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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채우는 것 아니라 비우는 것"

구순 맞아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 출간한 서정태 선생 / 「시와」·인터파크 주최 '고창 문학기행'

▲ 13일 고창 미당문학관에서 서정태 선생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올해로 구순을 맞은 서정태 선생은 형의 미당문학관 곁에서 작은 흙집을 짓고 산다. 1946년 민주일보에서 시작해 전북일보에서 30년간 기자생활을 했던 선생은 2009년 고창에 내려왔다. 서정주(1915∼2000) 선생 때문에 자신의 시와 삶은 거의 조명받지 못하다시피 해 애증의 대상이 됐을 형을 그리워하며 사는, 시보다 매혹적인 불운(?)의 주인공. 형을 향한 사랑과 증오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 했다.

 

출판사 '시와」'의 발행인 최명애씨가 10여 년에 걸쳐 군불을 땐 끝에 펴낸 시집'그냥 덮어둘 일이지'는 지난 2월 펴낸 뒤 온라인 서점에서 10위 안에 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출판사와 인터파크는 서정태 선생의 구순을 기념해 '고창으로 떠나는 문학기행'(40명)을 기획했다가 400명이 넘는 응모자들 덕분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고, 13일 넉넉한 듯 촘촘한 여정이 이어졌다.

 

지난 13일 오후 2시 미당문학관. 시인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더니, 이날 문학관에는 격한 바람이 휘날렸다. 털 고무신에 정갈한 한복을 입고 지팡이에 의지해 등장한 서정태 선생은 "좋은 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4년만에 고창에 나들이 나온 서정춘 선생(72)·문학평론가 이경철씨(58)는 "올 때마다 (미당 선생이) 반기는 것을 실감한다"고 이야기했다.

 

미당문학관 안에서 진행된 선생과 독자와의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됐다.

 

"10여 년 전에 사장이 미당시선집을 내자고 나를 만났어요. 그런데 나한테 시집을 자꾸 내라는 거야. 내가 유명하지도 않고, 손해만 나면 어떡해. 속으로는 미안하더라고. 그러다가 별 수 없이 지난해 아흔살 된 기념으로 줬지. 본래 아홉구(九)가 좋다잖아. 그래서 90편을 대충 추려서 줬어."

 

그러나 시집의 예상 밖 인기에 대해 선생은 초월한 듯 "귀찮다"고 했다. 다들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던 시집 제목에 대해서도 심드렁해 했으나, 선생이 사는 우하정(友下亭)으로 옮기자 이야기는 술술 이어졌다.

 

"여우가 죽을 때는 머리를 고향 쪽으로 돌리고 죽는다고 하지 않아? 고향에 대한 애착은 다 마찬가지야. 나도 아침에 문만 열면 아버지·어머니 묘가 있고, 그 위로 할머니·할아버지 묘가 있어. 즐거운 식모살이(?)를 하는 거지."

 

시에 관한 철학도 삶의 태도와 겹쳐졌다. "시는 나를 위해 쓰는 거라고. 나는 유명한 것 싫어. 시는 내가 즐길 줄 알면 되는 거지. 그래서 나는 내킬 때만 써."

 

선생은 말미에 "언제든 사는 게 팍팍하다고 느낄 땐 3시간 이상은 너끈히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서 친절하게 교통편까지 일러줬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흥덕에서 내리는 고속버스는 13800원, 선운리행 버스는 1820원, 문학관 앞에서 그의 생가까지 70m"라고 세세하게 설명한 선생은 "30살 넘는 손녀딸도 남자친구와 투닥거리고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상담한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니 애인 문제까지 조언해줄 수 있다"며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경묘한 그 미소는 이날 참석한 이들에게 오랫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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