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사비도성 안쪽 부소산 기슭에 있는 왕궁의 뒤쪽에는 사비수가 흐른다. 사비 천도를 단행한 성왕(聖王)은 천도와 동시에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로 바꿨는데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부여는 백제 왕실의 본향으로 왕실의 성(性)인 부여(夫餘)씨도 이것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성왕이 관산성에서 신라군에게 패사한 후에 국호는 다시 백제로 환원되었으며 이후 현대의 의자왕대(代)에야 왕권이 제자리를 찾았으니 100년 가까운 세월이 허송되었다. 사비도성 거리는 모두 바둑판처럼 직선으로 뻗어나가 어디서든 끝이 보인다. 도로에는 돌을 깔아 마차가 지나거나 기마군이 달릴 때면 요란한 소리가 났다. 도로의 폭이 100자(30m)가 되었지만 항상 인파로 붐빈다. 거리의 행인은 한인(漢人)과 왜인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 남방인과 서역인도 보였는데 대륙의 백제령 담로에서 온 사람들에다 장사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도성안 중부(中部) 전항 지역은 주로 관리들만 거주한다. 도성은 동, 서, 남, 북, 중의 5부(部)와 5항으로 나뉘어 있어서 각 구역별로 거주민이 다르다. 사비도성의 인구는 10만호에 65만이다. 동방(東方)의 대도(大都)인 것이다.
“이곳이오.”
중부 전항 지역의 대로변에 멈춰선 외관(外官) 점구부(點口部)의 고덕(固德)이 손으로 옆쪽 저택의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손이 가리킨 저택은 담장이 높은 대저택이다. 계백이 숨만 삼켰지만 뒤를 따르던 덕조가 대문으로 달려가더니 문을 열어 젖혔다.
“아이구.”
덕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머리를 돌린 계백이 열린 문으로 저택의 안을 보았다. 넓다. 마당이 칠봉성의 청 앞 마당만 했고 앞쪽 청은 그보다 더 크다. 마당은 깨끗하게 비질이 되어서 햇볕에 반사되고 있다. 고덕이 말했다.
“이 저택은 본래 달솔 목신의 집이었지만 남방 흑치군의 군장으로 가시는 바람에 작년부터 빈집이 되었소.”
“과분하네.”
계백이 말하자 고덕이 쓴웃음을 지었다. 40대 초반쯤의 고덕은 점구부의 관리로 호구 파악과 무역 업무를 맡는다. 점구부가 주택을 관리하는 것이다.
“한솔, 대왕의 명이오. 나한테 그러실 것 없습니다.”
“들어가십시다.”
신이 난 덕조가 계백의 말고삐를 잡아 끌면서 소리쳤다.
“대야성 탈취의 일등공을 세우신 상을 받으신 것이오.”
덕조에게 끌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계백이 다시 숨을 삼켰다. 이곳은 바깥채 마당과 청이다. 그리고 옆쪽에는 행랑채가 있고 그 뒤쪽에는 다시 중문(中門)이 있는 것 같다. 중문 안에는 사랑채인가? 그 안은 또 안채인가? 그때 계백 옆으로 고화가 다가와 섰다. 고화도 말에 타고 따라온 것이다. 계백의 시선을 받은 고화가 눈웃음을 쳤다. 입술은 꾹 닫았지만 눈이 초승달처럼 잔뜩 굽혀졌다. 그래서 꾹 닫힌 입술이 막 터질 것 같다. 행복한 얼굴이다. 그것을 본 계백이 고덕에게 말했다.
“고맙네. 고덕, 과분하지만 대왕께서 내리신 저택을 감사히 받겠네.”
“그러셔야지요.”
고덕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도성 안에서도 한솔의 용명(勇名)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이오.”
계백은 칠봉성에서 식솔들을 이끌고 이곳 사비도성으로 온 것이다. 칠봉성은 계백의 첫 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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