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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얼 태권도, 세계속의 태권도원] 2부 세계속의 태권도-③ 해외 개척 및 정착

68년 전계배씨 미국정부 초청받아 지도 시작 / 격파시범하다 쫓겨나는 등 초기엔 큰 어려움

▲ 형 박연희 사범의 초청으로 80년 미국에 건너와 뉴욕에 정착한 정읍시 감곡면 출신의 박연환 사범(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승단심사 후 기념촬영하고 있는 모습.

태권도가 언제부터 국제적으로 진출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1957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장병들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매료돼 시범단을 초청했고, 그 뒤 64년에 우리 정부가 의무부대와 태권도 교관단을 베트남에 파견한 것이 태권도 해외진출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유학이나 이민 등 개인적인 사유로 일찍부터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 태권도 수련생들이 공원 등에서 태권도를 연마하고, 이러한 모습이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미국땅에도 태권도가 알려지게 됐다.

 

1960년대 초반부터는 주한미군 장병들이 한국 사범들을 초청해 미군부대에서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우리지역 군산에서도 지도관 김혁래 사범의 지도로 수 천 명의 미공군들이 수 년 동안 태권도를 배울 수 있었다.

 

태권도 사범들의 미국 진출이 활발하게 된 것은 1965년 하트-셀러법(Hart-Celler Act)이 발효돼 이민 문호가 넓혀지면서부터다. 이때에도 일반인들에게는 미국으로 가는 길이 제한적이었지만, 태권도 사범들은 현지에 정착한 선배 사범들의 초청이나 태권도 유관기관의 추천을 받아 미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또 정부 주도의 해외사범 파견 사업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동남아나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전역으로 태권도 사범들이 진출하게 됐다.

 

전북출신 태권도인들이 미국 등 세계로 진출한 것은 대부분 6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전계배 사범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1968년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를 지도하기 시작했고, 박연희 사범은 일본을 거쳐 73년에 미국에 정착했다.

 

태권도를 보급하기 위한 미국내 전반적인 분위기는 괜찮았다. 대도시내 높은 범죄율로 인해 호신술의 필요성을 느끼는 시민들이 많았고, 이소룡이 출연하는 액션영화가 미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동양무술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 호신술의 필요성과 동양무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미국내에서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태권도. 그러나 초기 정착과정에서는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돈이 없어 가난한데다 언어소통마저 제대로 안되니 관원모집이 쉽지 않았다. 수련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길거리나 대형마트 앞에서 격파 등의 시범을 보이며 눈길을 끌어야 했다. 술집 등을 찾아다니며 깡패들과 일부러 시비붙어 싸우는 사범들도 있었다. 게다기 일찍부터 미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가라데의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조그마한 덩치의 동양인들을 우습게보고 시비를 걸거나 도전해오는 동네 왈짜들도 적지 않았다. 78년에 아프리카 레소토 공화국에 파견됐다가 형 박연희 사범의 초청으로 80년 미국에 건너와 뉴욕에 정착한 정읍시 감곡면 출신의 박연환 사범(62)의 사례다.

 

“헬스를 많이 해서 근육질인 덩치 큰 학부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주먹대결을 신청해왔다. 3번 만에 주먹으로 자신을 때려눕히면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두 대까지 때려보니 어찌나 근육이 발달했던지 주먹이 튕겨 나올 정도였다. 학생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난감했다. 여기서 지면 창피를 당하고 곧바로 도장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상대가 힘을 주고 있으면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눈속임 동작으로 상대가 힘을 빼는 순간을 노려 한 방을 날렸다. 그대로 쓰러졌고 그는 곧바로 항복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나의 노예(servant)라고 자청하며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와줬다”

 

76년 선배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온 고창군 해리면 출신의 이현곤 사범(66)은 79년 버지니아주 헌돈시에 정착할 당시의 어려움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거처도 정하지 못하고 친구 부부의 단칸방 아파트에 한달 남짓 얹혀 살았는데 관원이 겨우 15명 정도였다. 모은 돈이 없어 분할상환을 조건으로 도장을 인수했는데, 종일 도장에 나가 있어도 수련에 대한 문의는 한 건도 없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고민 끝에 학생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매일 한 사람이 광고전단지 10~20장씩을 복사해오고, 송판이나 블럭을 가져오도록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광고전단을 돌리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서 격파시범을 했다. 장소사용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쫓겨나기도 했다.”

 

김제 만경 출신으로 75년 결혼하자마자 부인과 함께 미국에 건너와 박연희 사범 집에서 3개월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는 이상철 사범은 영어도 못하고 돈도 없어서 정신병원에서 청소부로 시작했다. 한달 급여가 400달러였는데, 그 자리마저 100달러의 커미션을 주고 들어갔다. 돈을 벌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 초과근무를 자청해서 주7일 청소하면서 600달러씩을 모았고, 빈 시간에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도장에서 파트타임으로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2000달러를 주고 뉴욕에서 자동차로 4시간 정도 걸리는 빙햄턴이라는 곳의 도장을 인수했는데, 60~70명이라던 관원은 열 댓 명도 안됐다.

 

알고 보니 그 동네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라데 도장이 있었는데, 일본인 관장이 매일 아침 TV에 출연해서 호신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요소 요소에 인맥도 두터워 거물로 대접 받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생각도 해봤지만, 대한민국 태권도 국가대표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욱이 전문가의 눈으로 보니 일본인이 가르치는 호신술이라는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가라데를 이겨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옆으로 도장을 옮겼다. 운동화끈을 조여매고(무단 가택침입으로 총 맞을 수도 있었다) 아침 일찍 가라데 도장을 찾아가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몇 차례 만남이 이어진 뒤에는 기자들을 한 자리에 초청해서 자선사업을 명분으로 맞장을 뜰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일본인은 눈치를 챘는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작전을 바꿔서 그 일본인이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호신술을 TV에서 선보이면, 빨강띠 대학생을 시켜서 대학 체육관에서 똑같이 시연하는 작전으로 갔다. 가라데 호신술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고, 결국은 가라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상철 사범은 "도장내 창고 비슷한 작은 방에서 한국식으로 밥을 해먹고 1년 정도를 살았다. 된장 끓이는 냄새가 미국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손짓 발짓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60년대부터 우리나라 태권도가 미국에 진출했다고 하지만 ‘태권도’라는 이름을 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대부분은 ’가라데’ 또는 ’코리안 가라데’라는 이름으로 관원을 모집했다. 미국인들의 눈에는 태권도와 가라데, 쿵후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데다 가라데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권도라는 이름을 떳떳하게 내걸고 운동을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쯤부터며, 전북출신 사범들이 비교적 앞장섰다.

이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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