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를 풍미한 가요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른 한명숙(75) 씨를 만난 건 11일 저녁 합정동의 한 맞춤 의상실이었다.
파란 머리띠에 파란 테 안경으로 멋을 낸 그는 오는 20일 여의도 KBS홀에서 열릴 '노란 샤쓰의 사나이 50년-한명숙 헌정음악회'에 입을 의상을 꼼꼼히 챙기고 있었다.
이 무대는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 후배들이 1961년 한씨의 데뷔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 발표 50년을 축하하고자 마련하는 자리다. 같은 장소에서는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씨가 기획한 '한명숙 헌정음악회 기록전-한명숙의 50년, 다시 만나다'가 함께 열려 사진 300컷, 음반 재킷 80장, 훈장과 상패 등이 전시된다.
1960년대 '꾀꼬리 가수 시대'에 허스키한 음색으로 주목받은 한씨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일본과 동남아시아,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도 널리 애창되며 해외 순회공연에도 적극 나선 '한류스타 1호'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날 한씨는 5년 전부터 퇴행성 관절염을 앓았다며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낯빛은 화사했고 특유의 허스키함이 서린 목소리도 또렷했다.
"옛날에는 세월이 더디다고 느꼈는데 이 나이가 되니 세월이 참 빠르네요. 후배들이 선배를 챙겨주는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요. 행복하고 기쁘죠."
간결하게 뭉뚱그린 소감 뒤에 풀어낸 한씨의 인생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 불안정한 시대의 비극이 온전히 인생에 침투한듯 그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한씨는 1935년 12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로 진남포가 함포사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는 모습을 보며 모친과 월남했다. 일제강점기 중국을 오가며 사업했던 아버지는 이미 광복 후 남한에 정착한 상태였지만 월남한 모녀는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소설 '방랑의 가인'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셨어요. 부모와 헤어진 주인공이 유명 가수가 되어 부모와 극적으로 만나는 내용이죠. 어머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우셨어요."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그는 외삼촌의 평양음대 제자인 드러머 임원근 씨의 추천으로 1952년 '태양악극단'에 들어가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더불어 군예대에 참여해 한국전쟁 당시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하기도 했다.
"위문 공연을 가면 에스코트를 해주는 군인들이 얼마나 멋있었다고요. 제가 육군 최고 인기상을 탔어요. 어릴 때는 꽤 예뻐서 남자들이 줄을 섰죠. 호호호."
이후 그는 미8군 쇼 단체인 '럭키쇼단'에 캐스팅됐고 '세븐 스타 쇼' '에이원 쇼' 등으로 무대를 넓혀나갔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배웠고 영어를 접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훗날 음악평론가로 활동한 이백천 씨가 영어 발음을 우리말로 달아줬죠. 이런 발음은 미군에게 어색하고 괴상하게 들렸지만 다행히 제 음색이 독특해서 팝과 잘 어울렸어요."
미8군에서 활약하던 그는 최희준의 소개로 작곡가 손석우 씨를 만나며 인생의 큰 반전을 겪는다. 손씨는 국내 드라마 주제가 1호로 자리매김된 '청실홍실'을 비롯해 송민도의 '나 하나의 사랑', 최무룡의 '꿈은 사라지고' 등을 만든 실력파 작곡가다.
"최희준 씨에게 소개를 받았는데 손석우 선생이 이미 제 공연을 보고 저를 눈여겨봤다더군요. 손 선생이 만든 음반사 뷔너스레코드사 첫번째 음반 '손석우 작곡집-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타이틀곡을 제가 부르며 정식 가수 데뷔를 했죠. 미8군에서 한동안 팝송을 불러 우리말로 노래하는게 어색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힐빌리(hillbilly. 초기 컨트리뮤직) 리듬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악평도 받았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씨는 "'뽕짝' 리듬에 슬픈 노랫말이 주를 이룬 당시 가요계에서 혁신적인 곡이었다"며 "외국 관광객이 한국에 온 기념으로 음반을 사갈 정도였다. 이 노래가 많이 불려 어떤 외국인은 애국가인 줄 알았다고 한다"면서 웃었다.
