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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20)전북 시조의 부흥가, 박병순

시조문학 발전 앞장 선 '한글 전용'의 선구자

박병순(구름재 朴炳淳·1917~2008)은 진안 부귀 출신의 시조시인이다. 그가 문학을 접하게 된 동기는 시인 김해강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김해강이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진안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면서 그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구름재는 대구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스승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사제간의 표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거니와 요새 사람들이 본받아 우러러야 마땅하다.

 

1954년 박병순은 전북대학교에 국문과가 생기자 1회 입학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공부하였다. 뒷날 전쟁통에 가람 이병기가 전주의 양사재에 머문 동안 그는 본격적으로 시조를 공부하게 된다. 그 뒤로 그는 평생 동안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며, 극진히 예우하였다. 가람이 중풍으로 여산에 은거할 당시에 그는 주말마다 거르지 않고 문안인사를 드렸다. 두 분의 스승을 잘 둔 덕분에 그는 민족의 고유한 시형식인 시조를 쓰며, 여러 편의 수작을 남길 수 있었다. 그가 두 스승을 기리며 바친 작품을 읽노라면, 스승을 향한 제자의 순정한 단심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김영기로부터 시조를 통한 민족정신을 전승받았다. 3학년 때부터 문학청년으로 자처한 그는 4학년 때 독립을 모의하는 좌담회를 열고, 1937년 자작시조 '무궁화'를 써서 하숙방에 붙여 두고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강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졸업 후에 경북 상주의 학교에 근무하던 중에 항일 혐의로 경찰에 구금된 것도 반골 기질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그로 하여금 서력기원을 마다하고 일부러 단기를 사용하도록 견인한 원동력이다. 그가 시조시인이란 사실에 남다른 자긍심을 갖고, 가난 속에서도 올곧은 선비의 길을 고수하던 모습은 죄다 민족주의자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스승의 영향으로 일생을 교단에서 후학을 기르는 일에 진력하였다. 전주에서 사는 기간에 그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영생대학교에 출강하여 시조창작론을 가르쳤다. 1979년 2월 상경한 뒤에 그는 한양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시조와 고전문학을 강의하였다. 그 인연으로 박병순은 모범장서가로 뽑힐 만큼 일생 동안 모아둔 6,700여 권의 고서를 한양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구름재문고를 설치하였다. 이 일은 가람문고가 서울대학교에 설치된 것과 함께 지역 출신 작가에 대한 도내 대학의 무관심을 증명한다. 두 분의 귀중한 국문학 자료들이 서울로 유실되지 않고 이 고장에 소장되었더라면, 문학연구는 물론 대작가를 접하는 기회가 더 많아졌을 터이다. 그로 인해 두 시조시인이 정작 고향에서 홀대되는 듯해 두고두고 안타깝다.

 

박병순은 1938년 '동광신문'에 시조 '생명이 끊기기 전에'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그는 이병기의 가르침대로 시조를 현대화하는 일에 고심하였다. 작품의 배경에는 한국적 서정을 장치하면서도, 종래의 전통적 기법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하느라 공을 쏟았다. 그의 시조가 지닌 특장은 작품과 생활이 일체화되어 녹아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일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진솔한 심성에 비친 진실한 정감을 정직하게 형상화하느라고 노력한 시인이다.

 

또 박병순은 시조문학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만사를 뒤로 물렸다. 1952년 최초의 시조 전문지 '신조'를 5집까지 발행하였고, 한국시조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며 시조작가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시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열성적으로 임하였다. 1985년 그는 한춘섭 등과 '한국시조큰사전'을 상재하여 시조를 종교로 숭앙하던 신념의 일단을 선보였다. 이 사전으로 기존의 한국 시조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고려말에 시작된 이후의 역사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전라북도문화상을 비롯하여 노산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조 외에 그는 해방 후의 혼란기에 전주의 카톨릭회관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다. 그 후에도 그는 한글전용운동을 위시한 한글운동에 헌신하여 1972년 한글학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그에 비하여 그가 교직에 종사하면서 받았던 교육상은 세 번이나 장을 수술하며 시종시간을 정확히 지킨 평교사의 공을 치사하는 상치고 격이 나무 낮았다. 이제라도 그에게 어울리는 상이라면, 고향 진안에 번듯한 문학관을 지어 시조를 중흥하기 위해 헌신하던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이다.

 

다행히 박병순은 1993년 희수를 맞아 '구름재시조전집(가꿈)'을 간행한 바 있다. 그의 영식과 사위가 앞장서서 대가의 작품들을 한곳에 모은 점은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하다. 이 작품집에는 1954년 낸 첫 시조집 '낙수첩(항도출판사)'을 비롯하여 발행 당시까지의 전작품 762편 2,906수가 묶여 있다. 게다가 인생도 갈무리되어 있어서 그의 체취를 느끼고 살피기에 알맞다. 또 가곡화된 여러 편의 악보와 전주상고 등의 교가가 수록되어 있어 음악사와 교육사 측면에서도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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