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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이잉1길 - 이영종

‘이잉1길’은 먼 나라에 있는 길이다. 떠들썩하게 “글지 이잉”이라 말하며 매운탕 시래기를 밥에 척척 걸쳐먹던 아재와 아짐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잉잉’ 하고 울던 뒷집 아이도 오래전 서울로 가더니 소식 한 점 없어서고, 손바닥만 한 ‘잉어’를 알려줄 투박하고 커다란 손바닥들이 늙은 탓이다. 실제 먼 나라에서는 ‘잉원’이 총통이 되었다는 소식이 가물가물 들려오기도 한다.

소리를 만드는 작은 돌을 들추면 가재가 뒷걸음치듯 ‘이잉1길’은 숨어 있다. 누구나 아는 길이기에 아무도 모르는 이 길은 정읍 내장사 매표소 옆 단풍나무 그늘에서 시작해서 정혜루 마룻바닥에서 끝난다. 단풍나무 씨앗을 가지고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아 씨앗이 차창까지 내려와 놀아 달라고 보챈다. 한 녀석을 집어 들고 가는 길을 물으면 길은 시작된다.

물 너머를 그리워하던 길이 만들어낸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만들고 건너느라 애쓴 것은 길인데 왼쪽에 펼쳐 놓은 갈대의 춤은 내 것이라 해도 죄로 갈 일 아니다. 난 노래를 흥얼거린다. “세노야, 세노야, 기쁜 일이면 저 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님에게 주네.” 슬픈 일을 님에게 준다는 고은 시인에게 할 말이 가득하던 날도 있었지만, 이제 슬픔이 슬픔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도 좀 알게 되었다. 비 오는 날 애인에게 우산을 받쳐주지 말고 같이 비를 맞으라는 말도 들을 줄 안다.

이 길은 끝까지 물과 함께한다. 물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니 우린 계속 얼굴을 부딪친다. 봄과 여름 얼굴은 시원하고, 가을과 겨울 얼굴은 춥다. 시원해서 좋고 추워서 좋다. 잡고 있던 님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게 시원함의 매력이다. 나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물을 버리기 때문에 물이 이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물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지니 추워서 좋다.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로마에 갔더니 ‘로마 그늘 전문가’가 있었다. 무더운 콜로세움 앞에 우릴 세워두고 가이드는 그늘처럼 말했다. 로마의 그늘은 모조리 자기 수하에 있으니 걱정 말고 보고 즐기는 일에 몰두하라고. 이잉1길! 정읍의 그늘 전문가가 추천하는 길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늘이다. 무릇 존재가 있어야 생기는 존재, 그늘은 그곳에 늘 살아 있다. 물론 그날만은 당신 그늘 지워져도 좋으리라. 더욱이 해가 갈수록 그늘이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얻어 나날이 발달하고 있으니 얼굴 타기를 원하지 않는 이쁜 사람들은 시방 가도 좋고 나중에 가도 좋다.

경사(慶事)에 경사(傾斜)를 내지 마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걷기 편한 길은 ‘깔꾸막’이 없다. 나아가고 올라가는 일이 전부인 날도 있었다. 돌아가고 내려가는 길은 평탄한 게 좋다. 오르는 일에 불편해진 관절을 치유하고 싶다면 이 길로 오라.

어린 전나무를 여섯 그루의 듬직한 어른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을 놓치면 안 된다. 그런 풍경을 연출해낸 사람은 아기단풍과 같은 심성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혼밥과 혼술이 대세지만 옛날 집엔 식구들이 무던히도 많았다. 그 앞에 가만히 서서 흘러간 식구들을 뒤돌아보면 아련히 아름다울 것이다.

물가에 핀 흰 찔레꽃 향기를 맡으려면 코 평수를 넓히는 수고를 아끼지 마시라.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코 평수를 넓히긴 쉽지 않겠지만, 우리 미학을 완성하는 재료는 냄새이니 ‘후각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인간의 근원적 냄새를 맡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강사가 바로 물가에 핀 흰 찔레꽃이다.

어린 굴거리 잎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뒤를 보살펴준다는 지난해의 굴거리 잎을 만나거든 짧게 세 번 박수라도 쳐주어라. 꽃과 잎이 서로 볼 수 없는 내장상사화(백양화)와 누가 더 생존에 유리할지를 놓고 실제적 지능을 겨루면 용호상박일 것이다.

다람쥐는 보고, 새들은 들어라. 다람쥐가 그대를 보러 올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사이좋게 아래와 위를 나누어 사는 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귀 기울여 보라. 아래에선 오목눈이, 노랑할미새, 숲새가 위에선 오색딱다구리, 소쩍새, 올빼미가 보이지 않는 경계를 잘 지키며 살아간다.

너럭바위 위에서 오카리나를 부르던 처녀를 부르며 자신을 늘 비출 줄 아는 우화정에 이르면 그대도 깃털로 화해 서래봉을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겐 발이 더 귀하니 넘어가지 말고 갈매나무가 있는 숲길로 들어서라.

“샘물이 솟는다 퐁퐁퐁 낮이나 밤이나 퐁퐁퐁 길가는 나그네들 목 축여 가라고 산비탈 돌 틈에서 퐁퐁퐁” 이 노래가 생각나는 샘을 만나거든 애인과 고무줄놀이를 해도 좋을 것이다.

돌다리 앞을 지키는 연리지에게 사진 찍자고 말해보라. 그렇지 않으면 수줍음을 잘 타는 연리지는 고개를 나무둥치에 묻어버릴지도 모른다. 이 나무와 저 나무가 합쳐져 하나가 되듯 우리도 하나 되지 못할 리 없다고 생각하며 연리지의 볼에 얼굴을 대고(커다란 까치발이 필요하겠지만) 한 방 찰칵하시라.

정혜루 마루에 올라서기 전에 샘물 마시는 걸 잊지 마라. 거기 기와의 ‘下心’을 놓치지 마라. 그 글씨를 쓴 이후로 물의 숫자가 108에서 100으로 줄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스님이 하거든 그냥 웃어버려라. 정혜루에서 차와 고구마 보시를 받았다면 당신은 길의 끝자락을 본 셈이다.

‘이잉1길’은 만리장성을 걷다 붙여준 애인의 별칭이었다. 하도 ‘글지 이잉’ 하길래 아예 ‘이잉’이라는 별난 맛을 지닌 이름으로 불러 주기로 했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은 ‘이잉’이고 ‘이잉4길’까지 이름 지은 길들이 우릴 부르고 있다. 애인과 길을 걸어라. 마음에 드는 길을 만나면 애인의 이름을 따 둘만의 길을 만들어라. 이름 붙여준 길은 둘에게 와 김춘수의 ‘꽃’이 될 것이다.

 

/이영종(시인)

*201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2 박재삼문학제 신인문학상 백일장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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