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화개동 일대가 선비들의 유람 명승으로 인식된 데에는 신라 최치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유학해 문명을 떨친 후 새로운 희망을 품고 귀국했으나, 그를 맞이한 건 변함없는 신분제의 한계와 이미 말기적 폐단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결국 방랑의 세월로 일관했고, 때문에 전국의 절경인 곳이라면 그의 발자취 하나쯤 남아 전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 그가 선경(仙境)인 양 아름다운 이 화개동의 경관을 그냥 지나쳤을 리 있으랴. 더구나 쌍계사·불일암 등의 고찰은 그의 발길을 멈추기에 충분했으리라.
고운은 천 년 전 사람/ 수련하여 학을 타고 갔다지/ 쌍계에는 옛 자취만 남아 있고/ 흰 구름 골짜기에 자욱하여라/ 미미한 후생 고풍을 우러르니/ 끌리는 마음 자주 일어나네/ 공의 유수시를 읊조려 보니/ 빼어난 기상은 조조(曹操)보다 낫네/ 어찌하면 번잡함을 떨쳐 버리고/ 공과 푸르른 하늘에서 놀아 볼까.
조선시대 유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화개동천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이다. 7구의 '유수시(流水詩)'는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치게 했네'라고 읊은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시를 가리킨다. 기대승은 지리산 천왕봉과 청학동을 두루 유람했는데, 그 역시 현실에서의 번잡하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하동 화개동에서 신선이 되어 날아간 최치원을 찾고, 그를 통해 선경의 세계로 가고픈 동경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화개동에서 최치원의 발자취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쌍계사 입구에 버티고 있는 '쌍계(雙磎)·석문(石門)' 석각을 비롯해, 지금도 대웅전 뜰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功塔碑)가 그의 필체이고, 지금은 없어졌으나 조선후기까지도 쌍계사 고운영당(孤雲影堂)에는 최치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
또 불일암은 어떤가. 청파(靑坡) 이륙(李陸 1438-1498)의 유람록에 의하면, 불일폭포 아래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두 못이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 하고, 다른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불렀다. 속설에 "최치원이 이곳에서 책을 읽으면 신령스런 용이 그때마다 나와 그 소리를 들었고, 학도 그 소리에 맞춰 공중을 날며 춤을 추었다."고 하였으니, 불일암 일대는 온통 최치원의 일화 일색이다.
이처럼 계곡의 바위 하나 귀퉁이 하나도 최치원의 일화와 전설이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이 화개동과 삼신동이다. 사계절 어느 때든 이곳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모두가 최치원이 되어 청학을 타고 날아갈 것만 같은 아름다운 착각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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