이 곡은 프랑스를 대표했던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가 1963년 서울시민회관 내한 공연 당시 한국어로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로가 이 노래를 부르자 관객들이 엄청 열광했죠. 이 노래에 반한 지로가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이 곡을 우리말로 취입도 했어요. 또 일본의 하마무라 미치코 등 여러 해외 가수가 부르며 동남아시아까지 퍼져나갔죠. 덕분에 홍콩, 싱가포르, 태국 등지서 순회공연을 했고 미국 25개주를 돌며 노래했어요."
한씨에게는 이 곡이 더욱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방랑의 가인' 속 주인공처럼 유명한 가수가 되어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그는 "1962년 이 노래가 크게 히트했을 때 부산 삼일극장에서 공연했다"며 "난 예명을 안 썼는데 '한명숙 무대 인사 차 내부(來釜)'라는 포스터를 본 아버지가 찾아왔다. 그러나 새 가정을 꾸린 아버지를 그때는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 소리를 못하고 자란 게 지금도 슬프다"고 했다.
이 노래의 붐은 영화제작으로 이어졌고 1962년 엄심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가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물론 주인공은 한씨였다.
"정말 연기를 너무 못해서 한 신문이 '한명숙은 연기력 없는 것이 더 매력'이라는 혹평도 했어요. 그 이후에는 연기를 안 했죠. 4중창단 블루벨즈가 제 목소리와 성격이 막걸리처럼 걸쭉하다고 '왕대포'란 별명을 붙여줬지만 사실 제가 숫기가 없어요. 사람들은 O형으로 알지만 A형이죠."
그는 '노란 샤쓰의 사나이' 외에도 손씨와 손잡고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센티멘탈 기타' 등의 히트곡을 잇따라 발표했다. 더불어 이봉조 작곡의 '비련십년', 이희목 작곡의 '으스름 달밤', 전오승 작곡의 '사랑의 송가' 등 300여 곡을 내놨다.
한씨를 키워낸 뷔너스레코드도 최희준, 블루벨즈, 현미, 김상희, 차도균 등 유능한 신인을 발탁해 '뷔너스 가(家)'를 이뤘다.
한씨는 20대 때 현미와 찍은 흑백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내 사진을 보면 꼭 옆에 현미가 있었다"며 "TV를 틀면 나, 현미, 이금희 등이 나왔다. 지금은 서로 만날 구실이 없으니 현미와도 얼굴 본 지 꽤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고인이 된 남편에 대한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군예대 시절 만난 신랑은 6살 연상의 군악대 트럼펫 연주자였어요. 1956년 결혼했고 아이를 둘 낳은 후 가수로 데뷔했죠. 외로웠던 제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어요. 남편이 세상을 뜬 날짜가 아직도 또렷해요. 1970년 3월 13일의 금요일이었죠. 제가 남자 복은 없어도 이렇게 후배들이 헌정음악회를 열어주니 후배 복은 있나봐요. 호호."
한씨는 가수가 된 것을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힘줘 말했다.
"관객에게 환호받고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리는 게 쉬운 일인가요. 무대에 오를 때면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손자들이 '할머니가 그렇게 유명한 가수였어?'라고 묻더군요. 가수가 된 덕에 2000년 국민문화훈장도 받았고요. 전 후배들에게 박수 하나 더 받는 가수가 되라고 해요."
한씨의 말처럼 그는 TV에서는 뜸했지만 활동을 중단하고 무대에서 내려온 적이 없었다. 성대 수술을 두차례 받은 1970년대 3년을 빼고는 1980년대 중반까지 활동은 꾸준했다고 한다. TV에서 원로 가수들이 설 무대가 없는 탓에 가수 생활을 중단한 듯 보였지만 최근에도 동료들과 공연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 무대마저 드물기에 시대를 풍미한 화려한 과거에 비해 유복한 생활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후배 가수들이 원로 가수들의 이 대목을 안타깝게 여긴다.
수원에서 손자 둘과 살고 있다는 그는 "나라의 지원책이 없다고 원망하거나 아쉬워하진 않는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단지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는 건 조금 외롭다"고 소녀처럼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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