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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권하고 싶은 책] ⑤이태준의 '무서록'

문신 시인 - 순서 없이 읽어 나가는 일상의 참맛

"먼저 자신을 알면 모든 일에 있어 현명한 일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야겠다. 이태준의 「무서록」(범우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철인(哲人)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말을 했거니와 불가에서도 자기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는 뜻이겠다. 그 다음 문장은 이렇다. "작품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이다." 이태준이 소설가였기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작품을 삶으로 바꿔 읽어도 괜찮을 듯싶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삶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이다."

 

「무서록」을 알게 된 건 한편의 시 때문이다. 5년 정도 다녔던 직장을 나와 뭔가 새로운 일을 궁리하고 있을 때 그 시를 읽었다. 그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해 저문 뒤 / 「무서록」을 거꾸로 읽는다"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한 성정 탓에 쉽게 감동받는 편은 아니지만, 이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탄식을 했다. '거꾸로 읽는' 독서법과 '해 저문 뒤'라는 시간이 절묘하게 얽히면서 「무서록」을 아주 궁금하게 했다.

 

「무서록」은 1941년 이태준이 37살에 간행한 수필집이다. 애초에는 박문서관에서 57편의 수필을 묶었으나 그 가운데 40편을 추리고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 2편을 엮어 모두 42편을 수록했다.

 

「무서록」이라 했으니 서언 즉 작가의 말이 없는 글이라는 뜻이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순서 없이 읽어도 썩 괜찮다. 「무서록」을 통해 '거꾸로 읽는' 독서법의 맛을 깨우친 시인의 밝은 눈에 그저 경탄할 뿐이다. 아직 눈 어두운 나로서는 「무서록」을 읽어가면서 거의 모든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놓는다. 그리고는 밝을 때는 말고 해 저문 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나간다. 한편 한편이 길지 않아 한 호흡이면 읽어낼 수 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지만 그 참맛은 그 참맛은 오래 두고 곰곰 새겨보는 묘미가 있다.

 

「무서록」의 참맛은 문장에서 나온다. 소설가 이태준은 문장론의 고전으로 불리는 「문장강화」를 쓴 장본인이다. 그러니 그의 문장은 수십 년 수제비를 빚어온 아낙이 뚝 떼어낸 반죽처럼 빈틈없고 분명하다.

 

"미닫이에 불벌레와 부딪는 소리가 째릉째릉 울린다." 와 같은 구절은 차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 그야말로 가득한 문장이다. 미문이어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지 않고 정확해서 미더운 것이다.

 

그처럼 미더운 문장이 잇대어 한 편의 글을 이루었으니 「무서록」을 읽다보면 삶이 보이고, 삶의 뿌리가 보이고, 삶의 뿌리가 피워내는 꽃이 보인다. 이를테면 내가 나를 알아가는 도중에 있음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해 저문 뒤 더러는 「무서록」을 순서 없이 읽어나간다. 그래도 아직은 나를 알 수 없고 내 삶이 다 보이지는 않는다. 「무서록」의 한 구절에 기대자면, '십분심사일분어(十分心思一分語)'다. 마음에 품은 뜻은 많으나 말로는 그 십분의 일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무서(無序), 즉 순서 없음의 말뜻이나마 어두운 눈으로 더듬거리는 재미가 있어 오늘도 「무서록」의 한 페이지를 펼쳐 든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 문신 시인은 전남 여수 출생으로 200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물가죽 북」(2008)을 펴냈다. 시인은 현재 전주문화재단 문화사업팀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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