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회 순국선열의 날 맞아 완주서 '일문구의사' 추모제…의병조직 일본군과 전투 문중집단 독립운동 드물어
제73회 순국선열의 날인 지난 17일 일제치하 의병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국내 항일 애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전북보훈지청과 광복회 전북지부의 후원과 일문구의사 선양사업회의 주관으로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장승공원에서 열린 이날 추모행사는 일문구의사의 항일운동 활동보고를 시작으로 헌화와 헌시 낭독 등의 순으로 엄숙하게 거행됐다.
일문구의사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방곡마을의 고흥 류씨 집성촌에서 배출된 9명의 독립유공자를 일컫는다. 임진왜란 이후 양성 현감을 지낸 류지호가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고흥 류씨의 집성촌이 형성됐다.
아홉분의 의사는 이곳에서 출생한 류중화(자 치복)를 중심으로 류연청·영석·연풍·태석·연봉·명석·준석·현석 등이다. 류중화 의사는 도내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들과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칠 것을 결심, 의병 동지인 유지명·송태식과 전략을 세워 여덟분의 의사와 누나의 아들 이유종·태종을 선두로 1907년 가을부터 의병조직, 군자금 마련 등 무장 항쟁을 시도했다. 이후 인산의 이규홍 의병단과 연합전선을 펼치면서 아홉의사를 중심으로 완주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병기 제작소를 갖추고 창검과 탄환, 화승총 등을 만들었다.
아홉의사는 1907년 11월 고산군 운상면 가정자(현 화산면 화월리) 교전에서 왜병 29명을 사살했다. 또 1908년 4월 연산전투와 9월 고산전투에서 역시 왜병을 사살하기도 했다.
1910년 봄까지 금산, 용담, 진안, 익산, 연산, 고산 등지에서 전투를 여러 차례 벌이는 등 아홉의사의 항일운동은 경술국치까지 이어졌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는 지하운동을 계속했다.
세(勢) 부족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류중화 의사는 군산 임피 노루목으로 피신을 하게 되지만 밀고로 금마 일본군 헌병대에 붙잡혀 총살당하게 된다. 남은 8명의 의사는 1917년 밀고에 의해 같은 시기에 체포, 강도·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처럼 친·인척으로 혈연관계에 있는 문중이 집단으로 의병활동에 가담한 사례는 국내 항일 애국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그러나 아홉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는 매우 험난했다. 증빙서류 미비로 제반 서류가 반려됐으며, 뒤늦게 찾은 판결문에는 살인범 등으로 기록돼 있었던 것. 이후 류영석 의사의 증손인 유희태 위원장의 노력으로 1983년 정부에서 구의사의 공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으며, 1990년 류중화 의사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8명의 의사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각각 훈격을 높였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정세균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유광찬 전주교대 총장, 김명한 전주보훈지청장, 조금숙 광복회 전북지부 회장, 고흥 류씨 종친회, 일문구의사 유가족 등 추모객 30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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