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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리뷰]우리 소리의 오래된 첨단, 국창 신영희·조상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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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음악평론가

소리가 흔해진 시대다. 거리를 다녀보면 저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다. 심지어 노이즈 캔슬링, 그러니까 내가 듣기 싫은 소리는 차단해 버린다. 오롯이 듣고 싶은 것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어떤 소리는 결코 캔슬(무효화)될 수 없다. 차고 넘쳐서가 아니다. 되레 희소해서 그렇다. 실은 소리가 소리 위에 집을 지어서인 까닭이다. 일차원적/일회성 청각 자극을 넘어서, 스스로 세월의 더께를 이고 시대의 풍파를 견뎌 끝내 3차원의 건축학적 랜드마크가 돼버린 소리라서 그러하다.

지난달 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모악당에서 열린 2024 전주세계소리축제 폐막공연, ‘조상현&신영희의 빅쇼’에서 시간과 소리로 건축된 두 개의 오벨리스크를 만났다. 우리 현대사를 수놓은 그 둘이 나란히 오똑 선 모습을 관람할 수 있어 드물고 귀한 무대였다.

국창의 반열까지 오른 명창 조상현과 신영희. 두 사람은 각각 87세, 82세다. 그들의 소리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공연 전부터 모악당 주변을 서성이는 1000여 명의 관객들은 표정에서, 일행과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에서 모두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은 날짜 타이밍도 시쳇말로 죽여줬다. 1995년 KBS TV ‘빅쇼’에서 두 사람이 ‘소리로 한 세상’이란 제목 아래 전 국민 앞에 절창을 함께 쏟았던 것이 바로 8월 18일. 그러니까 그로부터 정확히 29년째 되는 날, ‘빅쇼’라는 타이틀 아래 두 국창이 맞닥뜨린 것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각각 완창 판소리를 들려준 바 있다. 그래서 이날 무대는 어떤 구성일지가 첫째 관심사였다. 막이 열리고 마주한 이날 공연은 ‘빅 쇼’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그 형식은 음악극에 가까웠다. 박상후 지휘의 KBS국악관현악단이 받치는 가운데 전북의 젊은 소리꾼 10인이 무대 전면에 나섰다. 조상현, 신영희의 인생사를 아니리로 구성해 풀어냈는데, 휴대전화 쇼트폼 세대도 지루하지 않게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대사로 엮었다. 빠른 전개가 돋보였다.

두 국창은 각각 스스로 작사, 작창을 해 우리 소리의 신(新-)고전이 돼버린 ‘흥타령’과 ‘사철가’를 부르며 느긋하게 등장했다. ‘빗소리도 임의 소리 바람소리도 임의 소리…’ 하며 임을 그리고,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하며 인생무상을 한탄하는 그 소리가 원곡자의 입에서 터져나올 때 객석에서도 낮은 탄성이 함께 터졌다.

중반부에 마련된 흥보가 한 대목은 1970, 80년대 TV 출연으로 안방극장까지 사로잡았던 준(準-)희극인으로서 두 사람의 풍모도 엿보게 해줬다. 마당쇠 신영희에게 글 가르쳐주려다 되레 당하는 놀부 조상현의 티키타카와 케미스트리에 객석이 남녀노소 흥겹게 들썩였다.

국악인이자 불세출의 국악 소재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이기도 한 오정해가 사회를 맡은 중반부 토크는 짧지만 여운이 길었다. 일단 열연, 열창의 안부를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힘들어 죽겄소~”(조상현)와 “쓰러지기 직전요~”(신영희)로 화답하며 너스레를 떤 두 사람. 이어지는 음악 철학이 촌철살인이다. 사철가의 작창 배경을 묻자 “인거유흔(人去遺痕·사람이 한 번 가도 흔적은 영원히 남는다)”을 내놓은 조 명창. 신 명창은 국악 세계화에 대해 “우리 것은 역사의 한 페이지예요. 없어서도 안 되고, 없을 수도 없어요. 소리 축제는 영구히 하도록 여러분들이 도와주세요” 하고 목 놓았다. 간간이 무대 뒤 스크린으로 투사된 두 사람의 TV 출연 모습과 소싯적 사진은 객석에 흐뭇하고 잔잔한 웃음의 파문을 일으켰다. 젊은 소리꾼들의 패기 넘치는 스토리텔링과 KBS국악관현악단의 웅장한 연주 모두 돋보였다.

마지막 한 판은 가히 ‘폭발’이었다. 특히 조상현 명창의 심청가 중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은 빙의한 듯한 열연, 활화산 같은 절창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세계 어느 디바와 디보가 80대에 두 사람만 한 사자후를 뿜어내랴. 세월이 더께가 되고 도리어 갑옷이 되는 우리 소리의 신비함이 이날 전주 고을에 현현한 것이다.

8월 초, 멀리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올림픽 태권도 남자 58kg급 결승전 직전. 대한민국의 박태준 선수는 서두에 언급한 저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태연자약 노래 한 곡을 듣고 있었다. 요즘 인기 높은 아이돌 밴드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란 노래다. 아제르바이잔 선수를 꺾고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건 박 선수는 경기 전 노래 들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만들고 싶어서 (그 노래를)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빅쇼’의 초반, 젊은 소리꾼들의 아니리 가운데 귓전에서 좀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자네들, 혹시 그거 아는가. 한자에는 소리 ‘성’자가 있고, 노래 ‘가’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는 왜 우리가 부르는 것을 노래라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하는지를. 노래는 사람에서 나오지만 소리는 자연에서 나오기 때문이지. (중략) 소리를 잘하는 것은 결국 이 자연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 그것은 곧 소리꾼의 사명이다.”

후배들의 입을 빌어 전달됐지만 사실 이는 다름 아닌 조상현 명창이 공연 준비 기간 내내 스태프와 출연진에게 여러 번 강조했던 경구(警句)이자 당신 음악 세계의 철칙과 같은 것이다.

조상현과 신영희, 두 사람의 소리는 과연 랜드마크이되 회색 콩크리트의 구조물이 아니었다. 웅대한 자연의 배경과 하나가 된 듯했다. 한 페이지가 아니라 여덟 폭의 병풍이, 세월 따라 접고 접은 팔순의 ‘폴더블 디스플레이’가 돼있었다. 우리 소리의 정전(正傳)이 무엇인지, 정점(頂點)은 어디인지가 궁금할 때 향후 언제든 펼쳐볼 수 있는, 오래된 첨단으로 꽃 피어 있었다.

임희윤 음악평론가는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전 헤럴드경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KBS 1라디오 ‘오늘 밤 1라디오’, 국악방송 ‘창호에 드린 햇살’ 등에 매주 출연해 음악 이야기를 한다. 저서로 ‘예술기’ ‘망작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 등이 있다. 티빙 ‘케이팝 제너레이션’, SBS프리미엄 ‘교양이를 부탁해’ 전문가 출연. @heeyun_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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