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신념 간직한 '고고한 귀공자'
이한직(1921~1976)은 전주 태생의 시인으로, 호는 목남(木南)이다. 그는 1939년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도일하여 게이오대학(慶應大學) 법학과에 진학하였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1943년에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청년문학가협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민족주의자로서의 신념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 박인환이 경영하던 서점 마리서사에 출입하면서 김기림, 오장환, 김광균, 김수영 등과 친교하였다. 이 무렵에 종합지 '전망'을 주재하였다. 시작품으로 세상과 만나기조차 꺼리던 그답지 않게 거침없이 활동폭을 확장한 셈이다.
1951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한직은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과 함께 공군의 창공구락부 소속 종군 문인으로 활약하였다.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그는 인촌 김성수의 둘째 영애와 혼례를 올렸다. 서울이 수복된 뒤에는 조지훈 등과 힘을 합쳐 '문학예술'지의 시 부문 추천위원(1956~1958)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그는 1956년 '친일문학론'으로 유명한 임종국, 1956-57년에는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신경림, 1957년에는 '비는 수직으로 죽는다'의 허만하 등을 추천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를 뽑아준 정지용 못지않은 안목으로 장차 한국시단의 중흥을 떠맡을 괄목할만한 신인들을 고른 셈이다.
이한직은 1957년 2월 한국시인협회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기획 간사를 맡기도 했다. 그 뒤 1960년 4?19민주혁명이 일어난 뒤에 문공부의 문정관으로 취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다음해 5.16이 일어나자 직을 그만 둔 그는 1976년 7월 동경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그의 행장은 자세히 복원되지 않았고, 시단의 평가를 불러 모으기에 역부족이었다.
1939년 5월 이한직이 18세의 나이로 '문장'에 시를 응모하자, 시인 정지용은 "패기도 있고 꿈도 슬픔도 넘치는 청춘이라야 쓸 수 있는 시"라고 고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당선작은 18세의 소년이 쓴 시라고 보기에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압축미와 감각적인 언어가 구사되었다. 요즘에는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낙타는 어릴 때 선생님처럼 늙었다"는 시 '낙타'가 더 유명해졌지만, 그의 당선작 '풍장'은 당시의 시단을 평정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자연을 예찬하며 식민지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던 시인들은 이한직의 시를 읽으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박목월이 조시 '이한직'에서 '정신의 귀공자'이자 '열여덟에 떠오른 시단의 찬란한 별'이라고 칭송한 예에서 보듯이, 이한직의 출현은 한국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그 후로 그는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으나 과작에 불과했다. 그는 등단 초기부터 카프 계열의 현실지향성과 모더니즘 계열의 시경향을 한꺼번에 제척하고, 나름의 시관에 따른 순수시를 추구하였다. 그러던 중에 혁명과 군사정변, 전쟁 등의 굵직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벌어지자 그는 서재에서 뛰어나와 발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동족상잔이 벌어지자 "이제는 고집하여야 할 아무 주장도 없다"('동양의 산')고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고, 학생의거가 벌어지자 "莞爾히 숨을 거둔 젊은이들"('깨끗한 손을 가진 분이 계시거든')을 호명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세사와 단절한 채 완고하게 살아간 시인이 아닌 줄 알 수 있다. 이 시편들에서 그는 모더니스트다운 태도로 폭력적 사태를 시로 비판하면서도, 시적 비유를 동원하여 절제된 지성을 보여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한직을 일러 '고고한 귀공자'라고 불렀다. 그는 인상도 고결하였고, 시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 아마 정지용도 그를 추천하면서 조숙했던 프랑스의 천재시인 랭보를 떠올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는 세간에서 부르는 바대로 남들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였다. 한때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으나, 그는 소수의 지인들 외에는 어울리기를 거부하는 대인결벽증을 보였다. 또한 이미지의 충돌로 초래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하기에 노력한 그의 시작법은 후배시인들에 의해 계승되기에는 난망한 과제였다.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가 시사적으로 자리를 잡기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기능했다.
이한직은 생전에 시집을 발행하지 않은 시인이다. 오로지 편저 '한국시집'이 있을 뿐으로, 시작 정리에 무관심했던 그의 사후에 유족들이 '이한직시집'(1976)을 발간하였다. 그 덕분에 한국시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확보했으면서도 온 작품을 읽을 수 없었던 그의 문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편은 총23편으로, 독자들이 갈급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지금은 그마저 출판된 지 오래여서 일반인들이 대할 기회가 마땅치 않다. 앞으로 전북 문단에서 수행할 과제는 그의 시작품 전량을 한데 모아서 시업을 기리고 칭송하는 일이다. 지역의 풍부한 문학적 자산조차 수습하고 자랑하지 못한 데서야 어찌 전북인이라고 자긍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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