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대왕, 태왕비께서 부르십니다.”
태왕비의 시녀다.
“그러냐? 곧 뵌다고 말씀드려라.”
소리쳐 대답한 의자가 옆에서 얼굴을 굳히고 선 백씨에게 말했다.
“위사장을 부르라.”
백씨가 서둘러 물러나더니 잠시 후에 위사장 협보가 소리 없이 다가와 옆에 섰다. 협보는 덕솔 관등으로 의자가 태자 시절부터 호위를 맡았던 복심이다. 항상 그림자처럼 의자를 따르면서 겉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서 얼굴을 보지 못한 고관들도 많다. 의자가 허리끈을 매면서 협보에게 물었다.
“태왕비께서 나를 부르시는 이유를 알겠느냐?”
“덕솔 계백이 서부 수군항 지휘관들을 몰사시킨 죄를 주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임금이 된 지 올해로 몇 년째인가?”
“3년이 되셨습니다.”
“내 나이가 몇인가?”
“43세가 되셨지요.”
“내가 태자 생활을 몇 년 했지?”
“27년을 하셨습니다.”
“긴 세월이었어.”
“예, 대왕.”
“네가 태자 시절부터 내 위사장이었으니 몇 년째냐?”
“예, 18년째올시다.”
“네 나이가 몇이든가?”
“45살입니다.”
“그렇지, 나보다 두 살 위였지.”
머리를 끄덕인 의자가 몸을 돌려 협보를 보았다. 눈동자가 깊은 물 속 같다.
“내가 너무 어마마마께 주눅이 들어 있었지 않느냐?”
“예, 대왕.”
대답은 했지만 협보는 외면했다. 그러나 의자가 말을 잇는다.
“태자 위치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지. 어마마마의 한마디면 태자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으니까.”
“……”
“내가 임금이 되고 나서도 그 버릇이 남아 있는 것 같구나. 어마마마가 부르시면 대답부터 하고나서 가슴이 무거워지는 걸 보니까 말이다.”
“……”
“왕비도 어마마마 등에 업혀서 날 가볍게 보았고.”
“대왕.”
“말 안 해도 안다.”
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의자가 협보를 보았다.
“위사대를 시켜 병관부 달솔 진재덕, 전내부 덕솔 연기신, 그리고 왕비, 태왕비와 내통한 혐의가 있는 고관을 모두 잡아들여라. 모두 17명이었지?”
“예, 대왕.”
협보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눈빛이 강해졌다.
“대왕, 반항하면 베리까?”
“베어라.”
숨을 고른 의자가 말을 이었다.
“너는 내 경호로 남고 부장들을 보내도록 하라. 모두 믿을만한 자들이겠지?”
“모두 대왕께 목숨을 바칠 무장들입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럼 그동안에 나는 태왕비가 부르셨으니 가 뵈어야지.”
의자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방을 나왔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선 후궁 백씨의 어깨를 어루만진 의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내가 오늘, 달라 보이지 않느냐?”
의자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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