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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8)만복사지에 깃든 상상과 바람

넓은 들에 슬픈 바람이 불고

쓸쓸히 한 해가 저물어가네

스님은 없고 옛 절만 남아

해 질 녘 종소리 북소리도 없구나

조선 문신 양경우가 남긴 시 <만복사> 는 이즈음의 만복사지(萬福寺址)와 잘 어우러지는 시이다. 이제 옛 절마저 사라진 넓은 터에는 특별한 모습의 석인상이 두 눈에 깊은 세월을 담고 우뚝 서 있다.

만복사의 창건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말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원에 창건했다는 설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문종 재위(1046-1083) 때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복사는 탁발하고 절로 돌아오는 스님의 행렬 모습이 남원8경 중 하나인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으로 알려질 만큼 번창했던 사찰이었으나 안타깝게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되었다. 

만복사 건물은 모두 소실되었지만,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복을 내려준다는 이름 덕분인지 고려 시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층석탑, 석조대좌, 당간지주, 석조여래입상 등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남아있으며, 석인상을 비롯해 오랜 흔적과 수많은 이야기를 만복사지 너른 터가 품고 있다.

 

사적 만복사지(좌)석인상(우측,상하) /사진제공=남원시
사적 만복사지(좌)석인상(우측,상하) /사진제공=남원시

만복사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석인상의 존재감이 강렬하다. 머리 위에서 다리 끝까지의 길이가 3.7m가량이고 흙에 묻힌 부분까지 포함하면 전체가 5.5m 높이로 육중하다. 또한, 정자세가 아니라 눈을 크게 부라린 모습으로 어깨에 무언가를 걸러 메고는 냅다 고개를 뒤로 돌려 보는 자세로 서 있다. 길 다란 사각형의 돌기둥 3면에는 사람의 형상을 조각하였고, 한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 두 개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석인상은 넓적한 얼굴형에 안구가 돌출되고 입을 굳게 다물어 화난 모습으로 보이나, 투박한 미소가 감도는 듯 보이기도 해 소박한 멋도 풍긴다. 몸체를 살펴보면 상반신은 옷을 걸치지 않은 반나체로 표현되었으며, 오른쪽 팔을 구부려 무언가를 쥐고 어깨에 건 자세로 허리춤에 옷을 묶어 물결무늬 옷자락이 하반신을 가리게 표현했다. 또한, 아래쪽 면은 별개의 대좌를 사용하지 않고 뾰쪽하게 다듬어 땅에 묻게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석인상이라 불리지만, 다듬어진 한 면에 뚫린 두 개 구멍의 기능이 특징되어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당(깃발)을 멘 장대를 지탱하던 당간지주로도 알려져 있다. 얼굴 모습도 인왕상이나 금강역사 등 불교의 수호신으로도 보이니 위엄함을 갖춘 채 투박한 미소까지 머금은 어디에도 없는 당간지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확실하지 않다.

2009년 석인상 발굴 현장과 발굴 전 / 사진제공=남원시
2009년 석인상 발굴 현장과 발굴 전 / 사진제공=남원시

또한, 석인상은 홀로 있던 게 아니라 한 구멍을 이을 자리에 한 쌍으로 2기가 함께 있었고, 게다가 석인상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었다. 만복사지 도로 옆에 파묻힌 채 얼굴과 어깨를 땅위로 빼꼼하게 숨 쉬듯 내민 것을 2009년에 발굴해 본래 자리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 세웠다. 그래서인지 자세히 살펴보면 땅속에 묻혀있던 몸체와 땅 위에 노출되었던 부분이 차이가 나고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차에 치여 깨지고 뭉개졌던 모습이 보인다.

조선고적도보 내 석인상(좌, 우 상) /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향토박물관 소장 석인상(우측, 하) / 사진제공=남원시
조선고적도보 내 석인상(좌, 우 상) / 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향토박물관 소장 석인상(우측, 하) / 사진제공=남원시

석인상의 옛 모습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사진이 실린 <조선고적도보> 와 <고적급유물등록대장초록> 등에 남아 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석인상은 남원 만복사지 유물과 함께 만복사지 이왕석상(二王石像)으로 등록되어 있다. 수록된 유리 건판 사진을 살펴보면 당간지주 앞에 서 있는 석상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다른 석인상은 땅에 상당 부분이 묻힌 채 이미 파손된 것으로 확인되며 이후 도로를 내면서 더 묻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두 기 중, 비교적 온전하게 몸체까지 발굴된 석인상은 만복사지 안으로 옮겨졌고, 뭉개진 얼굴의 석인상은 남원향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만복사지 내 석인상과 사뭇 다르게 풍화와 훼손도 심해 보인다. 아직도 도로 아래 땅속에 묻힌 조각난 몸체와 합체되기를 바라며 세월을 묵묵하게 응시하는 것 같은데, 만복사가 복을 내려주는 절이다 보니 석인상의 돌을 갈아 마시면 아들을 점지해주는 효험이 있다 하여 저리 뭉개졌다는 설도 전해지니 더 애잔하다.

만복사에서 복을 기원한 것으로,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 에서 양생이 배필을 얻기 위해 기도하다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한 것과 고전소설 『최척전』에서 자식을 얻고자 최척과 옥영이 기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유재란 당시 왜군이 만복사의 사천왕을 싣고 와 성 밖을 돌며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자 했다는 가슴 아픈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사천왕도 석인상과 연결해 많은 상상을 하게 한다. 

만복사저포기 그림 / 고 신문수 화백
만복사저포기 그림 / 고 신문수 화백

스쳐 지나가면 그저 비어있는 터겠지만, 많은 이들이 그 위에 이야기를 더해 만복사지는 새로운 상상으로 덧입혀지고 있다. 최근 고인이 된 신문수 화백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에 그림을 그려 유작으로 남겨 놓았다. 누구나 만 가지 복을 받는다는 의미에 많은 이들의 바람과 상상이 그 빈터를 채우고 있으니 만복사지는 비어있으나 가득 찬 곳이다.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생긴 메타버스 속 온전한 만복사를 상상해 본다. 외전처럼 이어진 이야기 속으로 우리도 들어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없이 짝과 해로하는 양생을 축복해주고, 만복을 받고 코로나 걱정 없이 유람하며 함께 같은 시간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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