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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사 100인 열전] 전주출신 전라감사 이백유

전주출신 개국공신으로 전라감사에 부임
정도전 당여로 1차 왕자의 난 때 실각

이백유(李伯由)는 전주출신으로 태조 4년(1395) 2월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8월까지 6개월간 재임하였다. 그는 조선건국후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었으며 완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의 당여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이듬해 죽었다. 그는 조선건국의 핵심인물이었으나 권력재편과정에서 축출되었다.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세력들이 대부분 그러했다.

이백유를 모신 양후사 사당이 있는 황강서원. (도문화재자료 12호)
이백유를 모신 양후사 사당이 있는 황강서원. (도문화재자료 12호)

△전주 마전출신의 신진사대부

이백유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공민왕 1년(1352)에 태어나 정종 1년(1399) 48세로 졸하였다. 그는 본향도 전주이고 살기도 전주에 살았다. 전주이씨는 전주최씨, 전주유씨와 함께 전주를 대표하는 3대성씨이다. 전주이씨라고 하면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를 떠올리지만, 이백유 집안은 그의 증조부 이문정을 대표로 하는 가문으로 조선왕실과는 다른 가계이다.

이백유 집안은 전주 효자동 마전(馬田, 마랏)에서 대대로 세거하여 세칭 마랏(말안)이씨라고 한다. 마전이라는 지명은 지세가 달리는 말이 밭에 내리는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졌다. 이백유가 개국공신이 되어 전라감사로 오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삼밭[麻田]이 마소 매는 밭으로 바뀌어 마전(馬田)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지금의 문학로(文學路)라는 도로명은 그 집안에서 세운 정자 문학대에서 따온 것이다.

이백유의 초명은 재(才)ㆍ자유(子愉)이다. 그의 조부는 정당문학 이문정(李文挺)으로 고려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으며 마랏이씨의 중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검교중추부사 이몽(李蒙)이고, 어머니는 전주최씨로 고려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직제학을 지낸 최용갑(崔用甲)의 딸이다. 부인은 해주 오씨 군수 오사운(吳士雲)의 딸과 파평 윤씨 진사 윤승열(尹承烈)의 딸이다.

마랏이씨의 유적으로 이문정이 낙향하여 건립하였다는 문학대가 있고, 이문정ㆍ이백유ㆍ이경동ㆍ이목 등을 모신 황강서원이 있다. 황강(黃崗)은 이문정의 호이다. 문학대와 황강서원은 도문화재로지정되어 있다. 이백유를 모신 부조묘 양후사(良厚祠)가 그 중심적 위치에 있다. 문학대는 완산동 곤지산 아래에 있다가 마전마을로 옮겼으며,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황강서원 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문학대(도기념물 24호, 1960-70년대 촬영)
문학대(도기념물 24호, 1960-70년대 촬영)

△조선 개국공신 책봉과 전라감사 임용

이백유는 이색의 문인으로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여 공양왕 2년 우상시(右常侍)를 지내고 예조판서에 올랐다. 1392년 7월 배극렴, 남은 등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조선 건국후 개국공신 3등에 책봉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가 전라감사로 부임한 것은 44살 때인 태조 4년(1395) 2월 26일이다. 『호남도선생안』에 을해년 2월 26일 하계(下界)로 기록되어 있다. 하계는 전라도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전라감사 이임에 대해서는 같은 해 8월 30일 한성윤으로 상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개월간 전라감사로 재임하다가 한성윤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다

<태조실록> 에 보면, 그가 전라감사 재임 때 황군서(황희의 부)가 도안문사로 제주에 다녀와 암말이 줄어드는 폐단을 아뢰어 마른 말고기 진상을 그만두게 한 일이 있다. 또 왜구에 항거한 완산의 절부 임씨 정문을 세운 일도 있었다.

상피제로 인해 출신지역의 지방관으로 임용될 수 없는데 이백유는 전라도출신으로 전라도관찰사에 임용되었다. 조선왕조 5백년간 전라도 출신 전라감사는 12명에 불과하다.

 

△전라도출신 개국공신들의 혼맥

이백유는 태조 7년 8월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로 지목되어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풀려나 이듬해 정종 원년 고향인 전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의 짧은 생애였다. 후에 양후(良厚)라는 시호가 내렸다.

조선건국후 정국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백유 만이 아니라 전라도출신 개국공신세력들이 1차 왕자의난 때 대부분 축출되었다는 것이다. 전라도출신 개국공신을 꼽으라면 이백유, 심효생, 오몽을 등을 꼽을 수 있고, 장지화와 정용수도 전라도출신으로 추정된다. 심효생은 세자 방석의 장인으로 본향은 순천이지만 그 선대에 전주로 이주하였다.

<씨족원류> 를 통해 이들의 혼맥을 보면 전주최씨 최용갑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최용갑은 전주최씨 최아의 아들로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직제학에 올랐으며 그 부인은 우주황씨 황공로의 딸이다.

이백유의 외조부가 최용갑이며, 고모부는 전주유씨의 시조 유습의 아들 유극강이다. 심효생은 유습의 사위이며 최용갑의 처이질(아내 자매의 아들)이다. 오몽을은 최용갑의 조카사위이다.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된 우주황씨 황거중은 최용갑의 처조카이다. 이백유는 또 개국공신 조견과 동서지간으로 조견의 친형이 조선창업의 핵심인물 조준이다.

 

△전라도출신 개국공신들의 실각

이렇게 전라도출신 개국공신들이 혼맥으로 연결되었고, 이들은 또 전주의 대표적 사족 이씨, 최씨, 유씨 등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우주황씨 세력도 주목된다. 이들 전라도출신 개국공신들이 1차 왕자의 난 때 대부분 축출되었다.

방석의 장인 심효생과 인친 장지화, 오몽을 등이 죽임을 당하였으며, 이백유는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정용수는 왕자의 난은 피했으나 태조의 측근으로 조사의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러한 전라도출신 개국공신세력의 실각은 전라도의 운명을 가름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건국에 전라도세력이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전주의 토착세력들이 혼맥으로 연계되어 조선창업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심효생의 사위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정도전세력이 실각하고 방석이 죽임을 당하면서 전라도출신 개국공신세력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전주와 전라도가 조선왕실의 고향이면서도 조선초 중앙정계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은 이런 권력재편 과정에서 밀려난 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성종대이후 사림들이 중용되면서 호남사림들이 중앙에 적극 진출하여 선조대 정국의 주도적 위치에 올랐던 것 같다.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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