장로교의 본고장이 된 스코틀랜드의 성지들을 둘러보고, 한국 개신교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긴 존 로스의 생애를 '무덤(에든버러)에서 요람(니그)까지'의 순서로 찾는 코스다.
사실 한국에 개신교를 도입한 초창기 선교사들은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져있다.
1884년 한국을 찾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자 교육가로 1885년 배재학당을 세운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 1886년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학당을 세운 미국 감리회 여성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 등이 그들이다.
이들과 달리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는 한국 땅을 밟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스가 최초로 한글 성경을 보급하면서 우리나라에도 개신교 신자가 처음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가 전파한 장로교가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계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영락교회의 생각이다.
영락교회 교인들의 발걸음은 7일에는 에든버러에서 대형버스로 10시간 이상 하이랜드(Highland)를 달려야 도착하는 스코틀랜드 북서쪽 스카이(Skye)섬으로 이어졌다.
하이랜드는 장엄한 골짜기와 호수가 끝도 없이 펼쳐지고 한여름에도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쳐 거칠고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이다.
스카이섬의 항구마을 포트리(Portree)의 아담한 교회를 찾은 교인들은 스물여덟살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이곳에서 첫 목회를 하던 청년 목사 로스의 발걸음을 되짚었다.
영락교회는 한글 성경을 우리나라에 전해준 로스 목사의 행적을 기리는 동판을 만들어 포트리 교회 벽면에 부착하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포트리 교회 산도르 담임목사는 "우리 교회에 한국인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아름다운 스카이섬을 떠나 만주로 갔던 존 로스 목사가 있었기에 우리가 만나게 됐다"라고 반겼다.
포트리에서 다시 북동쪽으로 3-4시간 이동하면 스코틀랜드북단의 도시인 인버네스 인근 마을 니그(nigg)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바로 로스 목사의 고향이다. '이집트 하우스'라고 이름 붙은 노란벽의 집이 바로 로스 목사가 20여년을 살았던 고향집이다.
지금은 개인 소유가 된 곳이지만 영락교회 교인들은 이집트 하우스의 마당에 로스목사를 기리는 작은 돌판을 설치했다.
로스 목사는 고향 니그를 떠나 글래스고 예술대와 에든버러대 신학대학원을 거쳐 28살에 목사안수를 받은 후 포트리 교회에서 2년간 목회한 후 결혼했고, 결혼 다음날 중국 선교를 위해 떠났다.
여행경비를 아끼려고 그는 캐나다행 배를 탔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본, 상하이를 거치는 긴 여행끝에 만주지역으로 들어갔다.
영락교회 이철신 담임 목사는 "늦었지만 이제라도 로스 목사의 행적을 기리게 돼 다행스럽다"며 "한국 교회 중 어느 곳에서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철신 목사는 "로스 목사가 보급한 한글 성경 덕분에 스스로 성경을 읽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이미 기독교를 알고 세례 받기를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로스 성경은 지금으로서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심한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했지만, 단어나 개념은 놀랄 만큼 치밀하게 선택해 로스 목사의 한국사회에 대한 높은 이해도와 노력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에든버러에서 유학한 후 로스 목사의 발자취를 더듬는 '존 로스 루트'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영락교회 하충엽 목사는 "오늘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존 로스 목사의 큰 은혜를 입었다"고 말했다.
하 목사는 "로스 목사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까지 힘겨운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다"며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를 잃었고, 그 후 재혼한 아내와 아이들 4명도 차례로 중국 땅에 묻었지만 그는 슬픔을 선교의 열정으로 승화했다"고 소개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