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금요수필] 녹나무 어린잎을 쓰다듬으며

김영

오늘은 쇠소깍에서 시작해서 외돌개까지 걸을 거예요. 아침 4시 30분에 집을 나섰어요. 사위는 아직도 어둑어둑하고 제주 고깃배 테우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걷다보니, 아침햇살에 유난히 보드라운 잎이 있네요. 녹나무 어린잎인데 꼭 송아지 귀처럼 생겼어요. 새로 갈아 놓은 황토밭이 봄비에 젖은 색과 거의 흡사한 어린잎은 다 자라면 진한 녹색이 되지요. 보드라운 새잎도 바람과 비를 겪다보면 보드라움을 잃어버리나 봐요. 녹나무 줄기에 세월이 파 놓은 고랑도 아주 많네요. 어린잎이 진녹색으로 바뀌면 줄기도 껍질을 통통 터트린 거지요. 그래야 어른 나무로 자랄 수 있으니까요. 홍가시나무도 녹나무와 비슷해요. 어린잎은 투명에 가까운 붉은 색인데 다 자란 잎은 투명함을 잃어버려요. 꽃보다 화려하고 맑기까지 한 홍가시나무 어린잎도 세상의 햇볕과 어둠을 알게 되면 그냥 보통의 잎처럼 되지요.

 

껍질, 이 말을 입안에 넣고 오래 굴리면 마르고 질긴 꺼풀만 남네요. 여간해서는 찢어지거나 씹히지도 않겠어요. 오십 년을 넘게 살면서 마르고 질긴 꺼풀이 어디 한두 켜였겠어요. 살아있는 것들은 다 껍질이 있지요. 이 껍질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하지요.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껍질도 너무 단단하면 탄생이나 성장을 방해하기도 하지요. 번데기의 껍질을 터트리지 못하면 나비는 하늘을 날 수 없겠지요. 알 껍질을 깨지 못하면 병아리도 생명이 될 수 없어요. 지금 줄기차게 울어대는 매미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저렇게 깊은 울음을 가질 수 있었겠지요.

 

사람도 생명이 있는 존재니 껍질을 벗어야 되겠지요. 살면서 내가 분별하여 가졌던 크고 작은 기준들을 다시 돌아볼래요. 내 얕은 지식으로 만들어 낸 많은 가름들을 다시 뒤적여 볼래요. 그리하여 지식도 분별도 다 버리고 얼간이 배어 사는 것도 괜찮겠어요. 밤엔 별이 뜬다고 웃고, 낮엔 달이 졌다고 웃으며 서슬 퍼렇던 시간들을 여의는 것도 괜찮겠어요.

 

가끔 성경을 읽어요. 예수의 첫 이적 부분을 읽을 때마다 마리아를 자꾸 좋아하게 돼요. 예수가 이적을 행하기 전이어서 사람들은 예수를 전혀 몰랐지요. 그 때 마리아는 예수가 이적을 베풀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준 사람이지요. 일꾼들이 예수의 말대로 술독에 물을 길어다 채울 수 있도록 한 사람은 마리아거든요. 앞에 서지 않고 뒤따라가는 삶도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해요.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을 섬기며 따르는 삶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나'라는 껍질을 통통 터트려야겠지요. '나'라는 아집을 훌훌 벗어던져야겠지요.

 

갓 태어난 송아지의 순한 귀 같은 녹나무 어린잎을 마음으로 쓰다듬으며 제주의 올레길을 걷고 있어요. 홍가시나무의 투명하게 붉은 잎을 생각하며 말없이 걷고 있어요. 꽃보다 아름다운 어린잎들이 보드라움과 투명함을 잃지 않고도 열매를 거둘 수 있다면 세상의 한 귀퉁이가 훨씬 밝을 거라는 생각을 오래 했어요.

 

벌써 걷기 시작한 지 다섯 시간이 흘렀어요. 아직 종착지인 외돌개는 보이지 않네요.

 

*시인 김영 씨는 1995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 「다시 길눈 뜨다」, 수필집 「뜬 돌로 사는 일」,「쥐코밥상」이 있다.

 

전북일보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전북현대[CHAMP10N DAY] ③은퇴 앞둔 ‘원클럽맨’ 최철순의 눈물

오피니언[병무 상담] 예비군 편성과 자원관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문학·출판전북작가회의, ‘불꽃문학상’ 황보윤·‘작가의 눈 작품상’ 박복영

자치·의회말 많고 탈 많던 전북도 서울장학숙 관장 재공모 끝에 강길동 씨 내정

전주전국 서점 폐업 추세…전주 지역서점은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